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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

소요유 : 2009.03.05 20:00


건물을 신축할 때 또는 건물을 보수할 때,
그 둘레에 강관 등으로 엮어 작업 발판을 만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를 비계라고 이른다.
업계에 오래 종사하여 경력도 제법 되며,
현재도 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이가
이 비계를 설명하길 이리 말했다.

“돼지고기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비계라 한다.
마찬가지로 건물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을 빗겨 이르길,
비계라 하는 것이다.”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젓하게 이리 풀어낸 것이다.

나는 건설업계에 종사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비계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가만히 유추하건대 이것이 비계(飛階)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늘 길을 나아가 허공중에 계단을 달아 낸 것이니,
이게 “날 비”, “섬돌 계”이거니 하고 짐작한 것이다.

돼지고기와 비계라,
이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인가?
필경은 토목, 건축공학을 전공했음직한 이의 일탈(逸脫)을
우리는 포용력을 발휘하여 그저 넉넉하게 감싸 안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식함을 들어 조롱하여야 할 것인가?  

웹상에서 비계란 말을 검색하여 보면,
비계라고 그저 한글로 소개한 링크는 많아도,
한자어는커녕,
이를 최소 한글에 병기하여 안내한 경우일지라도 찾아 만나기 쉽지 않다.

이젠 한자어가 병기된 문서를 접하기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비계와 같이 한자어가 덧붙여 있다면 한결 의미 파악이 쉬울 문서가,
한글로만 죽 적혀 있다면 어찌 견딜까 하는 의구심을 나는 갖곤 한다.

이명박 정권 들어와 영어몰입교육이란 실로 가당치 않은 짓거리를 해대었지만,
역시나 한자 또한 우리나라 말, 글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한글을 귀히 여기고, 일절 남의 글, 말을 꺼려 삼가고자 한다면,
어찌 영어만 문제랴, 한자 역시 가려 쓰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이든 글이든 한자어를 여의고
단 한치도 나아가기 어려운 사정을 어이하랴.
북한처럼 일찍이 언어생활, 문자 생활에 있어,
한글 위주로 판을 짜고, 다른 나라 말, 글을
강제력을 동원하여 극려 경계하지 않을진대,
어찌 언중의 생활을 한 곳만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국어의 근 70%가 한자어에 기대고 있는 실정에서,
한자를 몰아내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 쓰임이 많지 않은 비(飛) 자(字)이지만,
비계(飛階)는 차치하고라도,
비행기(飛行機), 비룡(飛龍), 비상(飛翔), 혼비백산(魂飛魄散), 비산(飛散),
비거리(飛距離), 비구(飛球), 비속(飛速), 비류(飛流), 비륜(飛輪), 비약(飛躍) ...
등의 말들을 한자어에 대한 이해 없이 어찌 바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가령 비상(飛翔), 비상(砒霜), 비상(非常)을 어찌 구별할 수 있겠는가?
혹간 사정에 따라 문맥상 살펴 헤아릴 수 있을런지 몰라도,
엄격히 그 뜻을 짚어야 할 경우에는 도리 없이 한자어를 따져 새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약 한글전용으로 가고자 한다면,
한자를 모두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고, 이들을 모두 한글로 바꾸어야 할 노릇이다.
그러자면, 도대체 얼마만한 공력과 사회적 합의가 뒤따라야 하겠는가?

세상일이라는 게, 음이 있으면 양이 있는 것인즉,
감히 한글한자병용이 마땅하다든가, 한글전용으로 나아가야 한다든가 하는 의론의
시비를 한 자리에서 한 바탕 갈라 판가름 지울 수는 없다.
언어생활이라는 게 두부 자르듯,
선악시비가 명확히 가려지는 마당자리가 아닌즉 더더욱 쉽지 않다.

한자를 쓰는 것이 나라의 혼을 팔아먹고,
민족의 얼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가 있지만,
나로서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또는 거들 정력이 남아있질 않다.
역으로 한자어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측을 마냥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이 양자의 주장들이 함의하는 바 그 뜻을 나는 모두 일정분 동의할 뿐이다.

내가 양단간에 하나를 택해 한쪽으로 뚜렷한 입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은,
한글어의 아름다움, 한자어의 뜻새김이 모두 내겐 좋기 때문이다.
한글어는 한글어대로 아껴쓰고, 닦아 윤을 내고 싶고,
한자어는 새길 수 있는 한 깊게 새겨 그 뜻을 헤아리고 싶은 것이다.
이 양자는 나의 문자생활에 모두 사랑할 대상이지,
하나를 가려 택한다든가, 하나를 배제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입장이다.

나는 내 처지에서 내 편리대로 언어, 문자생활을 한다.
일견 내 글, 말에는 상대적으로 한자어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운 수준을 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넘든 아니든 간에,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부족한 한자어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설은 공부를 익히고 있는 바임이랴.
거기 어찌 한자 일변을 향한 편애(偏愛)와 독단(獨斷)이 있으랴.
나는 다만 배우기를 갈망하며, 도상을 걷기를 즐겨한다.

이명박 정권의 영어몰입교육의 문제는,
영어교육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영어교육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아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자들은 어찌 이리 하나같이 천박한 짓만 골라서,
양아치같이 염치없는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것일까?
대운하, 부자 감세, 부동산 부양책 ...)
영어를 배울 인간은 영어를, 불어를 배울 인간은 불어를 배우면 되는 것,
누가 되었든 제 필요와 판단에 의해 택하면 될 노릇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영어뿐이랴, 불어도, 스페인어도, 에스페란토도 모두 배우고 싶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할 처지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대로,
백의(白衣)의 학도(學徒)로서,
내가 꿈꾸는 길을 가려 택해 더듬어 가고 있을 뿐인 것을.
가령 그게 돌궐어가 되었든, 산스크리트가 되었든
어찌 시비거리가 될 수 있으랴.

그렇지만,
비계(飛階)를 돼지비계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안타깝다.

돼지고기 다 써먹고나서 마주하는,
비계(秘啓), 비계(秘計), 비계(鄙計), 비계(轡繫)는
또 어찌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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