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대수의 법칙과 물태우의 법칙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3. 18:32


본 글은 sss의 “대수의법칙과 소수의법칙 - 선입관 2” 글을 읽고 쓴 글입니다.
제 앞 선 글에서 간단히 메모 형식으로 언급하였습니다만 오늘 정식으로 글을 써봅니다.

ref)
Link : 원문 글이 지워졌으므로 참조처의 링크 삭제함.

전작자가 “찢어진 아기 돼지”에서 보여준 냉혹한 태도를 대하고는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대로 하고 있는 이런 따위의 글들은 세상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들 글들은 얼핏 가치를 선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엉터리라는 것이 바로 밝혀집니다.
저는 이런 구조를 가진 글들의 해독(害毒)을 누구나 바로 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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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ss에서 “대수의법칙과 소수의법칙”란 제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 눈에 심히 거슬립니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이지만 이에 對向하여, 제 의견을 펴보고자 합니다.

그 글에서 이르길,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통계에서 흔히 <대수의 법칙>이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특정사건의 기대값은 실험의 횟수가 반복될수록 평균에 이르게된다는 것입니다.”

뭐 대충 이리 말해도 괜찮습니다만, 불명확하여 조금 미흡하군요.
평균이란 말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대수의 법칙을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만,
평균이란 말을 굳이 쓰겠다면, 다음과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크기가 큰 모집단에서 무작위로 뽑은 표본의 평균이 전체 모집단의 평균과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현실 세계에서 이에 해당하는 예를 들자면 여럿이 될 터이지만,
한 가지만 들면 이렇습니다.
예컨대 주사위를 던져 특정 숫자가 나올 수학적 확률은 1/6이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던지는 횟수가 증가하면 점점 수학적 확률인 1/6에 가까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전작자는 “대수의 법칙=중심 국한 정리(central limit theorem)”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소론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오류를 차제에 바로잡습니다.

그 글에서 언급한 기본 개념들을 본론에 들기 전에 하나 더 점검해보지요.

“그럼 대수의 법칙에 상반되는 <소수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해 볼께요.
소수의 법칙은 한마디로 말해 아주 적은 예로 전체를 추정하려는
우리들의 심리적인 경향을 말한다고 해요.“

그 글에서 소수의 법칙을 이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통계학, 통계역학을 배운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소수의 법칙”은 통계학(statistics) 용어가 아닌 듯 싶습니다.
소표본 이론(small sampling theory)은 있지만,
“소수의 법칙”은 제겐 좀 생소하군요.

하지만, 사회과학쪽에서 “소수의 법칙”이란 제하에 실험결과를 언급한 것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간 내용도 가지가지 다르고요.

이 자리에서는 “소수의 법칙”을 전작자가 든 예로 고정하고 의론을 펴겠습니다.
“대수의 법칙”과 “소수의 법칙”을 나란히 놓고 의론을 펴는 것은 좋으나,
아무런 해명없이 이리 병치해놓으면
자칫 둘 다 통계학적 법칙인 것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사전에 조금 명확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저의 의견을 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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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먼저 전작자 글의 결론 부분을 다시 발췌해봅니다.

“소수의 법칙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편향된 경험에서 온다는 거예요.
자기에겐 그것이 세상의 사실 그대로이고 진실이니까..
그점에 대해 반론을 펼치더라도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운게 사실이구요.
결국 이것 역시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래도 예외의 법칙인 소수의 법칙보다는..
세상사람들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래요.”

이 말씀들은 얼핏 아무런 하자없이 들립니다.
좋은 교훈의 말씀 같기도 하고, 그윽한 성찰의 시간도 갖게 해줍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

글 쓴 이야 좋은 의도로 이리 풀어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순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바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우선, 소수의 법칙을 “편향된 경험”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에서
제 발걸음이 주저없이 멈춤니다.
경험이란 단어에 “편향된”이란 한정자를 가하는 순간,
“소수의 법칙”은 법칙이 아니고, “편향된 경험” 그 자체가 되버리고 맙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사적 경험 일반이 법칙이란 말의 세례를 받고 갑자기 우아한
기하학의 공리 내지는 공준쯤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기하학의 공리조차 흔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여기선 알기 쉽게 이리 비유해봅니다.
또한, 앞 선 “대수의 법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대수의 법칙”이란
지위에서 오는 권위까지 획득하게 됩니다.

악마의 사전,
80/20 법칙,
피터의 법칙,
머피의 법칙....
따위들
이 끝없이 양산되는 조잡한 "법칙 아닌 법칙들"은 제대로 잘 새겨야지
자칫 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하기에 전작자의 이런 글 구조는 제법 위험합니다.
“소수의 법칙”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는 “편향된 경험”에 불과한 것.
그리고 그것을 들어 “대수의 법칙”과 대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용의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편향된 경험”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인데,
다른 것과 비교한들 무슨 대단한 가치가 도출되겠습니까 ?

더욱이 전작자가 말한 결론 부분
“이왕이면 그래도 예외의 법칙인 소수의 법칙보다는..
세상사람들이 대수의 법칙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갔음 하고 바래요.”

이것도 잘 생각해보아야 할,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는 반대로 “대수의 법칙”을 마음 속에서 품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당장은 로토를 사는 사람은 “대수의 법칙”을 신뢰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대신 “희망의 법칙”을 따라, 기대하여야 합니다.
농담입니다. ㅎㅎ

“대수의 법칙”을 신성시 하는 순간
“대수의 법칙”은 바로 깨집니다.
어디에 안주하는 순간 바로 사망을 맞이 하게 됩니다.
고정관념에 갇혀야 평안을 얻는 우중(愚衆)은 그래서 슬픈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요 ?
생각해 봅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원경지(大圓鏡智), 무차별지(無差別智).
그 원래의 자리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그 자리에서 대평등, 대자유, 생명이 여여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성은 여성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여성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꽃피워내며, 삶을 펼쳐내고 죽음을 완수해냅니다.
남성 역시 남성으로서의 완전체로서 남성의 삶과 죽음을 완성합니다.
그렇듯이 개별 존재들 역시 홀로 완전체이며, 그들의 삶과 죽음을 완수합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개별체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개별체적 생명을 꽃피움으로서 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에 복무함으로서, 전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충실함으로서 곧 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 밑의 하부 구조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의식하지 않고 제 삶으로서 전체가 됩니다.
여기 비로서 전체와 부분이 和解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화해는 사람들의 無知의 질곡에 빠져있기에 필요한 것이지,
본래 화해할 그 무엇조차 없습니다.

“대수의 법칙”이란 게 진짜 유효한 법칙이라면,
개별 사건, 이것을 수학에서는 독립시행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건 하나하나가, 예컨대 주사위라면 어떤 것은 1, 2...6
이리 각자가 그 순간, 그 공간, 그 역학적 조건에서 알맞은 개별적 역할, 본분... 등을
시현해냄으로서 곧 전체 “대수의 법칙”을 완수하는 독단자, 自尊体, 自存体가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대수의 법칙”에서 말하는 지금 순간 주사위가 6이 나올 것이 기대된다면,
전작자는 개별 인격 주체 보고 주문하기를 6이 나올 것을 의욕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bongta는 6을 의욕해서는 아니 되고, 제 역할, 제 본디 품성대로 살아야 한다
이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전작자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이내 “대수의 법칙”은 깨지고 말 것입니다.
주사위 눈금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욕하지 않을 때라야 “대수의 법칙”은 법칙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누가 누구를 보고 “대수의 법칙”을 따르자 또는, 품고 살자는 말이야 말로
천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망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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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있는 사례라 전작물의 댓글을 전재합니다.

[1/2]  aaa      
 
촉촉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저를 뒤돌아보게 해주는 찻잔 하나.... 앞에 놓아둔 기분입니다.
 
 
[2/2]  bbb   
 
  많은걸 생각케 해주는 좋은글 입니다.

글주제와 직접상관은 없습니다만, 행여해서,
최근의 어떤사단들을 소수의 법칙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는 단정하지 마시길..
꽤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논의, 경험. 의견, 판단들이 농축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수의 법칙들이, 마치 이글이글 끓든 마그마가 화산 폭팔전에 오랫동안 힘과 압력을 비축하면서 끓었든, 오랫동안 끓고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양새는 별로 좋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2/2]를 택하겠습니다.
[1/1] 댓글주를 두고, ....
그 옆에 있다면 그가 들고 있는 찻잔을 당장 깨뜨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입니다.

[2/2]는 여기서 개별 주체들의 행위가 “대수의 법칙”의 하위로서 복무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 역시
“글주제와 직접상관은 없습니다만, 행여해서,” 이리 단서를 달면서
영 엉뚱한 길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빼고 취합니다.
bongta는 바른 자리라면 이처럼 너그럽게 천하인을 대합니다.

제 강의 출석부에 보면 이 자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언제 몰래 숨어 들어 도둑 청강을 하였는가 봅니다.
어이, 이보시게나 배움에 어이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
구멍으로 드나들지 말고 다음부터는 대문으로 나다시게나.

전작자는 또 이리 말하고 있더군요.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소수의 법칙을 말하는게 아니라..
모든게 일체라는 대수의 법칙을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나로 가득하구나 라는 의미라구요.”

이 부분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가 말하는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것이 모든 게 일체라는 그리 단순한 화법이 아닙니다.
개별 주체들의 주체적인 自覺이 곧 전체인 것입니다.
전작자는 이를 전체와 개체가 서로 포함관계로 성립되는 것으로 독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게으르고 나태한 이해지요.
이런 식의 인식 지평에 있는 한, 억 겁을 거푸 되태어나도 영원히 지옥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 되려 죽을때까지 노력하는 과정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그가 말하는 이런 노력들 역시 그저 수고만 크지 댓가가 난망할 뿐입니다.
언젠가 예를 든 남악회양의 벽돌 갈기 놀음과 매한가지일 따름입니다.

“대수의 법칙”에 속지 않을 때 대자유인이 됩니다.
로또 당첨자 역시 “대수의 법칙”을 믿지 않기에 그런 행운을 거머쥔 것입니다. ㅎㅎ

###

물태우가 나타나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제창합니다.
이 때 침 질질 흘리면서 좋아하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
보통 사람도 못되는 칠푼이거나,
품에 주판 넣고 눈알 굴리던 욕심쟁이들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되면 그 나라는 당장 망합니다.
모든 국민들은 하나 하나 모두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 보통의 나라가 될 뿐입니다.
굳이 특별한 나라를 원하지 않아도,
각자가 제 개성을 자유롭게 창달, 발휘할 때,
나라다운 나라,
저는 그것을 보통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 보통의 나라가 도래합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보통 사람이 된다면,
그 나라는 이내 특별한 나라가 되고 맙니다.
위선이 가득 차고,
졸장부들만 가득 찬 바보들의 특별한 나라.

제가 포앙카레와 함께 제일 좋아하는 위대한 수학자 칸토르가 생각납니다.

유클리드의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굳이 기하학을 끌여 들이지 않더라도 자명한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칸토르는 이 명제가 바르지 않다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부분이 전체와 같을 수도 있다.”

기존의 사고체계, 언어로는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칸토르는 이 자유를 획득한 순간 세상과 불화하고 종내 정신병에 걸립니다.
실인즉 정신병에 걸려야 할 것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만,
세상은 자유로부터 도피함으로서 영웅을 죽입니다.
새장에 갇힌 새는 최소한 안전은 확보되는 것일런가요 ?

부처가 말한 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칸토르가 외친 자유의 형식 속에서 체득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부처 조차도 죽여야 할 대상이고,
칸토르 역시 그 피의 제단에 올려 두어야 합니다.
“대수의 법칙”이라는 식의 법칙을 내세우는 한,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을 빌어 또 다시 그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지선사가 손가락 하나 들어 천하를 우롱했지만,
그 아래 풋중이 손가락 하나 들어 나서자 싹뚝 잘라 버립니다.

저는 오늘 “대수의 법칙”을 품자고 외치는 
그 자의 가슴을 헤치고 비수를 박아넣고자 합니다.
그리함으로서 그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제가 묵은 인연이 걸치적 거려,
제 본연의 글 자리로 복귀하는데 시간이 걸리는군요.
다음부터는 그저 소소하니, 저만의 이야기를 써보게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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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댓글

bongta :

제가 농부 일을 금년에 배우고 있습니다.
이게 저는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죽더라도 다시는 태어나는 일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지만,
만약 피치 못해, 다시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농부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느끼는 것도 참 많고, 배움이 큽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듣는 음악은 거의 황홀지경입니다.
아마도, 땀 흘리며,
정신까지 소쇄해진 그 마당에 깔리는 음악이 그런 지경을 자아내는 것같습니다.
이 때, 知音之交도 떠올린다는 것을 jjj님은 아실런지요.

농사 일을 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소소하니 느끼는 바가 제법 됩니다.
하지만, 감히 제 주제에 말을 꺼낸다는 것이 참람스럽기에
홀로 익히고만 있습니다.

다만, jjj님의 “생태”와 관련되어
아직은 설익은 것 하나만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봅니다.

저희 밭을 제외하고는 양 옆의 밭은 모두 지금 누렇습니다.
가을도 아닌데, 肅殺之氣 기운이 온 주변에 가득합니다.
제초제를 틈만 나면 쳐대는 것같더니만,
쉬고 있던 제 눈에 좌우 밭의 누렇게 뜬 모습이 황량하게 좌르륵
스크린 영사처럼 망막에 들어옵니다.

순간, 농사가 이리 품위 없어서야 !
정말 품위가 없습니다.
거기 생명이 없습니다.
동원과 착취만이 있습니다.
성찰과 관조가 사라진 자리.

지난 주말에 둘이서 9시간 이상 일했지만,
옆 밭 주인은 단 30여분 제초제 뿌리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농업은 농업이 아니고, 그저 공장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생산 요소 투입에, 더 이상의 고민과 성찰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프로그램 따라, 농약, 비료를 농토에 밀어넣으면
완성품이 가을에 밀려나오는 정밀한 테일러식 공장 구조.

그들의 조건, 둘러 싼 농산업적 환경을 모르는 바 아니나,
분명 거기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풀이건, 벌레건 모두 죽여버리고 마는 현대의 관행농법.
이렇게 하지 않으면 농부로 살아남을 수 없는 농환경.

그렇기 때문에, 이 농업현장에서도 여느 산업 현장과 다름없이
큰 놈이 다 먹어 치우는 치열한 착취의 구조가 정착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모든 농민이 합심하여 관행농법을 버린다면,
농산물 가격은 등귀하고, 그에 따라 농업의 자존이 건져지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의 틈을 파들어가면, 어떤 전망을 얻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농업에서만큼은 그 품위가 지켜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면,
실정도 모르는 놈이 철없는 소리한다고 욕을 한참 들을 것입니다.
저의 숙제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래서, jjj님의 생태와 관련된 다음 주제 이야기들이 아주 기대가 큽니다.

“부분과 전체”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생리학자들과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 경귀들이 이들 얘기들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겨자씨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따위가 그것입니다만,
또한 불교측에서도 일부는 애써 이들과 짝을 맞추는 것을 즐겨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교의 근본 사상은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불교의 우주관을 논하면서 함께 다루고 싶습니다.
다만, 전문적인 종교 얘기는 제가 자제를 하는 편이라
예정을 할 수는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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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13. 18: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