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怨)과 원(寃)
從來富貴生猜忌,(종래부귀생시기))
忠孝常含萬古寃。(충효상함만고원)
자고로 부귀엔 시기가 따르고,
충효엔 상시 만고의 원한을 품게 된다.
조금 더 말을 보태면,
“사람이 부하고 귀해지면 주위로부터 시기가 따르게 되고,
충신, 효자는 모함, 질투를 받아,
배척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니 원한을 품게(머금게) 된다.”란 뜻이다.
이런 류의 말 쓰임은 예전부터 자주 내려오고 있다.
예컨대,
從來忠勇有寃呑 (종래충용유원탄)
- 종래로 충용스런 사람은 원한을 품게(삼키게) 된다.
이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인데,
내가 어느 글을 읽다 이 말 앞에 서 있게 되자,
잠깐 스치는 생각이 있어 몇 자 기록해둔다.
富貴 - 猜忌
忠孝 - 寃枉
이 짝을 가만히 맞춰본다.
무릇 충효자(忠孝者), 부귀자(富貴者)임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기 또는 모함을 당하지 않거나,
거꾸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몸가짐을 하였겠는가?
또는 자신이 충효자, 부귀자가 아님에,
그들을 향해 시기나 질투를 하고 있다면 그 모자람의 근원은 무엇일까?
또는 그들에게 짐짓 꾸며 거짓으로 아첨을 한다면 이 또한 무슨 노릇이겠는가?
혹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마음 바탕의 모습은 무엇일까?
***
나는 이런 따위의 뜻을 가만히 풀다,
불현듯 원(寃)이란 글자에 눈길이 머무른다.
하여, 원(寃)에 대해 조금 연구해보기로 한다.
일상에서는 원(怨)이란 말은 흔히 쓰지만,
원(寃)은 그리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대개 이 양자는 엄격히 구별되어 가려 쓰이진 않는다.
하지만, 양자는 사뭇 다른 바가 있음이다.
원망(怨望), 원한(怨恨) 등의 용례에서
원(怨)은 영어로 하면 resentment쯤 되지 않을까 싶다.
상대에 대한 불평불만을 넘어 분노에 이르는 지경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子)에서는 ‘恚也(애야)’라 풀이하고 있으니,
곧 ‘성냄’을 말한다.
이게 성내고 분노하다는 것으로 그치게 되면 다행인데,
끝내 해결되지 않으면 나중엔 깊은 한(恨)으로 가슴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러하니,
원(怨)이란 곧
‘恚也’, ‘恨也’이다.
이 원(怨)이란 글자를 대하면 이내,
분노하고 정한에 싸인 정경이 싸하니 마음속에 형상화된다.
抱怨天, 埋怨人 (포원천, 매원인) 또는
抱怨天, 埋怨地 (포원천, 매원지)
이 말처럼 원(怨)자를 실감나게 표현한 말을 나는 접하지 못했다.
글자 그대로 새긴다면,
“하늘에 원한을 품고, 땅 또는 사람에게 원한을 묻다.”라는 것이니,
이 얼마나 매서운 말인가?
두렵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또는 동물에게
포원을 지게 만든다면 하늘, 땅까지 이를 지켜보시리라.
원(寃)이란 글자를 대하면,
나는 자녀목(恣女木) 환영이 떠오른다.
깊은 원한을 품고 동구 밖 후미진 동산 나뭇가지에 목을 매 자살한 여인네가
내 심상에 포개져 그려진다.
원(寃)은 원(怨)에 없는 하나의 깊은 정조(情操)가 밑바닥에 흐른다.
우리가 원통(寃痛)하다고 할 때 원통(怨痛)이라고 쓰지는 않는데,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원(寃)이란,
도대체가 크게 잘못된 것이임라,
내가 잘못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욕(辱)을 당하고 있음이 전제되고 있다.
속된 말로 덤터기 씌움을 당한 것이다.
이 점이 원(怨)과 특별히 다른 점이다.
하니 원(怨)보다는 그 뜻이 특정 조건으로 사뭇 옭좁혀져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자면 원(寃)은 반드시 injustice란 정조를 밑바탕에 깔고 해석되어져야한다.
이게 빠지고 단순히 원한 정도로 풀이되면 크게 그르치게 된다.
남편이 시앗을 보게 되었다.
이제 본처를 향한 사랑은 식었다.
뜨뜻한 아랫목에 앉았어도,
하루하루가 냉골에 들은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날,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모진 구박이 이어지다 끝내,
느닷없이 하지도 않은 간통질을 하였다고 몰아세운다.
하루아침에 실절(失節)도 차마 아니오,
간통(姦通)한 계집이 되고 만다.
달도 다 사윈 그믐밤,
삽짝문을 열고 길을 나선다.
원통절통도 하여라,
억울한 심사를 달래지 못한 여인 하나,
동산에 올라 무명천을 갈라 나무에 건다.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가 밤의 장막을 찢는다.
곱게 길러주신 친정어머니도 생각나고,
막내의 해맑은 웃음도 지난다.
이미 식은 사랑이요, 깨진 사기사발같은 신세임이라,
고초당초 보다 매운 시집살이지만 이만이라면 얼마든지 참으련만,
간통질, 사통질이라니 이 얼마나 천부당만부당한 말인가?
디딤돌 위 위태롭게 까치발로 올라서,
무명 올가미에 고개를 디밀자,
하얀 이맛전에 찬디찬 땀방울이 쌀알처럼 돋는다.
둥근 고리 원이 이승과 저승을 가른다.
목이 걸쳐지자 잠깐 버텨 당기던 섬섬옥수를 탁 놔버린다.
만사휴의(
萬事休矣
).
짧으나마 고이 지킨 꽃다운 삶 하나가 언 땅 밑으로 떨어진다.
소복(素服) 앞섶 한자락,
바람에 문득 가랑잎 되어 밤공기를 젓는다.
축쳐진 몸뚱이 끝에 달린 가느다란 하얀 옥양목 버선 발목,
바르르 떨다 내처 멈춘다.
한 많은 세상.
나는 간다.
이 때 떠나간 이를 우리는 조상하여 원혼(寃魂)이라 부른다.
원혼(怨魂)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원혼(寃魂)이라고 써야 마땅히 옳다.
그녀가
소쩍새가 왜 아니 되겠음인가?
두견화(杜鵑花)는 어찌 아니 피겠는가?
나는 이게 한낱 전설이 아님을 믿는다.
뒷동산 두견화는
그래서 오늘 화사한 봄이 왔건만,
여직, 원통 절통하여 핏빛 진홍(眞紅)으로 다가온다.
원(寃).
나는 올 봄 진달래 피는 뒷동산에 오를 작정이다.
나만이 아는 진달래 군락지가 산 속 깊숙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 참고 글 : ☞ 2008/02/29 - [소요유] -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주반칠흑(晝半漆黑))
진달래,
꽃을 보고도 원(寃)을 떠올린 우리 선조들,
그 파란만장한 삶의 갈피마다 숨겨진 정한(情恨)이란 참으로 애닯을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