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고라니 3
며칠 전에 저희 밭에 갔습니다.
요즘엔 장마철이라 비가 오지 않는 날을 잘 선택해서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리 나가서 그냥 하루를 공치게 됩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길을 나섰다가,
이게 틀려서 비를 맞게 되면 낭패입니다.
그런 날은 도리 없이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주변 지역을 탐색하러 다닙니다.
그리 다녀도 종일 일 하느라고,
막상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거든요.
밭의 형상은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밭 일부는 미쳐 손이 모자라 그냥 내버려 두었기에 풀이 제 마음껏 자랍니다.
쉬는 시간 언덕 정상 부근 풀숲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거의 키 높이까지 자란 풀숲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더니,
후다닥 달아나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제법 커다란 것일 상 싶은데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바로 눈앞인데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게 필경은 고라니라고 생각하여 풀숲 뒤로 가만히 돌아가 보았습니다.
이 녀석들은 뛰어 달아나 숨을 곳이 마땅치 않으면,
현장 부근이라도 은폐물 뒤에 슬쩍 숨는다는 것을 저는 작년에 배웠습니다.
(※ 참고 글 : ☞ 2008/07/28 - [농사] - 아기 고라니 2)
그런데도 부근을 살펴도 찾지를 못하겠네요.
아마도 제가 살피는 동안 저 멀리 이웃 밭으로 도망을 가버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수풀을 제치고 가만히 보니,
그 녀석이 웅크리고 은신했던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변 풀은 거의 키를 넘는데,
그 자리만은 쓰려져 맞춤 고라니 한 마리가,
딱 웅크리고 앉아 있을 정도 눕혀져 있습니다.
누운 풀들은 반지르르 윤이 다 납니다.
녀석이 한 낮에는 여기 누워 쉬는가 싶군요.
거기 가만히 누워 있으면
제법 시원하니 견딜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진데.”
방금 땀을 흠뻑 흘리며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은근슬쩍 부러워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잠깐, 거기 벌레들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 기어가고 있더군요.
“아, 여기에도 복병이 있구나.”
그러자,
저는 이내 장자의 우화 당랑규선(螳螂窺蟬)을 떠올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글
"☞ 2008/04/23 - [소요유] - 지식과 지혜"를 두고,
모 사이트에서 어떤 분과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제가 쓴 글을 끌어 놓아 대신합니다.
***
원래 지식이니 지혜니 하는 편가름 자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인즉,
이런 글제가 저에겐 어색하거니와, 썩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어울려,
뒤웅박 옆구리에 차고 바람 잡는 격으로 허황된 글을 내놓게 되었네요.
매미-사마귀-까치-장자로 이어지는 당랑규선(螳螂窺蟬)이 생각납니다.
이 엿봄의 연환구조를 자각한 순간 장자는 줄행랑을 칩니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인가요 ?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게 존재의 집착을 경계한 것일듯 싶습니다만,
jjj 님의 관찰행위를 뒤에서 또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누구란 말입니까 ?
그 마지막 고리에 신이 서 계실런가요 ?
그렇다면, 이게 당랑규선과는 다른 것이겠는지요 ?
3개월 후에 필경은 장자가 방 밖으로 나왔을 터인데,
그 때는 그럼 사마귀가 매미를 노리지 않는 세계가 펼쳐졌는가 ?
까치가 사마귀를 꼬나보지 않게 되었는가 ?
또한, 장자는 이제 바람만 마시고도 살 형편이 되었는가 ?
만약, 장자가 우화등선하지 못하고,
여전히 화살을 겨누어 무엇인가를 사냥하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면,
그 동안의 3개월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
그럴 지경이라면,
사마귀는 매미를 노림으로서 제 運을 시험하고,
까치는 사마귀를 취함으로서 命을 보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기막힐 노릇이지만, 차라리 성실한 도리가 아닐런가 ?
저라면,
장자처럼 놀란다든가, 골방에 숨는다든가 하는 구차한 짓거리 하지 않고,
그저 소요유나 하렵니다.
이 역시 장자의 말이니, 그도 나중엔 이리 되었음인가 ? ㅎㅎ
***
제가 고라니에게 위협이 되었듯이,
저 벌레들은 또한 고라니로부터 위험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고라니가 인간, 벌레 모두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가여운 처지였을까요?
저 역시 자연의 품에 안겨 살기를 꿈꾸지만,
고라니가 결코 벌레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처럼,
저 벌레들이 내 침실 위를 기어 다닌 것까지 과연 용인할 수 있을런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월리스 카우프만’이 쓴 ‘길을 잃은 즐거움’을 기억합니다.
소로우가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숲으로 들어갔지만,
그와는 다른 결론을 안고 숲을 나왔다. 왜 그랬을까? - 13p 인용
그는 소박한 삶을 꿈꾸지만,
문명을 떠난 숲 생활,
소로우가 말한 ‘자발적 빈곤’을 회의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인터넷은 자발적 빈곤에 따른 소박한 삶과,
자연과의 꾸준한 교감을 예전보다 더욱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저자는 아주 즐거운 듯 말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은 사뭇 동감합니다.
소로우는 책을 수십 미터도 넘는 책꽂이에 진열하였지만,
저자는 수십만 권의 책을 그저 CD로 보관할 수 있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도,
충분히 고독에 잠길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은 지 7년 정도 되어 가서 기억이 조금 희미합니다.
해서 혹 잘못 말씀드릴까봐 책을 뒤적이며 얼추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주의자, 환경보호자의 보존 일방의 주장에 대하여,
일정 분 개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게 인간의 손길이 필요하다.
단 그 손길은 문명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의 차별 없는 배려이고, 보살핌이다.”
결과적으로 절충주의인데,
그가 말한 '손길'이 과연 '배려, 보살핌'인 것으로,
자본의 전사들에게 가능할까 하는 것이 여전한 의구심으로 남습니다.
멀쩡한 온 산하를 뒤집어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저 대운하인지 4대강 사업을 보아서도,
따뜻한 손길이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보존만을 외치는 것이 능사인가?
이것은 저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농사랄 것도 없이,
그저 먼저 앞선 농부들의 마음을 알아보기라도 할 심산으로,
아주 미련하게 온 몸을 흙 위로 내던져 시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껏 일주일에 한번 잠깐 흉내만 내볼 뿐입니다.
이런 한가한 짓거리로,
감히 이를 한톨이나마 제대로 알 수 있을까만,
내일도 밭으로 달려갈 즐거움에 오늘 하루를 달콤하니 마무리 짓습니다.
(※ 본 글은 ☞ 2009/07/14 - [소요유] - 시분할(time sharing)
이 글의 댓글(#1)을 갈음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
※. 참고 글
☞ 2008/07/23 - [농사] - 아기 고라니
☞ 2008/07/28 - [농사] - 아기 고라니 2
☞ 2008/08/19 - [농사] - 8년 만에 돌아온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