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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不信)

소요유 : 2015.10.03 18:35


불신(不信)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성선설, 성악설을 배워왔다.

헌데 이를 주장하는 이론과 그 사람의 본성은 별개의 것이건만,

성악설을 주장하는 그 인물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신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본디 믿음의 존재인가? 불신의 존재인가?

혹자는 사람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아야지 어찌 불신으로 대하랴?

세상엔 인간에 대한 믿음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이리 주장하면서 인간을 불신의 존재로 보는 이를 경이원지(敬而遠之)한다.


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


군자는 의에 밝지만, 소인은 이에 밝다.


君子有舍生而取義者,以利言之,則人之所欲無甚於生,所惡無甚於死,孰肯舍生而取義哉?其所喻者義而已,不知利之為利故也,小人反是。


군자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利)를 두고 말한다면, 

즉 사람의 바라는 바가 삶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누가 기꺼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는가?

밝게 아는 것이 의일 뿐, 

이가 이임을 아지 못할 뿐이다.

소인은 이와는 거꾸로다.


내가 시골에 들어가 뼛속 깊이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다.

인걸(人傑)은 찾아보기 어렵고 시뻘건 잇속만 밝히는 사람을 실로 많이도 만났다.

시골 땅에 들어가서 그 요의(要義)를 깨우쳤으니, 

여기 시골은 공부 터로서는 수승(殊勝) 길지(吉地)라 하겠다.


세상에 군자는 열에 불과하되,

소인은 백천만억(百千萬億)을 넘는다.


한비자는 이러한즉, 

성인을 기다리지 말고,

법적 시스템으로 항구적 토대를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夫待越人之善海遊者以救中國之溺人,越人善游矣,而溺者不濟矣。


무릇 월나라 사람 중에서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기다려서,

중국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하다면,

월나라 사람이 헤엄을 잘 친다하여도,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명군이 나타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폭군이 나타나면 나라가 결단이 난다.

현실의 세계에선 이 중간의 군주가 대부분일 것이다.

법적 시스템이 잘 갖추어지면 중질의 군주일지라도,

명군이 다스리는 수준의 통치가 가능하다.


실끝을 따르다보니 본글의 주제를 좀 벗어나버렸다.

관심이 있는 이는 다음을 참고하라.

(※ 참고 글 : ☞ 2012/09/17 - [소요유] - 비룡은 구름을 타는가?)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形)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는다.”

《禮記·曲禮》 「禮不下庶人,刑不上大夫。」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는 사대부가 지켜야 할 것이고,

서민들은 지키도록 강제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예를 지키지 않아도 좋으니 외려 서민들이 편한가?

예를 지킴으로서 인간인 것이다. 

예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미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대부는 예악을 따라야 하지만, 대신 형벌은 받지 않는다라는 원칙하에

貴人은 특권을 누리게 되니 그들은 이미 인간 이상의 인간인 것이다.


현대 사회는 대중 사회(mass society)이다.

따라서 대중, 곧 시민들을 이리 차등적으로 대할 수 없다.

모든 시민은 평등한 권리의 주체이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천박한 짓들이 장마 뒤에 돋는 독버섯처럼 저질러진다.

천박한 이들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니,

뒷골목에 나타나 별별 못된 짓거리를 행한다.

禮不下庶人,刑不上大夫。

그러니까 하는 짓으로 보아서는 절대 대부가 못되는, 곧 예의가 없는 이들,

그리고 형을 받아도 마땅한 서인들이 대부인 양,

마구 못된 짓을 하여도 인권이 보장된다.

(※ Mass society is any society of the modern era that possesses a mass culture and large-scale, impersonal, social institutions. A mass society is a society in which prosperity and bureaucracy have weakened traditional social ties.)


내 이게 못마땅하다고 마냥 탓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 사회 구성원들은 저마다 엘리트(elites)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긍심을 가질 때라야 대중들은 대부로 되태어난다.

형을 벗어나, 예를 아는 이 말이다.


이게 아니 되는 천박한 이들은 도리없이 형벌로써 다스려야 한다.

권주(勸酒) 마다하고 자청하여 독주(毒酒)를 마시고자 함이니,

그리 대우해줘야 하리라.


丈夫年五十而好色未解也,婦人年三十而美色衰矣。以衰美之婦人事好色之丈夫,則身死(or疑)見疏賤,而子疑不為後,此后妃、夫人之所以冀其君之死者也。


장부는 나이 오십이 되어도 색을 좋아하고 아직 줄지 않는데,

부인은 나이 삼십만 되어도 미색이 쇠하고 만다.

미색이 쇠한 부인이 호색한 장부를 섬기게 되면,

애정이 식고 천시 당하지 않을까 의심하며,

자식이 그 뒤를 잇지 못할까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후비와 부인들이 군주가 죽기를 바라는 바다.


故桃左春秋曰 人主之疾死者不能處半。


그런즉 도좌춘추란 책에서 말하길,

군주가 병으로 죽는 경우는 반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즉 독살되거나 창칼에 맞는 등 비명횡사(非命橫死)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후비들은 내침을 당할까 군주를 의심하고,

왕 역시 저들로부터 독살을 당하지나 않을까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黃帝有言曰 上下一日百戰。


황제에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상하 즉 군신 간에 하루에 백번(수많은) 싸움을 한다.

신하는 제 마음을 숨기고, 군주를 시험하며 제 잇속을 차리며,

군주는 법을 이용하여 신하를 제재한다.


우리네 속담에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라는 것이 있다.

예쁜 아이도 아닌데 왜 떡을 더 주는가?

주는 사람 입장에선 이게 득책(得策)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 처지에서도 거저 주는 떡은 무조건 덜썩 받아먹을 것이 아니라,

혹 무슨 암수가 숨겨져 있는가 의심하여야 하리라.


香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勇夫。


향그러운 미끼 아래 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려 달리고,

상이 많으면 용감한 이들이 반드시 꾄다.


기독교의 십계명, 

불교의 오계(五戒), 비구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 비구니 삼백사십팔계(三百四十八戒)

따위를 보면 문득 한 가닥 의문이 피어오른다.

사람이 본래 선하다든가, 신뢰의 존재라면 도대체 어찌 저리도 많은 계율이 필요한가?


기독교야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불교는 사람이 무명(無明)의 때와 번뇌를 벗기면 본래의 청정심으로 돌아간다 하지 않았음인가?

계율이 저리 많다는 것은,

곧 현실에서 사람은 선하지도 않고, 신뢰할 만한 존재도 아니란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잠시 잠깐 멈추고 가만히 생각을 더 추슬러보면,

많은 계율을 이리 의심스럽게 만 볼 일이 아니다.


신뢰는 본디 불신(不信)으로부터 확보되는 것임이라.

가령 사건 해결을 위해 마춤맞은 경찰, 검사를 선임하고자 할 때,

이해 당사자와 무관한 이를 가려 추린다.

만약 이해 당사자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이라면,

저들이 어찌 공정한 조사를 할 것이며,

바른 구형을 할 것인가?

따라서 이해에 구속되지 않는 자를 가려 맡기면,

그가 공정한 수사를 할 수 있게 된다.


하니까 신뢰를 구하려면,

먼저 불신을 철저하게 하여야 한다.


물고기가 맛있고 안전한 먹이를 구하려면,

필히 먼저 낚시 바늘에 걸린 미끼가 아닌가 의심하여야 한다.

의심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허니 하루 열두 번 거푸 의심하라.

이러고서야 비로소 겨우 하루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음이다.


온돌 방 밑엔 죽음의 연탄가스가 혀를 날름거리며 흐른다.

온기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 온기로서 몸을 덥히려면,

연탄가스의 위험을 잘 관리하여야 한다.

틈새 없이 장판을 확실하게 깔아야 하며,

굴뚝엔 연기배출기를 달아 연신 가스를 연돌로부터 뽑아내어야 한다.

따스한 온기 밑으론 차가운 사신(死神)이 서성거리고 있음이다.


명품(名品)이란 무엇인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물건이란 뜻이러니,

사람들에겐 곧 저것이 이름값을 하겠거니 하는 기대가 있다.

물건의 질을 직접 평가하기도 전에,

명패(名牌)만을 보고 신뢰를 붓는다.

그리고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돈을 던진다.


이번에 터진 폭스바겐의 사기극은 ,

곧 이름에 거는 기대와 신뢰를 배반하였다는 점에서,

저리 이름에 경도된 이들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 되고 말았다.


무엇인가에 자신의 신뢰를 건다는 것은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재고 따지며 평가하는 수고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신뢰를 살 수 없다.

그러함인데 이름 하나로써 이를 건너 뛸 수 있음이니,

이게 곧 성가(聲價)요, 품패가치(品牌價值)이다.

그런데 이 신뢰 가치가 하루 아침에 허물어졌음이니,

저들은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현대 투자론은 무작정 수익만을 구하지 않는다.

위험을 인식하고 이를 계량화하고 관리하려 한다.

그 중심은 마코위치의 포트폴리오 이론과 자본자산결정 모형(CAPM)이다.


전자를 통해서는 분산투자효(分散投資效)를 얻을 수 있다.

개별 자산 투자의 위험을 분산 투자를 통해 적절히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의 위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


후자는 이를 기초로 더욱 발전시킨 이론이다.

자본자산의 기대수익율과 위험과의 관계를 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본시장이 균형 상태를 이룰 때, 

체계적 위험이 큰 자산은 보다 큰 기대수익률이 얻어지도록 가격이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 시장이 과연 균형 상태를 이루는가?

설혹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하여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기대수익율과 실현수익율은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떠한 가격결정 모형보다 참신하고

이론 구조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 이론이 완벽하지 않음을 여러 보고가 실증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건 수익률과 동시에 위험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이 이론들의 중요한 업적이다.

high risk, high return

위험이 크면 사람들은 기대 수익률을 크게 잡는다.

결국 수익률을 크게 바라는 만큼 위험을 많이 부담하여야 한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첨언해둔다.

high risk, high return이라 할 때,

이 말을 위험이 크면 수익이 많다로 이해하면 아니된다.

크다는 것은 기대치가 크다는 말일 뿐,

그게 반드시 실현 수익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龐恭與太子質於邯鄲,謂魏王曰:「今一人言市有虎,王信之乎?」曰:「不信。」「二人言市有虎,王信之乎?」曰:「不信。」「三人言市有虎,王信之乎?」王曰:「寡人信之。」龐恭曰:「夫市之無虎也明矣,然而三人言而成虎。今邯鄲之去魏也遠於市,議臣者過於三人,願王察之。」龐恭從邯鄲反,竟不得見。


방공이 태자를 모시고 한단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위왕에게 아뢴다.


‘이제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 이리 말한다면 왕께선 이를 믿겠사오니까?’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리 말한다면 왕께선 이를 믿겠사옵니까?’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리 말한다면, 왕께선 이를 믿겠사옵니까?’


‘과인은 그를 믿겠구나.’


방공이 아뢴다.


‘무릇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이제 한단은 위(魏)로부터 떨어져 있기를 시장보다 더 멉니다.

신을 비방하는 자가 세 사람을 넘으면,

바라옵건대 왕께선 이(사정)를 살펴주십시오.’


(후에) 방공이 한단으로부터 돌아왔다.

결국 왕을 뵐 수 없었다.


왕은 간신배들을 의심하지 못하여,

믿음의 신하인 방공을 저버렸다.


헌즉 대신(大信)은 무릇 대의(大疑)로부터 얻어짐을 알라.

불교에서 화두를 잡을 때 흔히 세 가지를 거론한다.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


클로드 브리스톨 (Claude M. Bristol)이 지은 ‘신념의 마력’이란 책이 있다.

거기에선 이리 선전하고 있다.

“거울을 보고 자기가 염원하는 바를 매일 반복하여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면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은 자기최면 같은 것으로 내가 보기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대의단(大疑團)이 빠져 있다.

믿음의 일향적(一向的) 효용만 강조되고 있다.

의심 또는 불신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외려 믿음의 공액(共軛) 즉 켤레이다.

크게 발심하여 우주의 비밀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분심을 일으키되,

부처의 말까지 의심하며 그를 죽이고 말겠다는 자세로 밀고 나가야 한다.


遇佛殺佛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다.


부처의 말을 무조건 믿고서야 어찌 부처가 될 수 있으랴?

철저하게 깨부수고 내가 홀로 증득(證得)하여야 한다.


이 때래서야,

가을 밤하늘에 둥두런히 떠오른 만월(滿月)처럼,

월인천강(月印千江)

일천지강(一千之江)에 법(法, dharma)의 도장, 법인(法印)을 찍을 수 있다.

또한 이리 이른 자를 부처라 부른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종교 세일즈맨의 외침.


‘믿음 천국, 불신 지옥’


불교와는 격국(格局)이 사뭇 다르다.


저들은 신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 믿음과 불신의 양가(兩價), 양극(兩極) 판단 구조를 여읠 수 없다.

신이 존재하는데 이를 의심하고서야 어찌 신도가 될 수 있으랴?

과시 저들이야말로 신도(信徒), 믿음의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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