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오직 하나
일요일 농원 방 안에서 쉬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또 어떤 녀석들이 나타나 한가로운 오후를 어지럽히고 있는가?
옷깃을 서둘러 여미고는 밖으로 나섰다.
주차장 입구에 중절모를 눌러쓴 인사가 하나 서있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이리 물었더니, 차들끼리 엉기며 경적을 올리고 있는 중이라 별 일은 아니라 한다.
척 보아하니 여호와의 증인이다.
그를 선생이라 내가 불렀더니 손사래를 치며 선생이라 부르지 말란다.
오직 선생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뿐이란다.
근거가 있는가?
이리 물으니 성경에 쓰여 있단다.
그럼 그 부분을 보여 달라고 하니,
성경을 뒤적이는 척 하나, 아지 못하는 모습이다.
못 찾겠단다.
그 때 차가 하나 곁을 지나다, 열린 문 안의 한 분이 내게 인사를 한다.
얼결에 맞인사를 차렸다.
조금 있다 차를 먼 곳에 대었는지,
그 분이 내게로 왔다.
지난번에 1년 이상 만났던 분이다.
그 분과 인사를 나누며 선생의 내력에 대해 묻다.
그는 바로 지적한다.
마태복음 23장.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아, 과연 이 분은 성경에 밝으시구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성경책을 읽으신다 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라 이르는 이 치고 성경책을 과연 얼마나 읽는가?
대개는 목사가 해석하고 설교한 것을 좇는 것이 모두가 아니던가?
예수를 따른다면 성경으로 돌아가 그 본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야 한다.
성경의 말씀이 이러한즉 선생이란 말은 예수 말고는 감히 지칭할 수 없다.
게다가 목사도 두지 않는다 한다.
신도들은 모두 형제라 부른다고 한다.
이들의 신앙생활이 이리도 담백하니 곧으면서도 철저하구나.
내가 요사이 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지나 않은가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을 부를 때는 형제라 이르라 한다.
나는 신자가 아닌데 어찌 형제라 부를 수 있으리오?
그러면 씨라고 부르란다.
노씨, 김씨 등으로.
내 어찌 남을 그리 막 대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뜻이 그러하니 선생이란 말을 쓰지는 않겠지만,
그렇다한들 어찌 씨라 이를쏜가?
기실 선생이란 말은 그리 간단한 말이 아니다.
(※ 참고 글 : ☞ 2009/01/01 - [소요유] - 선생(先生)과 후생(後生))
선생이라 부를진대 그에 걸맞는 학덕을 갖추고,
존경스럽고 본이 될 만한 분이어야 한다.
함부로 아무에게나 이리 부를 수는 없다 하겠다.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 가운데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구석이 있으면,
이들이야말로 내게 선생이 아니겠는가?
하심(下心)으로 마음을 내려놓으니,
만나는 이들마다 귀하고도 고마울 때가 많다.
가령 며칠 전 마트에 들렸는데,
늘상 지켜보았거니와 착하고 성실한 여직원들인 바라,
거래 간 부지불식 저들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칭호뿐이 아니라 마음이 따라 가니,
내겐 하나도 어색함이 없었어라.
내가 후에 조사를 해보니 중국 성경엔 이 부분은 先生이 아니라 夫子로 되어 있다.
但你們不要受拉比的稱呼.因為只有一位是你們的夫子.你們都是弟兄。
중국 성경엔 先生이란 단어도 등장은 한다.
하지만 夫子는 先生보다는 3배 정도 많이 나타난다.
이 둘은 모두 예수를 지칭하는데 쓰인다.
원래 夫子나 先生은 대개 그 의미가 비슷하다.
夫子는 선진(先秦)시대 때 존경하거나 친근한 이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先生은 본디 연장자를 지칭하였다.
그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면칭(面稱) 즉 대면 시 존경의 호칭으로 쓰였다.
한대(漢代)이후까지 고례를 좇아 쓰며 그리 정착되었다.
이리 볼 때 夫子나 先生은 모두 존칭어로 그 자리 쓰임이 있었다.
시간이 나면 영어 성경책 나아가 그 이상도 조사를 하면 좋으련만,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예수 외에 선생은 없다는 말씀은 울림이 크다.
只有一位是你們的夫子
오로지 한 분만이 너의 선생이다.
특히 오늘날 예수를 팔아 제 욕심을 채우는 목사나 교회가 없지 않으니,
이 성경의 말씀으로 어서 바삐 되돌아가야 하리라.
불교 역시 매 한가지로,
나는 최근에 중이 승복 입고 계율을 어기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모름지기 종교인들은 예수, 부처와 직거래 하여야 한다.
그 말씀에 귀의하여 바른 종교생활을 하여야 한다.
목사나 스님으로부터 종교 생활의 안내를 받을 수는 있으나,
그 중심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