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쇠사슬

농사 : 2009. 6. 9. 22:17


금년 봄에 처음으로 밭에 나가니,
고춧대를 누가 거지반 다 훔쳐 갔다.
주말에만 농사를 짓는 형편인고로 밭 한 켠에 쌓아두었던 것인데,
인사치례(?)로 조금만 남겨두고 누군가 다 가져가 버렸다.

몇 주 후엔 밭에 트럭을 대고는 흙을 퍼간 흔적이 보인다.
밭 안쪽에 차량 바퀴 자국이 어지럽게 그어져 있고,
서너 군데 웅덩이가 파진 모습이 트럭을 대고 흙을 파간 것이 역력하다.
이것을 보자하니 이번엔 화가 확 솟아오른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뭇 많이 보유하게 된 고춧대를,
지난해엔 어차피 다 사용할 만큼 농사를 많이 지을 여력이 없은즉,
쓸 만큼만 남겨 두고 이웃 두 집에 각기 100개씩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당시 비록 고춧대를 누군가 훔쳐 가져갔어도 그저 참을 만했으나,
흙까지 퍼간 것을 보자하니 이젠 도리없이 부아가 나는 것이다.

그 동안 근 20년 동안 돌보지 않은 사이 매년 흙을 퍼갔으리란,
심증도 가히 억측이 아닌 것이 그 사이 밭둔덕이 사뭇 낮아졌고,
한 때는 밭 한가운데 커다란 참호 같은 구덩이도 파졌던 적이 있다.

나는 진문공의 고사를 떠올리며,
(※ 참고 글 : ☞ 2008/03/29 - [소요유] - 신념, 신화, 광신, 그리고 빠)
대책을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흙이란 그리 가벼이 대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농사를 시작한지 3년 이래,
내내 밭에 흘려진 비닐 조각을 일일이 손으로 주어내고 있다.
앞 전 수십 년간 이웃에 빌려 준 후,
저들이 소홀히 하여 소여물 썰어 넣듯, 갈갈이 찢어 밭에다 내흘려둔,
비닐을 나는 업보처럼 엎드려 주어내고 있는 형편이다.

짐작하건데, 지금과 같이 주말마다 밭에 올 사정이라면,
추단컨대 앞으로 수십 년을 주어내어야 원상회복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 그 전에 농토는 다른 용도로 바뀌고 말 공산이 더 크지만,
나는 이곳이 농토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이리 돌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인데 남의 밭을 무단히 범접하여 흙을 훔쳐낸 것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일견 남우세스런 짓이란 생각이 아니 드는 것이 아니나,
주말에만 한번 오는 형편이라 밭을 온전히 돌볼 수 없은즉,
부득이 입구를 쇠사슬로 쳐두르기로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른쪽 쓰레기 무더기는 이웃 군부대에서 버린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쇠줄을 쳐놓고 보니,
이게 여느 농토가 아니라,
울로 에둘러쳐진 사유지(私有地)임을 강퍅하니 애써 표상(表象)하고 있질 않은가 말이다.
농토 그 순연한 위상을 잃은 현장을,
쇠사슬은 강잉히 손에 손잡고 번(番)을 서듯 경계하고 있다.

이 현장에 서서,
착잡한 심정을 가다듬을 길 없으매,
나는 외려 어겨다 초항기(招降旗)인 양,
‘접근금지’란 깃발을 짐짓 더 심술부려 내달기로 한다.

옛 동화에서처럼 3년 고개에 한번 넘어지면 3년의 餘命이라면,
10, 20, 30번...의 넘어짐이면 그리 횟수에 3년이 더 보태 더해지는
그런 심사로 하나, 둘, 셋 .... 이리 마냥 달기를 시도해보련다.

무당네 당집에 걸린 깃발처럼 하나, 둘 .... 내걸리며,
이 현세를 한껏 조롱하고 희화화(戱畵化)하듯,
한편으론 면구스럽고,
또 한편으론 왠지 쓸쓸해진 넋이,
깃발 하나 더 보태질 때마다,
덩달아 따라, 다소간이나마 달래지길 기대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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