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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죽은 물질인가?

소요유 : 2009.12.19 10:48


배고픈 비둘기

비둘기들이 난리다.
여름철만 하여도 지붕 위에서 멀찌감치 기다리고 있다가,
강아지들 사료 다 주고 나면 마당가로 내려와 다음 순서를 채근하였다.
그들은 필시 여름 예(禮)를 나름 알고 있었음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고물할아버지네 강아지 사료를 나누고 있으면,
미쳐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료그릇 위에 올라타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쪼아 먹는다.
(※ 참고 글 : ☞ 2009/07/23 - [소요유] - 난득호도(難得糊塗))

어지간히 굶주린 모습들이다.
그저께까지만 하여도 한 마리만 그리했는데,
어제는 두 마리나 달라붙었다.
오늘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강아지 사료 배식이 끝나기도 전에 달겨들어 끝내 그릇을 엎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용감한 녀석들이 따로 있었는데,
오늘은 모두 몰려들어 아귀다툼을 벌인다.
아귀(餓鬼)라!
육도윤회(六道輪廻) 중생의 아귀라 해도 좋겠지만,
글자 그대로 굶주림의 화신(化神)들이라,
나는 이 여여(如如)한 현장에서,
고해(苦海)에 든 중생을 얼음짱처럼 시리게 바로 사무쳐 만나다.

목숨을 내놓고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먹이를 탐하고 있다.
마당가는 저들 날개들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어지로와 눈을 바로 뜨기 어려운 형국이다.
참으로 겨울은 살아 있는 생명에게 모질기도 하구나.

무리들이 여름철에 스무 마리 정도였는데,
겨울철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예닐곱 마리로 부쩍 줄었다.
대신 이즈음엔 까치가 늘어 그 틈을 노린다.
이들은 비둘기보다는 한결 예민하여,
내가 마당가를 떠나기 전까지는 절대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내가 대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둘기들이 모여 먹이를 쪼아 먹는 현장으로 내려온다.

나는 저들을 위하여,
마당가에 모이를 줄을 긋듯 죽 흘려 비둘기를 유인하고는,
서둘러 대문 밖으로 물러선다.
그러면 대문으로부터 먼 곳에 남아 있는 모이를 한 톨이라도 더 주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선 데,
워낙 경계심이 많아 비둘기들한테 기회를 다 빼앗기고는 그저 몇 알씩이나 먹는가 싶다.
사람을 경계하는 저 깔끔한 성정이라니 까치는 정녕 고고한 새이고뇨.

저 녀석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자 하니,
중생이 겪는 굶주림의 고통이 절절 속속 느껴진다.

이 세상에 무릇 고통에 대한 연구에 있어 불교를 따를 것이 있을까?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이르고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팔고(八苦)를 말하고 있다.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이리 여덟 가지가 팔고다.

생로병사는 사고(四苦)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과 함께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글자 풀이만 하여도 대개는 뜻을 새길 수 있다.
하지만 오음성고란 무엇인가 바로 뜻이 다가오지 않는다.
오음(五陰)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이를 흔히 물질(色), 정신(受想行識)으로 나누어 보기도 하지만,
모두 ‘마음의 작용’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보는 것이 불설(佛說)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니, 오음성고(五陰盛苦)란,
이들 오음, 즉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 겪는 온갖 고통을 의미한다.

오늘 비둘기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보자 하니,
이게 불경에 의지하자면 어떤 성질의 고(苦)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우선 경문 하나를 만나본다.

(雜阿含經卷第二 四六)
若可閡可分,是名色受陰。指所閡,若手、
若石、若杖、若刀、若冷、若暖、若渴、若飢、若蚊、虻、
諸毒虫、風、雨觸,是名觸閡,是故閡是色受陰。

“만약 막히고 나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색수음(색온)이라고 이름한다.
막힌다는 것은 손, 돌, 막대기, 칼, 추위, 더위, 목마름, 굶주림, 모기나 등에 따위의
모든 독충, 바람, 비에 부딪치는 것을 이른다. 그런즉, 걸려 부딪히는 것을 색수음이라 한다.”
(※ 閡 : 문잠글 애, 閉, 礙, 藏塞의 뜻이며, 영어의 blocked에 해당됨.)

색(色) 즉 rupa는 팔리어 rupati로부터 유래하는데, 흔히 물질로 번역되곤 한다.
하지만 위 잡아함경에서 보듯이,
돌, 칼은 몰라도, 목마름, 굶주림을 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즉,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물질을 직접 의미하기 보다는 그 성질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들에 부딪혀 걸려 막히거나(閡) 나뉘는(分)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의 느낌, 그런 경험들의 축적된 총체들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제 색온(色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온(蘊)은 덩어리 또는 취(聚) 즉 쌓인 것을 의미한다.)
실제 rupa는 어원으로 보건데 장애 또는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찰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물질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내게 묻는다.
저 비둘기가 느끼는 배고픔은 먹이란 구체적 물질이 없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도착된 의식에 불과한 것인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하다가,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을 하시고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수자타라는 처녀로부터,
낙죽(酪粥,우유죽)을 공양 받고는 기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니련선하 강을 건너 보리수 밑에 자리를 잡고는 정각(正覺)을 이룬다.

원래 수행자가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수행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석가는 수자타로부터 낙죽을 받아 잡숩고 기력을 회복하고는 도를 이룬다.

석가모니가 드신 낙죽이 색온(色蘊)인가?
아니면 영양원으로서의 물질인가?
만약 물질이라면 석가의 깨달음이란 것 역시 물질의 도움 없이 가능하였을 터인가?
석가가 고락(苦樂) 양변(兩邊)은 모두 도를 깨치는데 바른 길이 아니고,
중도의 길이어야 한다고 깨닫고는,
이제까지의 고행을 그치고,
목욕하고 낙죽을 잡숩는다.
그러하다면, 물질에 의지한 바라,
만약 이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과연 석가는 니련선하 강을 건널 수 있었을 것인가?
아니라면 아마도 그는 죽음의 문턱을 서성거리다 못내 탈이 났을 수도 있겠다.
그러하다면 그의 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 터인가?

청년 석가가 먹은 낙죽은 과연 물질인가 색온(色蘊)인가?
저것이 可閡可分, 부딪히고 나뉘는 그 색온(色蘊)이라면,
세상에 可閡可分 아닌 것이 어디에 있음인가?
어찌 손, 돌, 막대기, 칼뿐이랴?
아비, 어미, 너, 나, 사랑, 미움, 기쁨, 슬픔  ...
온갖 모두가 可閡可分이 아니던가?
삼법인에서 말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가 정녕 여실하니 옳지 않은가 말이다.

아비, 어미도 일체개고의 실상인데,
비둘기라고 어찌 이 고해(苦海)를 빗겨가랴?

비둘기 역시 내게 사료 한줌을 얻어먹고는,
처녀 수자타가 건네는 낙죽인 양 여길사.
이내 기력을 회복하고,
명년(明年) 봄엔,
소나무 위에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루어,
찬란한 봄하늘을 날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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