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대수의 법칙과 물태우의 법칙

소요유/묵은 글 : 2008.02.13 18:32


본 글은 sss의 “대수의법칙과 소수의법칙 - 선입관 2” 글을 읽고 쓴 글입니다.
제 앞 선 글에서 간단히 메모 형식으로 언급하였습니다만 오늘 정식으로 글을 써봅니다.

ref)
Link : 원문 글이 지워졌으므로 참조처의 링크 삭제함.

전작자가 “찢어진 아기 돼지”에서 보여준 냉혹한 태도를 대하고는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대로 하고 있는 이런 따위의 글들은 세상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들 글들은 얼핏 가치를 선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엉터리라는 것이 바로 밝혀집니다.
저는 이런 구조를 가진 글들의 해독(害毒)을 누구나 바로 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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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ss에서 “대수의법칙과 소수의법칙”란 제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 눈에 심히 거슬립니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이지만 이에 對向하여, 제 의견을 펴보고자 합니다.

그 글에서 이르길,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통계에서 흔히 <대수의 법칙>이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특정사건의 기대값은 실험의 횟수가 반복될수록 평균에 이르게된다는 것입니다.”

뭐 대충 이리 말해도 괜찮습니다만, 불명확하여 조금 미흡하군요.
평균이란 말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대수의 법칙을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만,
평균이란 말을 굳이 쓰겠다면, 다음과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크기가 큰 모집단에서 무작위로 뽑은 표본의 평균이 전체 모집단의 평균과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현실 세계에서 이에 해당하는 예를 들자면 여럿이 될 터이지만,
한 가지만 들면 이렇습니다.
예컨대 주사위를 던져 특정 숫자가 나올 수학적 확률은 1/6이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던지는 횟수가 증가하면 점점 수학적 확률인 1/6에 가까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전작자는 “대수의 법칙=중심 국한 정리(central limit theorem)”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소론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오류를 차제에 바로잡습니다.

그 글에서 언급한 기본 개념들을 본론에 들기 전에 하나 더 점검해보지요.

“그럼 대수의 법칙에 상반되는 <소수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해 볼께요.
소수의 법칙은 한마디로 말해 아주 적은 예로 전체를 추정하려는
우리들의 심리적인 경향을 말한다고 해요.“

그 글에서 소수의 법칙을 이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통계학, 통계역학을 배운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소수의 법칙”은 통계학(statistics) 용어가 아닌 듯 싶습니다.
소표본 이론(small sampling theory)은 있지만,
“소수의 법칙”은 제겐 좀 생소하군요.

하지만, 사회과학쪽에서 “소수의 법칙”이란 제하에 실험결과를 언급한 것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간 내용도 가지가지 다르고요.

이 자리에서는 “소수의 법칙”을 전작자가 든 예로 고정하고 의론을 펴겠습니다.
“대수의 법칙”과 “소수의 법칙”을 나란히 놓고 의론을 펴는 것은 좋으나,
아무런 해명없이 이리 병치해놓으면
자칫 둘 다 통계학적 법칙인 것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사전에 조금 명확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저의 의견을 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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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먼저 전작자 글의 결론 부분을 다시 발췌해봅니다.

“소수의 법칙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편향된 경험에서 온다는 거예요.
자기에겐 그것이 세상의 사실 그대로이고 진실이니까..
그점에 대해 반론을 펼치더라도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운게 사실이구요.
결국 이것 역시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래도 예외의 법칙인 소수의 법칙보다는..
세상사람들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래요.”

이 말씀들은 얼핏 아무런 하자없이 들립니다.
좋은 교훈의 말씀 같기도 하고, 그윽한 성찰의 시간도 갖게 해줍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

글 쓴 이야 좋은 의도로 이리 풀어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순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바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우선, 소수의 법칙을 “편향된 경험”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에서
제 발걸음이 주저없이 멈춤니다.
경험이란 단어에 “편향된”이란 한정자를 가하는 순간,
“소수의 법칙”은 법칙이 아니고, “편향된 경험” 그 자체가 되버리고 맙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사적 경험 일반이 법칙이란 말의 세례를 받고 갑자기 우아한
기하학의 공리 내지는 공준쯤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기하학의 공리조차 흔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여기선 알기 쉽게 이리 비유해봅니다.
또한, 앞 선 “대수의 법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대수의 법칙”이란
지위에서 오는 권위까지 획득하게 됩니다.

악마의 사전,
80/20 법칙,
피터의 법칙,
머피의 법칙....
따위들
이 끝없이 양산되는 조잡한 "법칙 아닌 법칙들"은 제대로 잘 새겨야지
자칫 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하기에 전작자의 이런 글 구조는 제법 위험합니다.
“소수의 법칙”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는 “편향된 경험”에 불과한 것.
그리고 그것을 들어 “대수의 법칙”과 대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용의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편향된 경험”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인데,
다른 것과 비교한들 무슨 대단한 가치가 도출되겠습니까 ?

더욱이 전작자가 말한 결론 부분
“이왕이면 그래도 예외의 법칙인 소수의 법칙보다는..
세상사람들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래요.”

이것도 잘 생각해보아야 할,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는 반대로 “대수의 법칙”을 마음 속에서 품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당장은 로토를 사는 사람은 “대수의 법칙”을 신뢰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대신 “희망의 법칙”을 따라, 기대하여야 합니다.
농담입니다. ㅎㅎ

“대수의 법칙”을 신성시 하는 순간
“대수의 법칙”은 바로 깨집니다.
어디에 안주하는 순간 바로 사망을 맞이 하게 됩니다.
고정관념에 갇혀야 평안을 얻는 우중(愚衆)은 그래서 슬픈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요 ?
생각해 봅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원경지(大圓鏡智), 무차별지(無差別智).
그 원래의 자리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그 자리에서 대평등, 대자유, 생명이 여여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성은 여성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여성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꽃피워내며, 삶을 펼쳐내고 죽음을 완수해냅니다.
남성 역시 남성으로서의 완전체로서 남성의 삶과 죽음을 완성합니다.
그렇듯이 개별 존재들 역시 홀로 완전체이며, 그들의 삶과 죽음을 완수합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개별체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개별체적 생명을 꽃피움으로서 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에 복무함으로서, 전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충실함으로서 곧 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 밑의 하부 구조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의식하지 않고 제 삶으로서 전체가 됩니다.
여기 비로서 전체와 부분이 和解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화해는 사람들의 無知의 질곡에 빠져있기에 필요한 것이지,
본래 화해할 그 무엇조차 없습니다.

“대수의 법칙”이란 게 진짜 유효한 법칙이라면,
개별 사건, 이것을 수학에서는 독립시행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건 하나하나가, 예컨대 주사위라면 어떤 것은 1, 2...6
이리 각자가 그 순간, 그 공간, 그 역학적 조건에서 알맞은 개별적 역할, 본분... 등을
시현해냄으로서 곧 전체 “대수의 법칙”을 완수하는 독단자, 自尊体, 自存体가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대수의 법칙”에서 말하는 지금 순간 주사위가 6이 나올 것이 기대된다면,
전작자는 개별 인격 주체 보고 주문하기를 6이 나올 것을 의욕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bongta는 6을 의욕해서는 아니 되고, 제 역할, 제 본디 품성대로 살아야 한다
이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전작자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이내 “대수의 법칙”은 깨지고 말 것입니다.
주사위 눈금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욕하지 않을 때라야 “대수의 법칙”은 법칙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누가 누구를 보고 “대수의 법칙”을 따르자 또는, 품고 살자는 말이야 말로
천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망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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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있는 사례라 전작물의 댓글을 전재합니다.

[1/2]  aaa      
 
촉촉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저를 뒤돌아보게 해주는 찻잔 하나.... 앞에 놓아둔 기분입니다.
 
 
[2/2]  bbb   
 
  많은걸 생각케 해주는 좋은글 입니다.

글주제와 직접상관은 없습니다만, 행여해서,
최근의 어떤사단들을 소수의 법칙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는 단정하지 마시길..
꽤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논의, 경험. 의견, 판단들이 농축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수의 법칙들이, 마치 이글이글 끓든 마그마가 화산 폭팔전에 오랫동안 힘과 압력을 비축하면서 끓었든, 오랫동안 끓고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양새는 별로 좋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2/2]를 택하겠습니다.
[1/1] 댓글주를 두고, ....
그 옆에 있다면 그가 들고 있는 찻잔을 당장 깨뜨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입니다.

[2/2]는 여기서 개별 주체들의 행위가 “대수의 법칙”의 하위로서 복무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 역시
“글주제와 직접상관은 없습니다만, 행여해서,” 이리 단서를 달면서
영 엉뚱한 길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빼고 취합니다.
bongta는 바른 자리라면 이처럼 너그럽게 천하인을 대합니다.

제 강의 출석부에 보면 이 자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언제 몰래 숨어 들어 도둑 청강을 하였는가 봅니다.
어이, 이보시게나 배움에 어이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
구멍으로 드나들지 말고 다음부터는 대문으로 나다시게나.

전작자는 또 이리 말하고 있더군요.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소수의 법칙을 말하는게 아니라..
모든게 일체라는 대수의 법칙을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나로 가득하구나 라는 의미라구요.”

이 부분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가 말하는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것이 모든 게 일체라는 그리 단순한 화법이 아닙니다.
개별 주체들의 주체적인 自覺이 곧 전체인 것입니다.
전작자는 이를 전체와 개체가 서로 포함관계로 성립되는 것으로 독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게으르고 나태한 이해지요.
이런 식의 인식 지평에 있는 한, 억 겁을 거푸 되태어나도 영원히 지옥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 되려 죽을때까지 노력하는 과정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그가 말하는 이런 노력들 역시 그저 수고만 크지 댓가가 난망할 뿐입니다.
언젠가 예를 든 남악회양의 벽돌 갈기 놀음과 매한가지일 따름입니다.

“대수의 법칙”에 속지 않을 때 대자유인이 됩니다.
로또 당첨자 역시 “대수의 법칙”을 믿지 않기에 그런 행운을 거머쥔 것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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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우가 나타나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제창합니다.
이 때 침 질질 흘리면서 좋아하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
보통 사람도 못되는 칠푼이거나,
품에 주판 넣고 눈알 굴리던 욕심쟁이들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되면 그 나라는 당장 망합니다.
모든 국민들은 하나 하나 모두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 보통의 나라가 될 뿐입니다.
굳이 특별한 나라를 원하지 않아도,
각자가 제 개성을 자유롭게 창달, 발휘할 때,
나라다운 나라,
저는 그것을 보통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 보통의 나라가 도래합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보통 사람이 된다면,
그 나라는 이내 특별한 나라가 되고 맙니다.
위선이 가득 차고,
졸장부들만 가득 찬 바보들의 특별한 나라.

제가 포앙카레와 함께 제일 좋아하는 위대한 수학자 칸토르가 생각납니다.

유클리드의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굳이 기하학을 끌여 들이지 않더라도 자명한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칸토르는 이 명제가 바르지 않다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부분이 전체와 같을 수도 있다.”

기존의 사고체계, 언어로는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칸토르는 이 자유를 획득한 순간 세상과 불화하고 종내 정신병에 걸립니다.
실인즉 정신병에 걸려야 할 것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만,
세상은 자유로부터 도피함으로서 영웅을 죽입니다.
새장에 갇힌 새는 최소한 안전은 확보되는 것일런가요 ?

부처가 말한 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칸토르가 외친 자유의 형식 속에서 체득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부처 조차도 죽여야 할 대상이고,
칸토르 역시 그 피의 제단에 올려 두어야 합니다.
“대수의 법칙”이라는 식의 법칙을 내세우는 한,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을 빌어 또 다시 그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지선사가 손가락 하나 들어 천하를 우롱했지만,
그 아래 풋중이 손가락 하나 들어 나서자 싹뚝 잘라 버립니다.

저는 오늘 “대수의 법칙”을 품자고 외치는 
그 자의 가슴을 헤치고 비수를 박아넣고자 합니다.
그리함으로서 그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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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묵은 인연이 걸치적 거려,
제 본연의 글 자리로 복귀하는데 시간이 걸리는군요.
다음부터는 그저 소소하니, 저만의 이야기를 써보게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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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댓글

bongta :

제가 농부 일을 금년에 배우고 있습니다.
이게 저는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죽더라도 다시는 태어나는 일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지만,
만약 피치 못해, 다시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농부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느끼는 것도 참 많고, 배움이 큽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듣는 음악은 거의 황홀지경입니다.
아마도, 땀 흘리며,
정신까지 소쇄해진 그 마당에 깔리는 음악이 그런 지경을 자아내는 것같습니다.
이 때, 知音之交도 떠올린다는 것을 jjj님은 아실런지요.

농사 일을 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소소하니 느끼는 바가 제법 됩니다.
하지만, 감히 제 주제에 말을 꺼낸다는 것이 참람스럽기에
홀로 익히고만 있습니다.

다만, jjj님의 “생태”와 관련되어
아직은 설익은 것 하나만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봅니다.

저희 밭을 제외하고는 양 옆의 밭은 모두 지금 누렇습니다.
가을도 아닌데, 肅殺之氣 기운이 온 주변에 가득합니다.
제초제를 틈만 나면 쳐대는 것같더니만,
쉬고 있던 제 눈에 좌우 밭의 누렇게 뜬 모습이 황량하게 좌르륵
스크린 영사처럼 망막에 들어옵니다.

순간, 농사가 이리 품위 없어서야 !
정말 품위가 없습니다.
거기 생명이 없습니다.
동원과 착취만이 있습니다.
성찰과 관조가 사라진 자리.

지난 주말에 둘이서 9시간 이상 일했지만,
옆 밭 주인은 단 30여분 제초제 뿌리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농업은 농업이 아니고, 그저 공장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생산 요소 투입에, 더 이상의 고민과 성찰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프로그램 따라, 농약, 비료를 농토에 밀어넣으면
완성품이 가을에 밀려나오는 정밀한 테일러식 공장 구조.

그들의 조건, 둘러 싼 농산업적 환경을 모르는 바 아니나,
분명 거기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풀이건, 벌레건 모두 죽여버리고 마는 현대의 관행농법.
이렇게 하지 않으면 농부로 살아남을 수 없는 농환경.

그렇기 때문에, 이 농업현장에서도 여느 산업 현장과 다름없이
큰 놈이 다 먹어 치우는 치열한 착취의 구조가 정착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모든 농민이 합심하여 관행농법을 버린다면,
농산물 가격은 등귀하고, 그에 따라 농업의 자존이 건져지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의 틈을 파들어가면, 어떤 전망을 얻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농업에서만큼은 그 품위가 지켜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면,
실정도 모르는 놈이 철없는 소리한다고 욕을 한참 들을 것입니다.
저의 숙제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래서, jjj님의 생태와 관련된 다음 주제 이야기들이 아주 기대가 큽니다.

“부분과 전체”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생리학자들과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 경귀들이 이들 얘기들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겨자씨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따위가 그것입니다만,
또한 불교측에서도 일부는 애써 이들과 짝을 맞추는 것을 즐겨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교의 근본 사상은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불교의 우주관을 논하면서 함께 다루고 싶습니다.
다만, 전문적인 종교 얘기는 제가 자제를 하는 편이라
예정을 할 수는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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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도사 2009.07.15 20:14 신고 PERM. MOD/DEL REPLY

    bongta님 안녕하세요.

    "대수의법칙과 물태우의법칙"이 bongta 님의 다른 글에도 몇번 언급된 것을 보았습니다.
    며칠전 이 글을 처음 읽고 bongta님의 논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 거듭해서 봤습니다만, 아직도 머리속이 혼란스럽습니다.

    우선, 말씀대로 소수의 법칙은 통계학의 법칙이 아니며,
    원작자가 대수의 법칙과 나란이 비교한 것은 논리적인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자,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품고 살아갔으면 해요" 라는 말에 대해
    bongta님께서는 글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수의 법칙"을 마음 속에서 품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로토를 사는 사람은 "대수의 법칙"을 신뢰해서는 아니 됩니다.
    "대수의 법칙"을 신성시 하는 순간, “대수의 법칙”은 바로 깨집니다.
    "대수의 법칙"에 속지 않을 때 대자유인이 됩니다.
    "대수의 법칙"을 품자고 외치는 그 자의 가슴을 헤치고 비수를 박아넣고자 합니다.

    짧은 제 소견으로는, 대수의 법칙은 "품고", "버리고"할 차원의 것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대수의 법칙은 과거의 경험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발생할 사건을 추정하는 확률(단지 숫자일 뿐)이 아니던지요?
    과거의 확률로 미래를 예측한다는데에야 분명 정확성에 오차가 있을수는 있겠지만
    숫자에 불과한 이것을 인간이 "품고", "버리고"할 대상인지는 무척 의아스럽습니다.

    재미있는 댓글이라 언급하신, bbb의 글을 보면
    "대수의 법칙들이, 마치 이글이글 끓든 마그마가 화산 폭팔전에 오랫동안 힘과 압력을 비축하면서 끓었든, 오랫동안 끓고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bbb의 글을 볼때는 애초부터 대수의 법칙을 잘 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bbb는 대수의 법칙을 통계학의 확률, 숫자의 개념으로 접근 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법칙(사회적 증거의 법칙)과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대수의 법칙(law of great numbers)에서 great numbers 란
    분모인 시행횟수를 나타내는 것이지 분자인 시행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에 다수와는 다른 개념이 아닌지요.

    그래서, bongta님께서 마지막에 언급하신 물태우의 법칙은
    대수의 법칙과 나란히 빗대어서 설명하기에는 기준이 서로 다르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여쭤봅니다.
    앞서 정의에서 '평균'이라는 용어에서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대수의 법칙을 적용할 대상이 아닌 듯 합니다.

    요컨데, 전작자, bbb, bongta님이 서로
    대수의 법칙에 대한 정의가 일치하지 않은채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런지요.
    추정컨데, 대수의 법칙과 다수의 법칙이 혼동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봅니다.

    이 글을 읽고 일어난 저의 이 혼란스러움을
    bongta님께서 깔끔하게 정리해주심이 어떨런지 감히 부탁드립니다.

  2. 만도사 2009.07.15 20:14 신고 PERM. MOD/DEL REPLY

    원작자의 글을 찾아보니, 이미 삭제되고 없네요.
    이리저리 검색하다 디시 철학갤러리에서 하나 찾았습니다.
    이게 원작자의 글인지, 다른 누군가가 배낀 글인지 잘 모르겠군요.
    인용하신 글과 문체는 다른데 내용은 유사한 듯 합니다.
    참고로 , 2008년 11월 25일 업로드 된 글입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philosophy&no=36942

    사용자 bongta 2009.07.15 23:16 신고 PERM MOD/DEL

    커뮤니티 상에서 벌어진 소론을,
    일개 개인 블로그에 끌어들여 거두절미하고 써놓다보니,
    만도사님처럼 통계학적, 또는 이성적 접근을 하시는 분에겐,
    납득 못하실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소명하지 못하고,
    그저 저의 묵은 글을 블로그에 단순히 옮겨 싣다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덕분에 의문을 제기하신 부분을 중심으로 소명합니다.
    다만 원작자가 이 자리에 임하지 못한 고로,
    그 분의 소론을 이 자리에 함께 모시지 못하게 되어,
    저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칠까 염려됩니다.
    도리 없이 저 혼자만의 이야기에 그치고 말 형편이지만,
    최대한 성실하게, 객관적으로 임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원작자의 글이 지금 지워지고 없습니다만,
    제가 다행히 그 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이 지워버린 글인즉, 이 자리에 공개리에 올릴 수는 없고,
    필요하시다면 여기 이메일을 남겨주시면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단, 앞으로 그 글에서 인용할 부분만으로도 대충은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링크를 걸어주신 글과 상당히 유사하군요.
    일본인 운운 하는 부분이라든가,
    “이왕이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라며 이글을 적는다..”
    이 부분도 거의 유사합니다.
    묘한 노릇이군요.
    동일인일 수도 있겠고,
    둘 중에 하나가 글의 토대를 거의 모두 인용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원작물은 2007-6-23 16:54에 생성되었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배경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모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 분란이 나고 패가 갈리고 난리를 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 그 사건 현장의 당사자도 아니고,
    그저 지극히 적은 댓글 몇 마디로 만으로 소일하던 형편이며,
    애시당초 그 따위 일 자체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지요.
    한 편에서 저를 견인하기도 하였지만,
    저는 이를 거절하고, 그저 관망만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저들 분란이 일파만파 퍼지더니만,
    객에 불과한 제게도 불똥이 번져왔지요.
    원작자는 저를 견인하다 실패한 패에 속한 분인데,
    마침 그 당시 아기돼지를 찢는 사건이 생깁니다.
    ( ※ 참고 글 : 걸견폐요(桀犬吠堯) - http://bongta.com/390 )

    원작자는 이 아기돼지 사건에 대하여,
    天地不仁 운운하며 상당히 냉혹한 시선을 편 글을 올립니다.
    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이라 저는 걸견폐요라는 글을 지어 올렸지요.
    (지금 그 사이트에 가서 찾아보니 그 글 역시 지워져 찾지 못하겠군요.)
    이 때 비로소 이 분을 저는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 문제의 “대수의법칙과 소수의법칙 - 선입관 2”
    이 글을 원작자가 올립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지적하였고, 만도사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글의 구성 자료로 이끌어온 두 성분이,
    동차원에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닐 뿐더러,
    설혹 그가 주장하는 글의 뜻을 넓혀주고 좇아,
    일응 너그럽게 그 취지를 살펴 양해하더라도,
    그 주장 내용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만도사님께서
    “짧은 제 소견으로는, 대수의 법칙은 "품고", "버리고"할 차원의 것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리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이는 당연 옳으신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가 소수의 법칙을 들며 그 대척점에 선 개념으로서 대수의 법칙을
    꺼내든 것은 통계학적 의미의 엄격한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편견’, ‘개인적 경험’이 아닌 ‘보편적 사실’, ‘절대적 진리’ 또는 ‘도덕적 당위’ 정도로
    새겨서 이해해 줄 수는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의 글을 더 대하면 애매해지기 시작하여 이것조차도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그가 말하고 있는 대수의 법칙은,
    글 전체에 일관되게 통계학적 대수의 법칙만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대수의 법칙’은 말을 빌렸을 뿐,
    실상은 그가 상정하는 ‘도덕적 희망’ 또는
    차라리 ‘편견’, ‘착각’, ‘오해’이기도 한 것이지요.
    예컨대, 그는 원작물에서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대수의 법칙은 대개 이런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일수록 평균적으로 점수가 높다던지..
    여러명의 한국인이 모인장소일수록 그들의 평균이 한국인이 가지는 표준신장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든지..
    범죄자가 한두번은 법의 망을 피해가더라도 횟수가 반복되면 꼬리가 잡힌다던지..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도중에 포기하지말구 꾸준히 새로워지기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평균적으로 점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학부형들이 학생들의 이끄는 경책의 말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을 통계학적 의미의 대수의 법칙이라 할 수는 없지요.

    범죄자 얘기도,
    그의 가정에 불과하지요.
    엄격히 따지자면, 무릇 범죄자가 주사위가 아닌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의 행동까지 대수의 법칙을 빌려,
    그 행위의 결과를 구속시킬 수는 없지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 정도로 보아줄 수 있지요.
    하지만 현실에선 그릇 된 짓을 하는 자가 더 오래 살고 돈을 많이 긁어모으곤 합니다.

    우리가 대수의 법칙이라고 할 때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또한 착한 사람이 던지든, 악한 사람이 던지든,
    공히 주사위 각 눈이 나올 사상(事象)의 확률은 1/6이 아닙니까?
    이런 기대야말로 만도사님이 글에서 짚고 계신 통계학적인 ‘대수의 법칙’이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훈련이 된 사람이라면,
    차마 사필규정을 그 누군들 대수의 법칙이라고 강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제대로 논의를 펴려면,
    왜 ‘대수의 법칙’만이랍니까?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
    불연속성의 원리(discontinuity principle) 정도는 함께 챙겨야 하지요.
    그러한 것을 개념 규정도 선툰 가운데,
    덧붙여 엉뚱한 소수의 법칙이 등장하니 글이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그러하니,
    원작자가 들고 있는 대수의 법칙은 그만의 명명법으로 보아주면 탈이 없습니다.
    저 역시 편의에 따라,
    원작자가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대수의 법칙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추정, 상정하여 글을 풀어내놓고 있는 것이지요.

    만도사님께서는,
    이 글에 등장하고 있는 용어들을 엄격하게 고정하여 해석하시지 마시고,
    글 가운데 그가 펴고자 하는 뜻을 얼추 추려서 헤아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글 가운데 대수의 법칙을 물태우의 보통사람론과 대비하였을 때,
    그 칭하는 ‘대수의 법칙’이 함의하는 바는,
    본래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원작자가 의미하는 것도,
    이미 약간이나마 지나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대수의 법칙’을 기초로 나름대로 구성한 것입니다.

    즉, 이러한 것입니다.
    그가 ‘범죄자가 횟수가 반복되면 꼬리가 잡힌다던지...’라는 예를 들어 가면서,
    이를 대수의 법칙이라고 칭하고,
    ‘친절한 일본인 ... ’ 운운하며 소수의 법칙이라고 할 때,
    그는 개인적인 판단에 신중하라는 주문을 넘어,
    은연 중 모든 사람이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을 따라야 할 것임을,
    deduction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한들 그게 타당하지도 않은 것들을
    그가 들고 서 있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순간 저는 물태우의 보통사람론을 떠올렸지요.
    자신인 대통령도 보통사람,
    나도 너도 보통사람으로 살자,
    특별한 사람이 없는 이게 아름다운 세상이다. ....
    이런 주장은 마치 원작자의 어줍지 않은 윤리처럼,
    저에게는 적지 아니 실소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못난 사람도 특별한 것이요, 잘 난 사람도 특별한 것이지,
    어찌 모든 사람을 한데 묶어 보통사람으로 평준화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게 위험한 것이 개인의 창조성이 대수라는 이름하에 제각될 가능성이 있지요.
    자세한 것은 제 글에 이미 다 밝혔기에 생략하지요.

    얼핏 거죽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이는 사이비지요.
    물태우 뿐이 아닙니다.
    원작자 역시 마찬가지로 저는 판단했습니다.

    물론 편견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글,
    예측술(豫測術) - ②/② - http://bongta.com/157
    에서도 잠깐 언급이 됩니다만,
    judgmental forecasts,
    예컨대 고 정주영 현대회장 같은 분의 ‘판단적 예측’은
    그의 사업적 성공의 토대가 되었지요.
    원작자라한들 이를 편견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인적 경험, 경륜이라는 것을
    혹자가 편견이라고 부른들 도리 없지만,
    이를 중요한 개인적 자산으로 귀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저는 그 원작물에선 이들을 분별할 아무런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편견이란 카테고리에 모두 매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지요.

    원작자가 예로 든 ‘일본인의 친절성’이라는 것도
    그는 편견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만약 제가 일본인, 중국인을 상대로 다년간 사업을 하고 있는 마당이라면,
    ‘일본인을 대할 때 그들은 친절한 사람들이야,
    중국인을 대할 때 그들은 지저분한 사람들이야’
    이리 정리하며 임하게 되었다면,
    이는 저의 개인적 경험일지언정,
    나름대로 훌륭한 사업적 자산이 될 수도 있지요.

    이것을 편견이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원작물에서처럼,

    ‘이왕이면 그래도 예외의 법칙인 소수의 법칙보다는..
    세상사람들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래요.’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 저는 적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무슨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왜 모든 사람이 예외를 두려운 듯 피해가며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이를 예외라고, 그리고 소수라고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예외가 아닌 창조적 자기표현 또는 삶의 구현일 수도 있지요.

    저는 각자의 고유한 개성, identity를 존중하는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자의 견해는 너무 고루하고, 소극적이며, 몰개성적이고, ...
    한 마디로 선견(善見)이 결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견 즉 지혜가 아니지요.
    그저 편견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저 물태우처럼 특별한 사람을 보통사람으로 만들고,
    훌륭한 judgmental forecasts를 편견으로 격하시키는,
    ‘편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 개념, 용어의 고정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원작물 정도의 글 수준이라면,
    이미 흩뜨러진 형편이지요.
    저는 그 중심어의를 줏어,
    그저 매임없이 이리저리 소요유(逍遙遊)하였을 뿐이지요.
    ( ※ 제가 의미하는 '소요유' 참고 글 : feedback(피드백) - http://bongta.com/52 댓글 발췌 부분 )

    혹 미진한 것이 계시면,
    다시 글 주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종일토록 넷에 들 시간이 없어,
    모레나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3. gmcci 2018.09.05 05:09 PERM. MOD/DEL REPLY

    <strong>구체적으로 인공 지능을 정의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AI는 터미네이터, 월-E와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을 가리키는 그럴듯한 이름일 뿐인가? 기계가 단순히 유용함을 넘어 인공 지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가?</strong><br><br>일각에서는 AI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학습하거나 자율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유명 저자이자 게임 기획자 겸 교수인 이안 보고스트는 최근 디 애틀란틱(The Atlantic)에 "인공 지능이 무의미해졌다"란 기사를 실으며 이 논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br><br><div class="image_with_source_d" style="overflow: hidden; float: none; display: inline-block; position: relative;"><img style="margin: 9px; width: 100%; height: auto; display: inline;" alt="Image Credit : GettyImagesBank" src="http://files.idg.co.kr/itworld/image/2016/10/0_GettyImages-648449908.jpg"><div style="color: rgb(102, 102, 102); font-size: 11px; margin-left: 9px;">Image Credit : GettyImagesBank</div></div><br><br> AI를 구성하는 요건에 대해 보고스트는 "기계는 자율 의지 및 의외성은 물론이고 지각이 가능할 때, 또는 최소한 전문성을 갖고 작동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자기 인식이 있을 때 AI라고 할 수 있다. 인공 지능이라고 주장하는 시스템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지각, 자기 인식, 자율 의지가 없고 심지어 의외성도 없다. 단순한 소프트웨어일 뿐"이라고 말했다.<br><br>패턴 인식은 지각이 아니며,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손쉽게 속임수에 넘어간다.<br><br><strong>첨단 로봇 기술은 아직은 AI가 아니다</strong><br> 가장 진보된 로봇 소프트웨어도 기술적으로 AI라고 간주할 수는 없지만 미래 AI의 청사진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 빈치 시(da Vinci Si) 로봇 시스템은 폐 수술을 보조하는 데 사용되지만, AI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술의 정확성을 높이고 환자의 회복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br><br>이 시스템을 자주 사용하는 러시 대학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 몸 안의 고화질 3D 이미지를 보면서" 수술을 집도한다. 의사가 손을 움직이면 플랫폼의 로봇 팔에 장착된 비디오 카메라와 수술 기구도 그에 따라 실시간으로 정밀하게 움직인다.<br><br>비약적인 AI 발전은 항상 현재 기술이 개조를 거쳐 자율성을 갖추는 것부터 시작된다. 지금의 다 빈치 시 로봇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기술은 수술 분야의 미래 AI 발전을 위한 프로토타입이 될 가능성이 있다.<br><br><strong>단순하게 생각하기 : AI는 실용적이다</strong><br> 인공 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는 자율 로봇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기술이다. 자율 로봇은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보편적인 사람 관점에서 (아직) 실용성은 없다.<br><br>훨씬 더 실용적인 AI는 다른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글은 2009년부터 자율 운전 자동차를 개발 중이며, 2020년 정식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현재 웨이모(Waymo ? a new way forward in mobility의 줄임말)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사람과 사물이 안전하고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br><br>구글의 무인 자동차 프로젝트는 22대의 개조된 렉서스 RX450h SUV로 시작됐고, 이후 확장을 거쳐 지금은 자체 설계한 33대의 프로토타입도 가동하고 있다. 자동차는 공공 도로에서 시험 운용 중이며 만일의 경우를 위해 스티어링 휠과 브레이크를 조작할 수 있도록 사람이 탑승한다. 그러나 향후 공식 출시될 차량에는 수동 조작 기능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br><br>Fortune.com의 커스틴 코로섹은 "구글은 AI 자율 운전 시스템이 차량 탑승자와 보행자 또는 길을 함께 이용하는 다른 사용자를 위한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의사 결정을 일관적으로 내리고 이것이 사람 운전자보다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따라서 구글은 인간 탑승자에게 조향, 가속, 제동, 방향 지시등과 같은 차량 조작 기능을 제공할 경우 AI가 내리는 더 안전한 의사 결정을 무시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안전을 저해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말했다.<br><br>현재 자율 자동차가 스티어링 휠 및 브레이크 없이 공용 도로를 운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역설적인 점은 미국 고속도로 안전국은 연방법에 의거해 자동차를 조작하는 AI를 합법적인 운전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br><br>자동차를 운행할 수는 있지만 아직은 수동 조작계가 필수 전제 조건이다.<br><br>보고스트의 기사로 돌아가 보면, 보고스트는 AI가 기업의 마케팅 도구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첨단 기업인 것처럼 포장해주는 유행어라는 것이다.<br><br>안타깝지만 AI에 대한 오해는 유명 기업들의 발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트위터는 악성 댓글 확산에 대처하기 위해 "AI를 더 지능적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보고스트는 데이터베이스 쿼리 변경을 AI라고 할 수는 없다며, 아마도 트위터는 AI의 제대로 된 의미도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br><br>자동화, 소프트웨어, 간단한 머신러닝, 콘텐츠 필터링 또는 데이터베이스 조정이 AI가 아니라면 AI는 대체 무엇인가?<br><br><strong>자율 관리와 자율 학습이 AI의 구성 요건</strong><br>AI의 요건에 부합하려면 환경에 반응해서 학습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학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자율 관리 능력을 보유해야 하며 의외성 요소도 필요하다.<br><br>즉, AI는 인간 작업자를 대체하는, 사전에 프로그램된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이 아니다. AI는 프로그램을 범위를 벗어나 "생각"을 하고 인간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본 AI를 생각하면 된다.&nbsp;<br><br><br>metal powder - http://www.hanaam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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