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원로(元老)

소요유 : 2009. 7. 18. 12:07


증자(曾子)의 말 한 자락.
“새는 죽을 때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선하다.”
鳥之將死,其鳴也哀;人之將死,其言也善。

나는 이 말이 흔히 거죽으로 드러내는 통속적인 의미의 뜻으로,
읽히우는 것을 경계한다.
(※ 참고 글 : ☞ 2008/03/12 - [소요유] - 격언의 배리(背理))

즉, 사람이 죽을 때 하는 말은 진실되니, 믿을 만 하다고 인정해준단든가,
나아가 신성시(神聖視)하며, 감히 훼(毁)할 수 없는 경지로까지,
추켜올려 사자(死者)의 마지막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세인들은 스스로 엎어져 복속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죽음의 강을 건넌 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가지성 혹은 믿음으로부터 유출되는 측면이 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외경(畏敬) 또는 그저 단순한 두려움이란 감정도 일정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사자(死者)가 평소에 바른 사람이었다면,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선하다.’라는 말은 사뭇 그럴 상 싶다.
하지만, 그자가 악인(惡人)이었어도 그리 봐줄 수 있을까?

혹은, 그 말 앞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 이해(利害)에 따라서도
이 말에 대한 평가 수준은 상호 사뭇 다를 것이다.
예컨대 망자(亡者)를 지극히 신뢰하고 사랑하였다든가,
그의 말을 빌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망자가 토해낸 말의 가치를 적극 선양하고 지지할 것이리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넋이 빠져 헛소리 지껄였군.’ 하며,
한껏 폄하 하리라.

“새는 죽을 때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선하다.”

나는 감히 생각한다.
요는,
새소리가 죽을 때 슬프게 들린다든가,
사람의 유언이 선하게 들리는 것은,
기실은 사자(死者)에 달린 것이 아니라,
듣는 이에 달린 것이다.

사자(死者)가 옳은 지, 그른 지 그 누가 정확히 알리.

더욱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이의 말에 신뢰를 가중(加重)하는 것이,
생사를 막 가르려는 이 앞에서 남겨진 자들의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흔히 망자에 대해서는 한껏 후해지고 너그러워지는 인간의 속성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면 이를 그저 박정하다고 그저 내칠 수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이 멀쩡할 때도 그 자의 말을 제대로 믿지 않았는데,
혼미한 상태에 빠진 인간의 말이 새삼 왜 더 미더워져야 하는가?

사자(死者)에 대한 평소의 신뢰 정도가 평가의 기초가 되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겠지만,
그 자의 말에 대한 무게, 가치 따위는
듣는 이의 정조(情調), 이해(利害)에 따라 왜곡 또는 강화되는 등,
얼마든지 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세상은 살아남은 사람이 꾸려 가는 것이니까.
초상집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자자,
이젠 꿋꿋이 기운을 차리세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鳥之將死,其鳴也哀;人之將死,其言也善。

이 鳴言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꾸미는 역사의 준거일 뿐인 것을.

이 말을 내가 지금 다시 상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 전 지인에게 이리 말했다.

“어이, 이보게나,
국상(國喪)이 또 있지 않을까 싶네 그려.”

세칭 원로급의 노인 한 분의 최근 행보가
내겐 예사롭게 비추이지 않았다.
얼핏 짚이기를,
조만간 그도 세상을 떠날까 염려가 되었다.

원로(元老)라는 말을 나는 잘 쓰지 않는다.
대명천지 밝은 세상,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잘나고 훌륭한 세상에,
무슨 별도로 원로씩이나 있단 말인가?
원로라는 말은 너무 전근대적이다.
원로라는 말의 대척점에는 미욱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상정된다.
원하지 않아도 절로 원로 아래 부역하고 있는 백성이 그려진다.
우습다.
언짢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엔 이런 말법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노자(老子)라고 말할 때,
대개는 노자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인줄로만 알지만,
실인즉 老란 지혜를 뜻한다.
그러하니 노자란 ‘지혜로운 선생’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봐줄 수도 있다.
한편, ‘노’씨 성을 가지 선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전거가 또렷하게 없는 마당임이랴,
나는 그저 ‘지혜로운 선생’ 정도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모름지기 원로라면,
본디 진리의 터전에 서서 사물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즉 노자(老子)라야 한다.

그런데 흔히 그저 유명한 사람이 늙으면,
늙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저 감히 원로라고 불리워진다.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뿐,
진정 당대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헤아려 빛을 밝혀준 인물로,
지금 이 시대에 그 누가 떠오르는가?
그저 우중충 노추(老醜)에 불과한 늙은이가 태반이 아닌가 말이다.

한즉, ‘원로’라고 남발하여 불려지는 이 말,
나는 이게 도통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원로라는 말을 이제 당대 이후로는 파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칭함에 원로라는 말을 쓰는 것에 그리 저항감이 별로 없다.
오늘은 문득 그가 다시 생각나고 있음이다.

앞선 국상(國喪)에서,
그가 휠체어를 타고,
오열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나는 순간,

‘비(悲)’

이 한자 하나가 마음속에 둥두런히 떠올랐다.

그러다,
최근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

그는 이리 말했다.

“우리는 세계의 영웅을 잃었다.”

(※ 참고 글 : ☞ 2009/07/06 - [소요유] - 영웅)

‘공(恐)’

나는 이 때,
이 글자가 마음속에 또 다시 그려졌다.

‘비(悲)’,
‘공(恐)’

음양오행상 이는 각기 金, 水에 배대(配對)된다.

사람이 ‘비(悲)’의 감정에 깊이 빠지면,
탈진하여 기가 쇠한다.
더욱이 노인네가 이리 되면,
비(脾) 등 내장이 심히 상하게 된다.

나는 이런 연유로 무심결에,
전 국상 앞에선 그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다.
비(悲)는 능히 승노(勝怒)한다 하였으니,
노여움의 극한에 이르러 그는 그리 오열(嗚咽)하며,
우비(憂悲) 곧 슬픔을 토해내지 않았을까?
슬픔이 다하면 무엇이 올까나?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마주친,

‘공(恐)’

혹여,
이 절대 어둠의 그림자를 보시지나 않았을까?
나는 차마 불경스럽지만 이리 짐작하였다.

무릇 북방 수(水)는 오행상,
생지본(生之本), 원기지근(元氣之根)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동차로 치면, 화(火)를 엔진이라 할 때,
수(水)는 엔진으로 발생된 회전력, 즉 생명의 원동력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비위(脾胃)를 수곡(收穀)의 해(海)라고 부르는 바,
외부로부터 먹은 음식물을 이르는 것이리라.
화(火) 즉 심(心)은 이를 불태워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 에너지 즉 정혈(精血)을 수(水)라 하는 것이니,
실로 이를 정혈(精血)의 해(海)라 부름은 정히나 옳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공(恐)’이 깊어지면,
그 에너지가 freezing되어버린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바짝 얼어,
원기(元氣)가 돌지 않게 된다.

이게 위험한 것이다.

한 때,
호흡기까지 부착을 하셨다고 하는데,
이제는 한결 호전되었다 한다.
적이 다행스런 일이다.

그의 쾌차를 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진정한 의미의 ‘원로’를 가질만한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는 위에서 말한 내 주견과 다르게,
그나마 ‘원로’ 이리 불러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그런 ‘원로’ 한 분을 잃고 싶지 않다.

돌아가실 때에도,
선(善)한 말씀을 하실,
아니 정작은,
그러리라 내가 기꺼이 믿음을 가질,
그런 원로를 이 땅에 오래 모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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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7. 18. 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