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우리 풀방구리를 풀어두면 밭일을 하는 게 쉽지 않다.
껌딱지처럼 발치에 묻혀 졸졸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해서 험한 일을 할 때는 묶어두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밭에 나가면 한참을 짖다 그도 지치면 저리 누워 나를 기다린다.
꽁무니를 내가 나간 방향으로 잔뜩 틀고,
머리를 돌려 밖을 주시한다.
바로 앉아 기다리면 좀 더 편할 텐데,
저리 몸을 틀어 단 한 치라도 내게 가까이 향한다.
그의 등 뒤엔 내가 있음이다.
문득,
시인 강은교의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이 범상치 않은 말씀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내 등 뒤엔 누가 계신가?
과연 하늘이신가?
장자의 당랑규선(螳螂窺蟬)에선,
‘사물은 서로 얽혀 서로를 두 가지(이해상반)로 불러내고 있다.’고 했다.
‘物固相累,二類相召也’
(※ 참고 글 : ☞ 2009/10/08 - [소요유] - 엿보는 자)
장주는 3개월간 두문불출했다.
강은교는 침묵하라 했다.
그런데,
그는
‘실눈으로 볼 것’
또한 이리 말하고 있다.
입은 침묵으로,
눈은 실눈으로.
이게 무엇인가?
부처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이 말에 이르르면,
기독교도들은 필경 자신이 믿는 신을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침묵, 실눈은
부처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침묵,
그리고 뜬 듯, 만 듯한 실눈.
그런데 이게 부처에게만 전속된 것인가?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여기 등장하는
‘꽃, 하늘, 무덤’
이것은 곧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가림 없는 나의 몸짓, 얼짓이 아닌가?
또는 생(生)과 사(死)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여기 침묵할 것,
실눈을 뜨고.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명상 또는 선이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말들이 갖는 일상과의 간격, 한계를,
단 몇 줄의 싯귀로 구원(救援)한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이 말씀을
침묵과 실눈으로 가만히 받으면,
이내 다음 말을 맞이하게 된다.
큰 하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다.
풀방구리 뒤에 내가 있기도 하고,
정작은 그 안에 내가 있기도 한 것을.
내 뒤에 하늘이 계시기도 하고,
실인즉 내 안에 모시고 있음이기도 한 것을.
동학교도들은,
이 소식을 시천주(侍天主)라 한다.
내 안에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