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아줌마
부제 : 윤선생영어교실과 간다르바
내가 지난 금요일 저녁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농원 앞에 다 이르렀다.
마침 앞에서 군인들이 굴삭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북새통에 농원 출입구 앞은 군인이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도리 없이 속도를 늦추고 깜빡이등을 켰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봉고 하나가 경음기를 크게 울린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니 윤선생영어교실이란 마크가 보인다.
어지간히 더럽게 성질이 급한 녀석이 타고 있고나 싶었다.
그러자니 이자가 차문을 열고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욕설을 마구 퍼붓는다.
세상이 있는 모든 욕은 다 끌어다 배설해놓는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젊은 녀석이다.
네 녀석이 무엇이냐 물으니,
건달이란다.
얼씨구.
꼴에 깡패는 아니고 건달이란다.
예전 어느 조폭이 쓴 자서전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그자는 말한다.
자기네들은 깡패가 아니고 건달이란다.
그럼 건달이란 무엇인가?
원래 범어론 Gandharva로 쓰는데,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하자니 이게 건달바(乾闥婆) > 건달이 된 것이다.
음악의 신쯤 된다고 여기면 된다.
이 신(神)은 악기를 잘 다루며
육식을 하지 않고 향(香)을 취할 뿐이니 몸에선 향기가 진하게 난다.
세상 사람들은 베짱이처럼 놀고먹으며 음악만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할 일없이 무위도식하는 자를 일러 건달이라 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그러한 것인데,
깡패 중에 그래도 조금 유식한 녀석이 있었던가 보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 명리를 구하지 않고,
다만 의협의 기풍을 따라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다.
허니 마치 간다르바처럼 육식(명리)을 탐하지 않고,
향기(의협)만을 취해 살아가는 고고한 무리란 뜻이렷다.
허나 현실은 어떠한가?
저들은 약자를 주먹으로 으르고, 칼로 궁박하며
재물을 빼앗고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윤선생영어교실의 운전수는 꼴에 들은 풍월은 있어,
자칭 건달이란다.
깡패는 아니란 이야기일 터.
내가 피식 웃음이 다 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깡패로 알고 있는데,
자신들만은 건달로 대접해달라는 것이다.
꼴값을 떨고 있음이다.
저들은 도대체가 몸에서 향기는커녕 악취가 나는 흉측한 것들이 아니더냐?
아시는가?
진짜 부자는 자신이 부자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진짜 깡패는 자신이 깡패임을 자랑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부를 다 일궜는데 또 무엇이 궁하랴?
주먹으로 천하를 다 제패했는데 다시 주먹 자랑하는 것이 스스로도 얼마나 우스운가?
진정한 부자는 부가 관심사가 아니며,
천하의 깡패는 더 이상 주먹이 아쉬울 바 없다.
다만 혹여 색중아귀(色中餓鬼)라면,
이웃 집 처자를 탐내는 것이 백배는 더 짜릿하니 스릴이 있을지라.
자신을 건달이라며 우쭐대는 녀석을 보자하니,
네놈은 필시 동네 뒷골목 양아치이거나 똘마니가 여축없으렷다.
여기 전곡에도 자칭 갑부라 이리는 자가 하나 산다.
자신만 모르고 있음이다.
만나는 이마다 그 자를 이르길 갑부는커녕 이름도 부르지 않고 ‘걔’, “쟤”라 한다.
갑부를 꿈꾸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자칭 갑부는 언젠가 진짜배기 갑부한테 크게 당할 것이며,
건달은 어느 날 한길 대로에서 큰형님한테 크게 혼쭐이 나고 말리.
청맹과니 당달봉사가 아니라면,
앞에 공사하는 것이 보였을 터이고,
좌측 깜빡이를 켰으니 이내 좌측으로 들어갈 것이 예견되었을 것임이로되,
단 몇 초를 참지 못하며,
이 불한당 같은 녀석은 연신 차를 빼내란다.
실성을 해도 이리 한심스럽게 돌 수 있음인가?
게다가 이들이 다니는 도로는 거개가 모두 다 우리 땅이다.
이런 녀석들 보기 싫어서라도 이번에 부대가 떠나면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내가 몇 번이고 망설이며 궁리를 트고 있음을 저들은 알까?
바로 이웃 농원은 제 땅도 아닌데,
도로가 모두 제 것이라고 거짓말을 일삼은 것이 이번에 탄로가 났다.
내가 무슨 일로 군청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았더니,
저자가 그 동안 헛소리를 뿌리고 다녔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저자가 제 땅이라고 주장하던 도로는 국방부 땅이라 한다.
도대체가 입만 열면 거짓으로 얼버무린 변통(變通)으로 일관하고,
남을 벗겨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최근 농원에 방문한 스님 하나를 따라 근처 농원 하나를 찾아갔다.
나도 풍문으로만 듣던 농원인데,
개설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무 수세가 대단하다.
스님 역시 작년에 식재한 것을 보았는데 대단하다고 놀란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을 알고 보니,
이태 앞 서 식재한 것이 모두 동해를 입어 뽑아내고 成木을 식재한 것이란다.
농원 주인은 잘못된 묘목을 심고 큰 피해를 입었다고 실망이 큰 모양이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장사를 하다보면 일정분 과장하고 슬쩍 덧칠하여 감추기도 한다.
세상의 광고 치고 과장이 섞여 있지 않고 뻥이 아닌 것이 있더냐?
우리 모두는 이 정도는 모두 애교로 봐주고 외려 즐기기까지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도 정도가 있지,
이를 넘어 끝내 상대가 크게 피해를 입거나 급기야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문득 멈추어 삼가야겠다는 바른 양심이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아니 된다면,
이자를 어찌 장사꾼이라 할 수 있음이며, 농사꾼이라 부를 수 있음인가?
그저 양아치 장사꾼, 깡패 농부라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평생 영어학원이든, 수학학원이든 다녀본 적이 없다.
저들은 도대체가 오며가며 길바닥에 천금 같은 시간을 다 뿌리고 만다.
모름지기 학교 공부만 충실히 하여도 배울 것은 다 배운다.
애저녁에 그릇이 아니 되면 게다 금가루를 퍼부은들 다 새버릴 것이며,
은가루를 쏟은들 다 흘러 내버리고 말 것이다.
요즘엔 무슨 무슨 타이틀이 붙은 학원이 많기도 많다.
도대체가 저리도 흉하고 무식한 녀석을 운전수로 쓰는 사연이 무엇인가?
내가 윤선생영어교실 본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담당 여직원의 응대가 과시 가관이다.
“해당 센터장으로부터 사과를 받으시겠다면 연락하여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아니 본사측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이 아닌가 말이다.
자신은 책임이 없으니 쏙 빠지고 원한다면,
사과를 받아먹을 수 있도록 주선은 해주겠다는 투가 아닌가 말이다.
내가 크게 나무라며,
내 이야기를 듣고도 당신들은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자초지종을 다 들었으면 관리책임을 소홀히 한 것을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명색이 교육사업을 한다는 이들이,
건달인지 깡패를 운전수로 채용할 수 있음인가?
차량 안에 필경은 아이들이 타고 있을 터인데,
저리 험악한 녀석이 모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음인가?
영어 단어 백만 개를 다 외운들,
사람 됨됨이 교육을 받지 못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닿으리.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자 함은,
언필칭 어뢴지 발음 하나 제대로 하고자,
불한당이 되려 함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한참 후, 본사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칭 건달이라 하는 녀석은 원래의 운전사 아들이란다.
가끔씩 대리로 운전을 맡는가 보다.
그러면서 센터장이 말하길 저자가 유순하다고 했다 한다.
본사 담당자는,
아는 사이니까 그렇지,
모르는 사람에겐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한다.
내 비위를 맞추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도 사리를 알고 있음일까?
순간 떠오른 생각은,
면종복배(面從腹背)
낯색은 그럴 듯이 꾸며 앞에서는 화(和)한 척 하고,
뒤돌아서면 속셈으론 배반을 꿈꾼다.
소인혁면(小人革面)
주역의 혁괘에 나오는 말씀이다.
소인은 얼굴만 바꾼다.
제 잇속에 따라 바로 낯빛을 바꾼다는 말이다.
이로우면 단꿀을 삼킨듯 환한 웃음을 짓지만,
손이 나면 바로 낯빛이 바뀌며 주둥아리가 한뼘은 튀어나오고 욕설을 뱉어낸다.
옳고 그르냐, 의로우냐 불의한 것이냐가 아니라,
이들의 판단 기준은 항상 자신에게 이로우냐 아니냐에 묶여있다.
(※ 참고 글 : ☞ 2009/12/31 - [소요유/묵은 글] -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과 군자표변(君子豹變))
제 어미 채용한 長 앞에선 굽신굽신거리되,
나가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저 짐짝처럼 실어 나르기만 하면 그만인 것.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을 한다.
운전은 누구를 위하여 하는가?
센터장을 위해서 하는가?
운전수 자신을 위해서 하는가?
센터장을 위한다면,
조심해서 안전하게 운전하며,
아이들의 통학을 편히 도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운전수 자신을 위한다면,
난폭하게 운전할지라도 여하간 빨리 일순을 돌아 일을 끝마쳐야 된다.
그래야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니 뒷골목 길로 바삐 돌아가 건달 짓을 할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충의(忠義)를 보이지 않는 부하 직원은,
바로 솎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병들고 끝내 망가지고 만다.
저런 자들이 바로 간(姦)이고 두(蠹) 즉 좀벌레인 것이다.
무릇 사장은 저런 자들을 밝히 보아 가려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내일 첫 새벽 침대 위에서 영영 아래로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
직원이든 사장이든,
모두 다 제 욕심만을 차릴 궁리로,
남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너희들의 이름은 이제부터 건달 아니 깡패라 하여야 하리라.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관련 책임자가 하다못해 전화라도 주어 사과를 하여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한데도 은근슬쩍 눙치며 넘어갈 요량일 터다.
내가 연락을 취하니 그제서야 본래의 운전수라는 자가 전화를 해왔다.
내가 일 때문에 전화를 받을 형편이 되지 않으니,
3시 이후에나 통화하자고 본사 직원에게 고지를 해두었는데도,
1시 전후 하여 무려 3번씩이나 전화를 해대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자는 이런 내용을 전해 받아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자신이 시간이 없기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자의 쉼 없이 밑터진 무엇처럼 쏟아내는 말을 들으니 심히 의심쩍은 자구나 싶다.
사과하려는 자가 잘잘못은 누가하였든 간에 운운하며 슬쩍 뭉개려든다.
게다가 아프다며 옴살을 피어댄다.
내가 이 와중에 한가하니 남 아픈 이야기를 들을 형편인가?
여기 시골 동네에도 만나기만 하면 아프다는 말을 늘어놓는 인간 하나가 있다.
이게 다 동정을 사려는 짓거리인줄 왜 아니 모르겠는가?
특히 아쉬운 부탁을 하려 할 때마다 부쩍 이 짓거리가 심했다.
나는 이리도 약하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주문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사과하려고 전화를 한 자가 정작 사과는 아니 하고,
생판 처음 보는 이한테 제 아픈 이야기를 왜 늘어놓는가 말이다.
전화를 끊고 나자,
이 자가 얼마 있지 않아 농원에 도착했다.
말에 갈피가 없고 중간 중간 거짓말을 섞어대는 것이 여실하다.
본사 직원은 문제의 건달이 운전수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 자는 아들의 친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자의 이름도 모르고 연락도 아니 된다고 한다.
전화상으로 이자가 더불어 말을 나눌 형편이 아니 되는 자임을 이미 알아챘지만,
만나자마자 또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다.
내가 귀찮아서 그 이야기는 내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하자,
이 자가 핏대를 내며 제 흥(?)에 겨워 깨춤을 치며 그럴 수 있냐고 난리를 핀다.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여야 하는데,
그 말 자체를 외면하니 계획이 틀어졌음인가?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기를 강매(?), 강권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자가 뱉어내는 말은 내가 제일 천하게 생각하는 말이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냥 넘어가시라.”
“다 이해하시고 넘어가시라.”
(※ 참고 글 : ☞ 2008/02/23 - [소요유] -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이게 사과하러 온 당사자가 할 말인가?
옆에서 지켜보는 제삼자가 그리 말해도,
나로선 이자가 참으로 뜬물같은 사람이고나 할 판인데,
당사자가 이리 나오니 과연 귀접스럽기 짝이 없는 인사가 틀림없다.
깍듯이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명명백백 잘못을 저지른 이상 변명 빼고, 핑계 거두고,
깨끗이 머리 숙이고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리 정정당당 나설 때라야 상대가 수용을 하든 않고 고집을 피우든 할 터인데,
이것 웬 낮도깨비가 나타나서는 지 몸뚱이 아픈 이야기나 주어 섬기고,
살림 형편을 드러내고,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주문을 할 수 있음인가?
그래.
나는 방금 정정당당(正正堂堂)이라고 말했다.
비록 잘못을 시인하는 자리이지만,
비굴하지 않고 일점 가림도 없이 진심을 드러내 용서를 구하는 자세.
이것을 두고 어찌 정정당당하다고 이르지 않을손가?
이자는 사과가 아니라,
자신의 살림 형편을 죽 내다발기고는 돌아갔다.
오늘 밭일은 이 정도에서 작파해야겠다.
일본 사무라이는 툭하면 제 배를 가른다.
제 잘못을 목숨으로 대신하는 저 치열함.
도대체가 이런 정신의 만분지일이라도 우리는 갖출 수 없는가?
모두 다 비겁한 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음이다.
적당히 능갈 치고, 의뭉 떨고 게걸음으로 현장을 피해가기 바쁜 찌질한 인생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자가 다시 찾아왔다.
무엇이 미진해서일까?
손에는 박카스 한 박스가 들려있다.
다시 들렸을 때는 아쉬운 것이 있다는 것이렷다.
설마하니 이런 자가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려 찾아온 것은 아니리라.
왜 아니 그러랴?
또 다시 구질구질 제 살림 형편을 늘어놓더니만,
이제야 그 자칭 건달이란 자가 아들 친구가 아니라 아들로 변하면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 넘어간다.
처음엔 아들 친구라고 하였다가, 중간에 아들인지 친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연막을 치고,
이젠 아들임을 전제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자기 아들은 원래 심보가 착하단다.
세상에 자기 자식 두고 부모가 포악한 놈이라고 이르는 경우가 몇이나 되랴?
아들이 ‘엄마’ 이리 부를 때,
유순하니 정이 담긴 목소리가 아닐 경우가 얼마나 되랴?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아들은 모두 들 착한 놈씩이나 되고 만다.
도대체가 듣도 보지 못한 욕설을 삼태기로 쏟아내고,
자칭 건달이라고 자랑스럽게 이르는 녀석이 심보가 착하다면,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어디에 있으랴.
나이는 45세, X대 전자과, 사격선수 출신.
지 어미가 밝히는 이 자의 출신 내력이다.
도대체가 45세이면 세상의 흑과 백을 변별할 나이가 아닌가 말이다.
헌데 백주대낮에 초등학교 아이들 태우고 욕설을 퍼부을 형편이더냐?
참으로 아득하니 갈길이 멀고도 먼 인생이고나.
친소(親疎)에 따라 사람 면목은 달라지는 것.
하지만 진짜배기 착한 인간은 친소에 따라 성품이 달라지지 않는다.
친분이 가깝든 멀든 다만 옳으면 행하고 그르면 멈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천하에 둘도 없는 비단 피부를 가진 것.
설혹 평소 잘난 자식이 사실이라 한들,
오늘만큼은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공연히 이런 욕을 보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노여움을 거두시고 용서를 바랍니다.
인사치례라도 이리 말을 닦아 세울 수는 없는가?
이 자는 그러면서 이 선에서 그치고,
자기를 보아서 그만 없는 것으로 하잔다.
도대체가 사과를 하러 온 것인지,
자신을 스스로 구명하려고 온 것인지 모르겠다.
해서, 내가 왜 당신을 위해 참아야하는가 이리 물었다.
그랬더니 만약 학원에서 실직하면 여기 농장에 와서 일을 하겠단다.
그러니 책임지라는 이야기다.
그래 자신은 그리라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지만,
그럼 공연히 건달 놈의 행패를 당한 나는 무슨 득이 있는가?
나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이(利)를 위해서 온 것을 이리 자복(雌伏)하고 있음이다.
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君子懷德,小人懷土;君子懷刑,小人懷惠。
군자는 가슴 속에 인덕(仁德)을 품지만,
소인은 가향(家鄉)을 품는다.
군자는 가슴 속에 법제를 품지만,
소인은 실리를 품는다.
정법에 어긋나면 제 자식이라도 칼로 베고 말겠다는 각오,
사리에 어긋나면 제 고향이라도 등지겠다는 시퍼런 정신을 가진 이가 군자란 말씀이다.
이 자가 박카스 한 박스를 테이블 위에다 턱하니 올려놓더니만,
열어 재끼고는 하나는 나를 권하고 하나는 자신이 손수 들더라.
나는 사양을 하고, 그자는 잘 자셨음이라.
아, 혼자 박스 속에서 나와 오연히 서있는 박카스 하나.
외롭다.
본시 뒷간 훑고 지난 바람이,
벌(野)을 달리고, 말(村里)을 누비며,
제가 제일 향기롭다 우쭐거리며 춤을 추는 법.
저자가 휘젓고 간 앞 마당을,
휭하니 바람이 휩쓸고 지나,
마침 군인들이 작업하고 난 도로에 미치자 먼지가 뽀얗게 인다.
안자(晏子)의 말을 끌던 구종 하나가 있었다.
안자는 본명이 안영(晏嬰)이라는 사람인데 제나라의 명재상이다.
키가 육 척 단신인데 말잡이는 팔 척 장신이다.
말잡이 처가 제 남편을 지켜보자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말잡이에게 이리 일렀다.
"안자(晏子=안영)께서는 키가 6 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 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말잡이는 겸손해졌다 한다.
이를 알게 된 안자는 이자를 대부로 천거한다.
운전수가 별 것인가?
따지고 보면 예전 구종별배 말잡이가 아니던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하여도 자가용엔 다 운전기사가 딸렸었다.
마부를 두어 부리듯 그리 운전기사를 고용했던 것이다.
요즘엔 운전대를 잡으면 이게 모두들 제가 잘나서 그런 줄 안다.
어림없는 소리.
천하의 사람들에게 내 고하노니,
운전대를 잡으면,
저 안자의 말잡이처럼 조신하니 마음의 옷깃을 가다듬고 삼갈지라.
아차 방심하면 저 천하의 불한당 깡패 녀석이 되는 것임이라.
혹여 아는가?
운전을 하며 겸양의 덕을 아는 그대를,
누군가 지켜보고는 마침내 대부로 추천할지.
하기사,
여기 시골 동네는 참으로 수준들이 떨어져,
내가 마주치는 차를 대할 때, 차선을 양보하여도 인사를 차리고 가는 자를 거의 보질 못한다.
참으로 시골 사람들은 본데가 없다.
견문이 좁고, 식견이 협착하니 그리 촌것들이라 불리우는 것이 아니랴?
오늘의 생각.
물교소인(勿交小人)
소인배와는 거래를 하지 말 것.
소인물용(小人勿用)
주역에도 역시나 소인을 쓰지 말라 했음이다.
무릇 사용인(使用人)은 사람을 가려 택하여야 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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