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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

소요유 : 2009. 3. 1. 22:57


갑(甲)이란 원래
주역에,
百果草木皆莩甲開坼
봄의 뇌우(雷雨)에 초목이 딱딱한 껍질을 깨고 움트니 ... 라는 말이 있듯이
식물의 껍질을 뜻하는 용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지만,
오늘 말하고자 하는 뜻을 살려, 아래 특정 용례에 제한하여 생각해 본다.

갑은 식물 뿐이 아니라, 동물의 거죽을 덮고 있는 딱딱한 껍데기를 일컫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거북껍질이니 이를 귀갑(龜甲)이라고 한다.
갑(甲)과 견주어 각(殼)이란 말도 두루 쓰인다.
예컨대, 조개껍질은 갑(甲)이라 하지 않고 각(殼) 즉 패각(貝殼)이라고 하며,
지구 표면은 지각(地殼)으로 부르는 등의 쓰임이 있다.

각(殼)은 거죽 껍데기 일반을 지칭하는데 반해,
갑(甲)은 경각(硬殼) 즉 딱딱한 껍데기를 이르니,
각에 비해서는 사물의 외양태(外樣態)가 특별함을 한정,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갑각(甲殼)이란 말을 보면 이 풀이가 사뭇 여실해지는데,
각(殼) 앞에 갑(甲)을 두어 꾸밈으로서,
여느 일반적인 거죽과는 다른 상태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죽이되 어느 정도 딱딱한 것은 모두 각(殼)이라 부를 수 있으나,
갑(甲)이란 그 굳기, 즉 경도(硬度)가
예사롭지 않게 일상을 훌쩍 넘어 딱딱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깐 생각해본다.
각이든, 갑이든 딱딱하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는 거죽이 그러하다는 것이니,
역으로 속은 무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즉, 외강내유(外剛內柔)한 모습을 바로 추상할 수 있다.

거죽을 강한 것으로 싸안아,
무른 안의 것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니,
대부분의 생물은 이런 식으로 연약한 신명(身命)을
외부의 위해(危害)로부터 자위(自衛)한다.

사람은 본디 피부가 그리 강하지 못하나,
머리(통)만큼은 다른 곳에 비해 딱딱하다.
갑상인두(甲象人頭)라,
인체의 두부(頭部)를 특별히 짚어 갑(甲)에 배대하기도 한다.

어린아이는 머리가 말랑말랑하다.
하지만, 커가면서 딱딱해진다.
영글어가다 차츰 차츰 그치게 되는 순간
이제부터는 거꾸로 거죽이 차츰 딱딱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완전히 성인되면 신체 중에서 머리가 가장 딱딱해지도록 굳어진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말하면,
그 안이 제일 무른 것으로 채워져 있음을,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리 애써 가장 딱딱한 것으로 싸안아 보호할 까닭이 없다.

(약간 갓길로 돌아드는 이야기지만 덧붙여둔다.
어린 아이 숨구멍 흔히들 대천문(大天門)이라 하는 곳을 한방에선 백회(百會)라 한다.
커가면서 말랑말랑하던 이곳이 딱딱해지면서 막혀버리게 된다.
이 때부터 비로소 강건한 한 인간으로써 자립(自立)할 태세가 갖춰지게 된다.
나아가 서서히 자아가 생기고 외물과 자신을 나눠 가르게 된다.
하지만, 이 때부터 세상과 단절되고 부단히 고투(苦鬪)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늘과 통하는 큰 문이 닫히었으니 아니 그러할 이치가 있겠는가?
통천(通天).
하늘과 통할 수 있는 문을 닫아두고
하늘과 통하고자 기를 쓰며 별별 짓들을 다 찾아 헤매게 된다.
명상, 종교, 문화 ... 따위들 말이다.)

사슴뿔은 더욱 신기하다.
어린 뿔은 그 안에 피가 흐르고 있다.
얼핏 그저 딱딱한 뼈로 보이지만 녹용(鹿茸)은 거기 생생한 피가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늙은 뿔은 피가 말라가며 그냥 딱딱한 뼈만 남게 되고
종국엔 떨어져 버리고 만다.
해서 이를 녹각(鹿角)이라고 하니, 녹용과는 비교불허다.

나의 이론대로라면 머리통을 갑(甲)이라 할 때,
사슴의 경우에는 이를 넘어 각(角) 즉 뿔을 밖으로 내어,
한층 적극적으로 대세(對世) 경계하는 것이다.

한즉 갑(甲)은 수세적(守勢的)인 방어용,
각(角)은 공세적(攻勢的) 즉 공격적인 면모를 갖는 것이다.
생물은 이리 각(殼), 갑(甲), 각(角) 등으로 채비하여,
외부에 대향하여 자신을 지키려 한다.

사람의 경우 어찌 사슴보다 혹은 외뿔소(兕)보다 공격성이 적으랴,
모질기로 따지자면 이 지구상에 사람처럼 극악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으랴.
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은 뿔이 나지 않는다.

하여,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고안을 한 바 있으니,
이 또한 이름하여 부르길 갑(甲)이라 하는 것이 있음이다.

고대의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 또는 금속으로 옷을 지어 입었으니 이를 갑(甲)이라 한다.
흔히 갑옷과 투구라 부르는 것,
즉 갑주(甲胄)를 진작에 고안하여,
전쟁에 임하였음이다.

갑주를 미처 채비하지 못하였을 때 어찌 하는가?
가령 몽둥이가 날아들 때는 팔뚝을 가로 들어 상단 막기를 한다.
이도 아니 되면 웅크리고 앉아 등을 내주게 된다.
도대체가 몽둥이가 날아드는데 배를 내보이는 게 상상이 되는가?
이 때 등은 바로 갑(甲)이 된다.
음인 배를 감추고, 양인 등을 외향(外向)한다.
음양의 이치가 이러하다.

개들이 싸울 때는 모두 멱을 노린다.
멱은 숨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인체 중 제일 약한 곳에 속한다.
잘 싸우는 개는 멱을 잘 감추고, 발로 갖은 초식을 펴서 상대를 요리하되,
곧잘 등으로 상대의 공격을 쓸어 털어낸다.
힘에 부쳐 도저히 아니 될 때는 발랑 넘어져 배와 멱을 상대에게 내준다.
이렇듯 음을 상대에게 내보임은 이제 내가 졌다는 표시이다.

노름에 미친 도박꾼이 계집 금가락지를 빼서,
노름방에 드나 뜰 때만 하여도 아직 가망이 있는 상태다.
하지만 급기야 제 계집까지 판돈으로 내놓을 때는 끝에 다다른 것이다.
도대체가 시랑(豺狼) 같은 놈들에게 음을 내주고서야,
다음을 기약해보려 하고 있으니 어찌 끝이 가깝다 이르지 않을쏜가? 

갑병(甲兵), 장갑차(裝甲車), 갑마(甲馬) ... 

사람, 차, 말 모두 갑(甲)을 둘러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임이라,
요는 이게 모두 전쟁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특히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등산하고 내려오다가
문득 이리 갑(甲)을 떠올린 사연이 있으니
이제 그 얘기를 할 참이다.

막 산을 내려오는데,
좁은 길목 앞에 선 여인 하나가
겨운 듯 몸을 가누지 못하며 길을 막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길 한가운데 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로되,
제 몸 하나 힘에 겨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사지 놀림 무겁기가 단 솥단지 들어 올리듯 하고 있더란 말이다.

나는 몸을 틀어 겨우 빗겨 지나며 그의 옆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화장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나는 순간 갑(甲), amor란 단어들이 떠올랐다.
화장 역시 갑(甲)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저것은 갑장(甲裝)이야.
이리 되었던 것이다.

사내들의 갑장(甲裝)과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화장(化粧) 아니 화장(花裝)을 하는 게로다.

갑장(甲裝)이 전쟁터에 나아가기 위한 꾸밈이라면,
그럼 화장(花裝)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들 여인네 역시 산까지 이르러 저리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할 지경임에도 저리 간절하게 정성을 지피어 올리고 있음이라.
아아, 그 뜻이 하늘가에 어찌 이르지 못할쏜가?

그런데 말이다.
갑장(甲裝)이란 본디 두려움의 소산임이라.
갑장 속엔 약한 것이 들어 있다.
이 약한 것이 상할까봐 방비코자 갑(甲)을 두르는 것이다.

여인네들 성장(盛粧)이란 것 역시 두려움이 소산이 아닐까 잠깐 의심이 들었다.

그게 다듬어 정갈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혹은 꾸며 남정네들의 관심을 붙들어 매기 위한 생물학적인 교책(巧策)기이기도 하지만,
정작은 내 의심처럼,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과연, 그 두려움이란 무엇일까?

무릇,
거북이는 귀갑(龜甲), 물고기는 인갑(鱗甲), 게는 해각(蟹殼)으로 중무장(重武裝)하여
거친 파도를 거스르고, 바람, 돌 바위를 이기며,
또한 사내들은 갑주(甲胄)를 두르고 거친 세상을 싸워나간다.

세상은 이리 무서운 게다.
갑(甲)으로 자신을 에워싸지 않으면,
도대체가 삶을 지켜낼 수가 없는 게다.

그런데,
여인들은 꽃단장하여,
이 사바세계를 건넌다.

보기에도, 거북이 등껍질, 물고기 비늘, 게껍데기, 갑옷 등속은 얼마나 흉한가 말이다.

하지만, 여인들은 꽃으로, 지분향(脂粉香)으로 단장(丹粧)하고 있음이니,
저들이야말로 사뭇 고단수가 아닐까 싶은 게다.
그 누가 있어 감히 전쟁터에 꽃을 들고 나설 수 있음인가?
두려움을 어느 누가 꽃으로 감출 수 있었으리요?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할 형편이면서도,
오늘 산에 올라 꽃단장의 깊은 뜻을 떨친,
여인네에게 갑제(甲第, 일등)의 공(功)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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