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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게임 (복원판)

소요유 : 2013. 2. 8. 22:16


아래 글은 기히 올려둔 '사대부 게임(http://bongta.com/797)'이란 글의 복원판으로,
일부는 적의 손질을  하였음.
(※ 참고 글 : ☞ 2013/02/08 - [소요유] - 사랑제일교회 - 명예훼손 게시물 삭제 요청 건)

***

“고물할아버지 강아지를 더 이상 돌보지 말라.”

내게 이런 주문을 하는 분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bongta가 너무 희생이 커.”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 강아지가 죽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먹지 않으면 죽고 만다.
이 엄혹한 도리 앞엔 그 분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고물할아버지든, 할머니든 내가 나무라는 말을 한마디 하면 이리 대꾸한다.
(※ 참고 글 : ☞ 2009/07/23 - [소요유] - 난득호도(難得糊塗))

“죽이든 살리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다음부터는 오지 마라.”

저들 역시 이 시린 도리를 알고는 있는 것이다.
저 협박의 말 속엔 피 뚝뚝 듣는 ‘생명의 이치’를 꿴 얄팍한 꾀가 들어 있다.

‘죄수의 딜레마’에선 둘 다 선을 행하면 모두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
하지만 하나가 악을 행하면, 따라 악을 택하지 않은 자는 혼자 손해를 보고 만다.
(※ 이(利)와 해(害)를 선(善), 악(惡)으로 바꿔 다루어 보았다.)

죄수의 딜레마

상황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사건 용의자가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서 격리되어 심문을 받으며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불가능 하다. 이들에게 자백여부에 따라 다음의 선택이 가능하다: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구 분 죄수 B의 침묵 죄수 B의 자백
죄수 A의 침묵 죄수 A, B 각자 6개월씩 복역 죄수 A 10년 복역, 죄수 B 석방
죄수 A의 자백 죄수 A 석방, 죄수 B 10년 복역 죄수 A, B 각자 5년씩 복역
(※ 출처 : wikipedia.org)

고물할아버지는 악을 행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
나도 역시 악을 따라 행하면 누군가 지적한 바인 개인적 희생을 그치게 되고,
이젠 이 게임은 종지(終止)되고 만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될 경우,
고물할아버지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게임이 다시 벌어질 토대가 깡그리 허물어지고 만다.

물론 이렇게 되어도 그가 푼돈을 챙기지 못할 것은 없지만,
제 집 마당가에 데려다 놓은 강아지들을 족족 굶겨 죽여야 한다.
그로서는 이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음 손님을 모셔 영업(?)을 지속하기엔 여간 민망하고 난처한 노릇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이리 되면 나로서는 당장 고발하고 말 노릇이로되,
도래할 이런 상황조건을 내가 참아낼 만큼 모질지 못한 것이니,
나의 딜레마는 영원지속 벗어날 길이 없다.

그는 “죽이든 살리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다음부터는 오지 마라.”
내게 이리 말할 정도로 영악한 죄수이고,
나는 미련한 죄수일 뿐인 것을 ...
나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기꺼이 받기로 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서로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최선을 찾아 가는 전략을 택하고 만다.
오늘 이기고 말면 그 뿐이지, 상대를 내일까지 다시 만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오늘의 감옥이 아니라, 내일의 감옥에서도,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의 지속’이 예상된다면,
오늘의 유효 전략이 내일의 최선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Iterated Prisoner's Dilemma)는 이럴 경우에 해당된다.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차기에도 이어질 것이 예상될 때,
게임에 참가하는 이의 전략은 어떠해야 할까?
악셀로드(Robert Axelord)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Tit For Tat’이 가장 좋은 전략임을 밝혔다.
‘Tit For Tat’는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 전략이다.
이 전략은 지극히 단순하다.

“첫 번째 만남에선 우선 협동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가 바로 앞에서 한 그대로 따라 한다.”

처음엔 상대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내가 게임이론을 배우기 전부터 가진 내 소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상대가 선으로 대하면 선으로 대하고,
악으로 대하면 악으로 응한다.
‘선’ + ‘보상과 보복’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 전략이 숱한 다른 전략들을 재끼고 최고의 성적을 내었다.

일관되게 악을 일삼는 전략들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도태되고,
협동을 잘하는 전략들은 살아남아 협동적 체계를 구축한다.
‘Tit For Tat’은 다른 전략들과는 달리,
상대에게 자신의 전략을 투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애매모호하든가, 기회주의적인 상대가 아니란 것이,
게임 참가자 모두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어 신뢰의 증거가 된다.
반면 악을 일삼는 전략들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이 있을 때는 성적을 올리지만,
이들이 도태되고 나면 먹잇감이 없어져 결국 자신도 망하고 만다.

현실세계에서도 과연 ‘Tit For Tat’이 최선의 전략일까?

‘Tit For Tat’은 보상과 응징을 게임 참가자 자신이 직접 행한다.
내 돌이켜 보건대,
법가(法家)는 응징을 국가가 대신 나서서 하겠다는 것이며,
유가(儒家)는 인의(仁義)로써 사회적 협동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임이라,
그러하기에 법가는 하찮은 재(灰)까지도 국가에서 통제를 했다.
(진(秦)나라 위앙(衛鞅)의 변법(變法)엔 이런 조목이 있다.
 棄灰於道,以惰農論
 길에다 함부로 재를 버리면, 농사일을 게을리 한 죄로 묻겠다.)

“형(形)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고,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는다.”
이 뜻은 예는 사대부가 지키는 것이고 서민들은 굳이 지키도록 강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하자면 서민은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벌로서 다스릴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원래 예악(禮樂)은 왕가나 명문가에서만 가르쳤다.
가르쳐보았자 근기(根機)가 딸리는 서민들은 배우지 못하고,
이내 죄를 짓고 말 노릇이니 그저 형벌로써 다스리겠다는 말이다.
악종(惡種)은 영원히 악종이며,
선종(善種)은 본디부터 선종인 것이다.
귀한 자는 태어날 때부터 귀하고,
천한 자는 내리닫이로 천한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원리로 보면 실로 끔찍한 태도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관계하다보면,
선종(善種)도 적지 않지만, 악종(惡種)은 더욱 많아 보인다.
도저히 어찌 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인간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졌기에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지만,
한편으로는 천제(闡提-Icchantika) 즉 성불할 수 없는 중생도 있다고 설해진다.
이 兩價的(ambivalent)으로 충돌하는 문제는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부단히 솟아올라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Tit For Tat’이 최선의 전략인 양 싶지만,
실제의 세계에선 이게 능사가 아닌 예를 찾자면 한둘이 아니다.
가령 예컨대, 마지막 게임이 예상될 경우,
이제까지의 신뢰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고 사라지면 득책이 될 수 있다.
상거래에서 이제까지의 신용을 허물고,
마지막에 거래 상대를 속여 크게 한탕하고는 새벽길을 재촉하며,
온 집안 식구 대동하고 도망 가버렸다는 얘기를 흔히 듣지 않던가?
이런 경우라면 ‘Tit For Tat’ 전략은 응징 대상이 사라져 버렸기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이 전략은 수동적이며, 판단적예측(judgmental forecasts)을 하지 않는 한계를 갖고 있다.

‘Tit For Tat’은 보상과 응징의 프로세스가 장래에도 지속적으로 기대될 때,
참가자를 선의로 구속시킨다.
하지만 이게 특정 시간적, 장소적 제약조건하에선,
부단히 신뢰관계가 침탈되어 깨지고 허물어지곤 한다.

‘Tit For Tat’에선 악의로 일관하는 자도 초기엔 적지 않은 성적을 낸다.
하지만 그가 먹이로 하는 약자가 종국에 다 패퇴하게 되면,
먹잇감이 없어 자신도 종내는 망하고 만다.
현실에서 악인이 곧잘 성공하는 듯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기실 그가 잘났다기보다는 그의 먹잇감에 해당하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모두 없다면 저들 악인도 설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물론 실제가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사회적 약자 구휼제도는 어찌 보면 저들에게 끊임없이 약자를 공급해주는 측면이 있다.
구휼제도가 없다면 약자들이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쉬이 사라질 터인데,
구휼을 받아 생사간 경계선 상에 선 사람들이 다시 소생하여 세상으로 복귀한다.
이들이 ‘Tit For Tat’의 승자 전략을 배워 응징과 보상을 적절히 구사할 수만 있다면,
저들 악인들도 설 자리가 없어질 터인데, 대개는 순진하고 선량한 이들이 많기에,
그저 마냥 당하고만 마는 사람들이 늘 질펀하니 퍼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구휼엔 반드시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이 따라야 한다.
이게 현실에선 재교육, 전환교육 따위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이런 것들이 ‘Tit For Tat’ 게임 차원에서 보자면 악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응징 기술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조금 염려한다.
사정이 이러한 이상, 외부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확립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이다.
가령 법질서 확립이라든가, 부패 척결에 대한 사회적 의식 제고 따위가 그것인데,
나는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 건전한 ‘사회적 분개(憤慨)’ 또는 ‘사회적 분노’라 부르고 싶다.
예컨대 상습적으로 정차선을 무시하고 건널목에 턱 하니 걸쳐 정차한다든가,
길에 휴지, 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이들을 향해,
모든 사람들이 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휘슬을 불며 분개하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개는 소 닭 보듯 피해가고 만다.
나는 저런 이들을 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데,
저들이 아무런 제재없이 방치되고 있기 때문에,
착한 약자들이 끊임없이 유린되고 상처를 입는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악셀로드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성공적인 4가지 전략을 발견했다고 한다.

Nice ― Cooperates on first move
Retaliatory ― will defect if defected against
Forgiving ― can be made to cooperate after starting to defect
Clarity ― don’'t be too complex

즉 선, 보복, 관용, 투명성이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Tit For Tat’은 투명하니 공개된 보상과 응징으로써,
자신의 캐릭터를 상대에게 알리고 게임에 임한다.
이게 선은 선을 부르고, 악은 종국에 패퇴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어떠한가?
악인은 여전히 기승을 부르고 있다.
이는 ‘Tit For Tat’의 우승전략이라는 것이,
현실 사회에선 그대로 먹히지 않고 있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우승 전략의 진화론적인 전개가 현실에선 충분치 않기에,
아직도 악인이 주위엔 차고 넘치고 있다.

앞에서 사대부에게 예악을 가르친다고 했는데,
예기(禮記)는 예악에 대하여 이리 가르치고 있다.
樂所以修內也 禮所以修外也
음악은 사람의 안쪽 마음을 닦게 하고, 예는 사람의 바깥쪽 행동을 닦게 한다.

‘Tit For Tat’에서와 같은 보상이니 응징이니 하는 것이 사대부에겐 없다.
이런 것은 모두 일반 서민들에게나 가해지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예악을 모르는 사대부는 이미 사대부가 아니다.
바로 산 채로 인간 사망선고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사대부의 삶이란 심신 안팎으로 지선지미(至善至美)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이제, 나는,
‘Tit For Tat’의 4대 우승전략이라는
선, 보복, 관용, 투명성에서,
보복과 관용을 빼고,
대신 희생을 보태,
즉 선, 희생, 투명성,
이 삼자를 사대부의 우승전략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첫 출발로,
선업선과(善業善果)를 믿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착한 일을 하면 착한 보상이 따른다.”
이런 문법을 여의어야 사대부가 된다.
온갖 세상의 잘못은 선업선과(善業善果)를 믿기 때문에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 이하 원본의 두 줄이 세줄로 바껴 늘었으되,
       특정인을 의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혹여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도록 적의 고쳐둠  - 2013.02.08)

동역자(同役者)들 모아놓고 성직자의 본분을 몰각하는 말을 태연히 한다든가,
신도들 앞에서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교역자가 있다면,
그자는 틀림없이 선업선과(善業善果)를 믿을 것이다.

아니 바르게 말한다면, 그리 믿어야 한다고 선전해댈 것이다.
왜 아니 그럴 것인가?
지상에선 악업선과(惡業善果)를 믿고 있지만,
천국에 이르러서는 선업선과(善業善果)라고 신도들에게 강매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명색이 선량한 양을 옳게 치는 목자(牧者)라는 신분에 어찌 저리 분별없이 막말을 할 수 있음인가?
남에겐 선업선과(善業善果)를 믿으라면서 신심을 능멸하면서,
자신은 악업선과(惡業善果)를 믿는 세상이라면,
선업선과(善業善果)란 얼마나 구질스런 언어의 껍데기란 말인가?
이는 허구의 언어에 불과하다.

현실 생활에선 악을 일삼으면서도,
일요일 빠짐없이 예배당을 드나드는 이 역시 이런 교역자와 한 치인들 무엇이 다르랴?
지상의 보상 프로세스를 능멸하고
천국의 보상 프로세스를 거짓으로 구하는 이들.
저들의 영원을 겨냥하는 활시위가 얼마나 역겨운가 말이다.

일찍이 혜능(慧能)은 이리 말했다.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이에 비하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이 말은 너무 옳아, 외려 위태스럽다.

이 말의 허울을 뒤집어 쓸 때,
세상의 온갖 스님들은 땡중이 되고,
신도들은 청맹과니 당달봉사가 되고 만다.

내가 등산길마다 스치는 모 사찰엔 자그마하지만 그럴듯한 돌탑이 하나 있다.
여신도들이 대웅전을 향해서, 그리고 돌탑을 향해서 연신 손을 비비며 정성을 드린다.
하지만 절 입구 둘러친 울바자 밑엔 쓰레기가 철이 바뀌어도 그대로이다.
때론 비닐 쓰레기 태운 재를 거름 삼아 울바자 밑 화초밭에 그냥 부어버려 놓기도 한다.
꽃과 쓰레기,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이 여기 절짚 앞에 현현하고 있음이다.
탑돌이 백번, 합장 천번, 염불 만번 ...
신자들 손은 모두 억만년 파리손인 게다.
손이 닳도록 영원토록 비빈들 저게 선업선과(善業善果)를 나을 것인가?

무선무불선(無善無不善)!
선(善)도 불선(不善)도 없음이다.
(※ 참고 글 : ☞ 2009/02/01 - [소요유] - 무선무불선(無善無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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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3. 2. 8. 2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