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그림자

소요유 : 2015. 3. 3. 21:24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때,

난 일을 거의 홀로 배웠다.

어디 매인 바가 없는 조직 분위기인 즉,

개개인 각자는 제 홀로 자유로와 한참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은즉,

서고를 뒤져 선배들의 자취를 더듬어,

일의 졸가리를 세우고,

더듬더듬 세세한 이치를 터득해나갔다.


때문에 내 책상엔 가져다 놓은 옛 문서들이 늘 쌓였다.

일이 익어가자 내 나름 틀을 만들고 원칙을 세웠으며,

선배들이 틀린 것을 바로 잡아 나갔다.

때론 문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현장을 나가 실제 조사를 하고,

사비를 들여 실험 장비를 사서,

독자적으로 일처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하였음인데,

요즈음엔 한참 나태해진 소이(所以)로,

어떤 문제에 임하여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에둘러 고전에 나오는 옛 사례를 들려주며,

짐짓 그 이치를 일러주는데 그칠 뿐이다.

어지간한 것은 주머니 속에서 조약돌을 꺼내듯,

맞춤 맞게 사례를 다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미처 제대로 적당한 고전을 인용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러할 때는 내 공부가 아직도 허술하다고 자탄을 하곤 한다.


여기서 잠깐 멈춰 쉬며, 점성술 이야기를 먼저 해두어야겠다.

점성술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발달하였다.

그런데 나중엔 천체를 기술하는 것을 넘어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데로 나아간다.

특이하게도 이런 개인을 상대로 운명을 논하는 것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오늘날 개인의 운수를 논하는 점성술은 다 바빌로니아의 것에 기원을 둔다.


중국의 점성술은 천변(天變)을 주로 다를 뿐 개인의 운수를 다루는 데까진 발달하지 않았다.

있다면 천자(天子)를 두고 논할 뿐, 개개인의 운수를 다루는 데까진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천변점성술이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점성술에까지 전변(轉變)하는 데 있어,

그리 흘러간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특히 재력 있는 중산층의 대두는 흥미로운 조건의 하나이다.


불교만 하더라도 초기 한정된 지배 계급층을 넘어 널리 일반인에게 퍼지면서,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된 소이도, 

상업이 발달하면서 신흥 재력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귀(富貴)라 이를 때,

무심코 부(富) 와 귀(貴)를 함께 아우르고 말지만,

기실 이 양자는 애초 특수 지배 계급이 한꺼번에 다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상업이 발전하여 재력을 가진 이가 등장한다.

이들은 귀(貴)하지 않지만 이룬 부(富)가 자신의 창고를 넘치게 된다.

그러하자 이제까지 귀족들이 독식하던 세상의 권세를 나눠가지려 하게 되는 것이다.


‘귀족 네 녀석들은 오로지 피가 귀할 뿐이지만,

우리들은 피보다 더 진한 돈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하니까 이들이 등장하자 불교도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즉 종교적 헤게모니를 저들 크샤트리아 계급에서 차츰 빼앗게 되는 것이니,

너희들만 종교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이런 투지와 고민 하에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며,

중생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불교를 표방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 불교는 기실 엘리트층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밥 먹고 살기도 바쁜 데,

똬리 틀고 앉아 도를 일군다고 명상하는 데 열중할 수 있는가?

가령 대를 이어 빨래만 하는 인도의 ‘도비왈라’ 계층들이 이리 고상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해서 초기엔 특수층만이 종교 행위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대승불교 운동은 얼핏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사람을 평등 가치 아래 아우른다는데 그 누가 있어 비난할 수 있겠음인가?

물론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거기 숨어 있는 정치적 세력 판도의 재편,

그 가운데 밀려드는 사회적 변동의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의 시비(是非), 호오(好惡), 정위(正僞) 관계를 떠나서 말이다.

아니 이 사태가 이들 가치로 재단할 수나 있는 문제이건대?


기실 종교가 정치, 사회 변혁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점성술 역시 천변(天變)을 논하던 시절에서,

정치 세력의 최정점에 선 황제에까지 미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중엔 재력가가 등장하면서,

점성술사의 스폰서 노릇을 하게 되자,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둑방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이젠 사사로운 개인에까지 운명점성술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이 와중에 인기를 끄는 유력한 점성술사는 물론 이거니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 개인들의 욕구 수요에 맞춰,

사이비 점성술사까지 등장한다.

이제껏 왕권에 종속되던 점성술은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운명 예측 점성술은 실제 천체를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호로스코프(horoscope)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천체와는 무관하게 도그마화한 이론에 종속하게 된다.

이 때쯤이면 천체 관측을 통해 얻어진 경험칙이나, 

관측 사실, 그에 기초한 합리적 법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로지 호로스코프란 그림 문서상의 독자적인 도그마를 따르게 된다.

따라서 천체 현상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도그마만 남아 있고,

그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는 합리적, 과학적 노력은 태만하게 된다.


사물의 이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문서에 과도히 의지하기 때문에,

실질을 도외시 하는 문제가 발생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건 현장에서 옛 서책에 적혀 있는 사례를 인용하는 태도도,

이와 같은 점성술의 도그마화된 접근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늘, 삼가고 경계해야 할 노릇이다.


이러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書曰:『既雕既琢,還歸其樸。』梁人有治者,動作言學,舉事

於文,曰難之,顧失其實,人曰:『是何也?』對曰:『書言之固然。』


서(書)에

‘옥을 쪼고 다듬어, 원래의 질박한 모습으로 되돌린다.’ 이르고 있다.

양나라 사람으로 행을 닦는(修業) 이가 있었다. 

동작을 할 때마다 학문을 말하고,

일을 할 때마다 문서에 의지하였다.

그가 말하길 ‘지나치면 외려 그 실질을 잃어버린다.’ 하였다.

그러자 다른 이가 묻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하였다.

그가 답하여 이리 이른다.

‘책에서 말하였듯, 그리 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이 인용문 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태도를 염려하면서,

그 근거를 그 회의하는 바로 그 토대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함인데,

나 또한 주인공과 비슷한 나의 태도를 점검하면서,

그 주인공이 등장하는 저 야릇한 고전을 재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최소 내가 이의 허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언명하는 것만으로,

혹 있을 수 있는 차질은 일응 용서될 수 있는가?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어라.


그런데 한 가지 노파심에서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이 인용문을 접하면서 서툰 이들은,

‘공부는 필요 없다.

오직 실질만이 중요할 뿐이다.‘라며 공부를 전폐하는 이가 있지나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런 자는 인용문의 주인공과 견주기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더 열등한 이라 하겠다.

고전, 문서의 말씀들은,

선인들이 고심참담(苦心慘憺),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터득한 그 정수를 남겨 두신 바임이라.

이 어찌 허투루 대할 것인가?

외걸음 독보(獨步)로는,

백 걸음, 천 걸음을 거푸 오가며 참구(參究)하여도 깨우치지 못할 수 있음인데,

우리는 서책을 통하여 선인들의 주옥과 같은 지혜를 바로 접한다.


저 말씀은 고전에 떨어짐을 경계함이다. - 古傳不落

아니 더 정확히는 고전에 마냥 미혹됨을 경계하고 있음이다. - 古傳不昧


아이러니하게도,

저 인용문은 실질을 강조하기 위해 거론되는 것이로되,

그게 적혀진 출처 안에서 보건대,

저자가 고전을 장황하니 모아 둔 더미 속에 끼어 있다.

그 역시 선인들의 말씀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 역시 팔만 사천 경을 남겼으되,

열반시 단 한 자도 설한 바 없다 하셨음이다.


四十九年不說一字


거죽으로는 자기 부정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것을 다시 한 번 부정하면,

긍정에 이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일이다.

과연 긍, 부정 중 어느 것이 진리 당체(當體)를 말하고 있는가?


결국은 고전이 문제가 아니라,

게에 기속(羈束)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소는 코뚜레 때문에 평생 외양간에 묶여 지낸다.

말 역시 재갈이 채워져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싣고 다닌다.

개는 목걸이에 묶여 사람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코뚜레를 벗겨주고, 재갈을 풀어주며, 목걸이를 치운들,

저들은 외양간을 벗어나 달아나지 못하며, 사람 곁을 떠나지 못한다.

이 모두 낙(落)하고, 매(昧)하기 때문이다. 


若影之隨形,響之應聲。

그림자가 형태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한다.


무릇 형(形)과 빛(光) 있으므로 그림자(影)가 생기는 법이로되,

형이 없어져도 그림자는 질기게 남아 길고도 긴 음영을 남긴다. 

검에 팔이 잘린 이가 평생 팔이 달린 양 팬덤(phantom)에 시달린다.

기실 이를 병신(病身) 그이만 겪는다 생각하지만,

멀쩡한 이일지라도 이런 환각지(幻覺肢)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있기나 있는가?


여기 이르러 재미있는 옛 이야기 하나를 더 남겨둔다.


배궁사영(杯弓蛇影)


두선(杜宣)이란 이가 하지 때 술에 취하였는데,

술잔 안에 뱀이 들어 있어 있는 것을 보았다.

더는 마시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후 가슴과 배의 통증이 심하였다.

여러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았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벽에 걸어둔 붉은 활이 잔에 비추인 것이라.

이게 뱀처럼 보인 것이다.

이를 알게 되자, 병이 즉시 나았다 한다.


그러하다면, 

묻는다.


과연,

학(學)은 코뚜레,

문(文)은 재갈일런가? 그림자인가?


속도속도(速道速道)


어서 속히 말하여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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