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獨)과 지성
사람들이 모이면 양적 압력이 질적 변화를 가져 오는가?
만약 이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다면,
흔히 말하는 집단지성이 그 대표적 현상 예라 하겠다.
반대로 부정적으로 변한다면 집단심리(groupthink)가 작동하여,
비이성적흥분(irrational exuberence)상태에 놓이게 된다.
프랑스의 Gustave Le Bon은 그의 책 군중(The Crowd)에서,
사람들이 군중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감정과 생각이 하나로, 하나의 방향으로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개성들은 모두 사라진다.
집합된 마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변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매우 뚜렷한 특성을 갖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아지면 심리적인 군중(a psychological crowd)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이면,
개별적인 인식 주체성을 잃고,
몰개성적인 새로운 집단심리 현상을 발현하게 된다.
이를 그는 a psychological crowd라 불렀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the great French Revolution)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연구하였다.
그는 예서 한 소식 끌어안았다.
나는 일반 대중 그리고 특히 인터넷 세상 속의 군중을 보고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이런 군중의 심리상태는 충동적이고, 성급하며, 비이성적이다.
또한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정동 과잉에 놓이게 된다.
군중 속에 놓인 개별 주체는 마치 최면술사의 최면에 걸린 듯,
자신도 모른 채 군중의 충동질에 영향을 받고 만다.
예비군 훈련에 가보라.
거기 바로 이리 규정된 군중의 모습을 쉬이 목격할 수 있다.
멀쩡하던 녀석이 망가져서 불한당 짓을 서슴지 않는다.
침 함부로 뱉고, 담배 공초 휙휙 버리며,
부러 꿩총을 매고 갈 짓자 걸음을 걷는다.
조교를 비웃고, 강사 말에 어깃장을 부리기 일쑤다.
이것 보고 군중들은 잘했다는 등 가가대소(呵呵大笑) 추임을 넣는다.
녀석은 칭찬이라도 들었다는 듯, 더욱 기가 승하여 도를 넘긴다.
도대체 저 따위 갈바람에 포도 위를 이리저리 날리는 가랑잎 같은 녀석이,
관례 다 올리고, 새끼 까흘려낳은 성인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툭하면 집단지성이란 말을 내뱉는다.
얼씨구 저런 녀석들이 섬짝으로 켜켜로 쟁여져 있다한들,
지성이란 이름씩이나 헌정 받을 수 있겠음인가?
내 말하노니,
세상에 집단지성은 없다.
지성은 홀로 빛날 뿐,
떼거리로 우짖는 것이 아니다.
지성은 철저하니 단독행위이지, 합동행위가 될 수 없다.
오리무중(五里霧中)
장해(張楷)란 사람이 있었다.
후한 사람인데, 명리에 초연하여, 조정의 부름도 마다하며 제 절개를 지키고 살았다.
(輕貴樂賤,竄跡幽藪,高志確然,獨拔群俗。- 後漢書)
이 장해는 오리무(五里霧)를 잘 만들었다 한다.
후한시대의 1리는 약 415미터라 하였으니, 오리라면 대략 2km 정도다.
중국에서 연기라 함은, 특히 시문(詩文)의 세계에선 연무(煙霧)나 안개나 거의 같이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동시대에 배우(裵優)란 사람이 삼리무를 만들고 있었다.
장해의 오리무에 비해서 못 미치니, 장해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나 상대가 비인(非人)임을 간파한 장해는 가르침은커녕 만나 주지도 않았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니 천기를 어찌 함부로 전하리.
도대체, 이 인터넷이란 광장엔 옥석이 혼효(混淆)하니
선인, 비인, 광인이 마당에 엎지른 곡식처럼 섞이어 있다.
그러하니, 집단지성이니 하며, 뭇 중인을 동원하여, 쭉정이들 똥구멍 간질이며
그들 주머니를 헐어내는 음흉한 도적들이 가끔 목격되고 있다.
쥐뿔이나, 집단지성?
지성은 올올(兀兀)히 혼자뿐이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지성씩이나?
내 날아다니는 쥐새끼 씹은 가끔 보았지만, 떼거리 지성은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성은 혈혈단신 혼자다.
더우기 진리를 과녁으로 활을 날리는 마당에?
떼 씹은 있지만 떼 지성은 없다.
만약 떼로 득효(得效)하였다면,
혹여 집단效가 있을지언정, 그게 곧 그대의 전리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전리품이란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치욕이며, 치욕이어야 한다.
그대 듣는가?
진리를 겨냥하는 한, 떼에 편승하지 마라.
폐일언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배우(裵優)가 삼리무를 써서 도둑질을 하다 붙잡혔다.
오리무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배우는
포청 관리에게 이르길 삼리무의 기술은 장해의 기술을 따라 배웠다 거짓 진술한다.
때문에 장해도 연루되어 투옥된다.
(引楷言從學術,楷坐繫廷尉詔獄 - 後漢書)
오리무를 펴서 탈출하면 될 터인데, 그런가?
장해는 무연히 견딘다.
2년 후 무혐의가 밝혀져 석방되었는데, 장해는 옥중에서 유유히 붓을 들어
상서주(尙書注)란 책을 저술해낸다.
70세 죽기 전에도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장해는 병을 핑계코 거절한다.
그런데, 이때의 칭병사절(稱病辭絶)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지성은커녕 멍터구리가 된다.
거기 술 한 잔 걸치면 염치가 없어지며,
한데 어울리며 패악질도 서슴지 않게 된다.
TV를 멍터구리 상자라 하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거긴 지성이 관여할 여지조차 없다.
그저 떼거지 감정의 일방적 휘쓸림 밖에 없다.
수채구녕 속으로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한데 엎어지며 자빠지며 쓸려 들어간다.
이것도 모르고 손뼉치고 소리 지르며 환호한다.
지성인이 되려면 철저하니 외로와야 된다.
인격(人格)도 독립(獨立)되었을 때라야 자각의 주체가 된다.
지성(知性) 역시 독립 현상일 뿐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부처의 이 말씀 역시 이 자리의 엄정한 사태를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及至初生。則震動一切世界網。便一手指天。一手指地。作大獅子吼道。天上天下惟我獨尊。為一大事因緣故。開佛知見。示佛知見。悟佛知見。入佛知見。
처음 태어남에 이르러, 온 세계가 진동을 하다.
문득 손가락 하나를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또 다른 손가락 하나는 땅을 가리키며,
대사자후로 도를 말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일대사인연인 바임이라.
진리를 열고,
진리를 보이며,
진리를 깨달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다.
세상에 대한 이해는 독립적인 감관경험(感觀經驗)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독(獨)이란 원래 상상 속의 동물이다.
北嚻山有獨𤞞獸。如虎。白身,豕鬛,尾如馬。
북효산에 獨이란 짐승이 있다.
호랑이 같고, 몸은 하얗다.
돼지 갈기를 하고 꼬리는 말과 같다.
羊爲羣。犬爲獨。犬好鬥。好鬥則獨而不羣。
양은 무리를 짓는다.
개는 홀로 다닌다.
개는 싸움을 좋아한다.
싸움을 좋아하는 즉 홀로 다니지 무리를 짓지 않는다.
獨一叫而猨散,鼉一鳴而龜伏。或曰鼉鳴夜,獨叫曉。獨,猨類也。似猨而大,食猨。今俗謂之獨猨。蓋猨性羣,獨性特,猨鳴三,獨叫一,是以謂之獨也。
독(獨)이 한번 울부짖으면 원숭이들이 흩어진다.
악어가 한 번 울면 거북이들이 조복(調伏)한다.
혹자는 이리 말한다.
악어는 밤에 울고(or 울어 밤을 알리고),
독(獨)은 새벽에 운다.
독(獨)은 원숭이 종류로서 이들과 비슷하나 크며,
원숭이를 잡아먹는다.
이제 속어로 독원(獨猨)이라 이르는데,
원숭이는 무리를 지으나,
독(獨)은 홀로 다니는 성질이 있다.
원숭이는 세 번 우나,
독(獨)은 한 번 운다.
그런즉 그를 일러 독(獨)이라 하니라.
지성은 독(獨)과 같다.
한 번도 아니고 삼세 번 울면,
떼거리로 모여 들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것들은 다 흑싸리 쭉정이들이다.
독(獨)은 딱 한 번 울고 만다.
왜 그런가?
두 번 울면 자신이 없기 때문인 것이요,
세 번 울면 구차스러우니 사뭇 부끄럽다.
원숭이 무리는 연신 울어 재끼며 밤을 알리지만,
독(獨)은 단 한 번 울어 신새벽, 곧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을 알린다.
이를 일러 홍몽(鸿蒙)을 깨는 개벽(開闢)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성의 참다운 모습과 같다.
高志確然,獨拔群俗。
뜻은 높고, 홀로 무리의 속됨을 딛고 우뚝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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