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재를 공도에다 버리면 그 손을 자른다.

소요유 : 2015. 10. 20. 17:23


외진 곳에 쓰레기 담은 검정 봉투 두 개가 버려져 있다.

등산을 하고 내려온 이들이 버리고 간 것이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내가 치우면서 xx라 혼잣말로 욕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사를 차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톨릭 수사회 원장님이시다.

비록 혼잣말이지만 욕하는 장면을 들켰으니 과시 오늘 아침은 욕되구나.

 

‘수사회 사람들이 그리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아, 물론이지요.

여긴 곧잘 등산객이 쓰레기를 버리곤 합니다.’

 

‘(수사회) 안에다 넣어 놓으세요.’

 

아, 이 분이 수도(修道)가 깊으시구나.

 

천하 여느 세속인이 있어,

제 집 안에다 남이 버린 쓰레기봉투를 들이려 하겠는가?

 

내가 바로 그 말씀을 받아 이리 말하였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제가 치울 것입니다.’

 

내가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원장님이 존경스럽기도 하구나.

 

헌데 이런 짓궂은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 쓰레기봉투가 버려지는 사태가 매양 일어나고,

(사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실제로 이런 일은 그치지 않고 일어날 것이다.)

그 때마다 그 쓰레기를 수사회 안에다 넣는다면 어찌 될 것인가?

 

내가 그럴 위인도 아니지만,

만에 하나 한 두 차례는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이게 지속적으로 그리 행해진다면,

나의 부끄러움은 차치하고,

원장님의 마음속에 나를 향한 미움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하니, 과연 이게 지속성이 담보될 수 있는 태도인가?

이런 의문을 나는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골목마다 버려지는 담배꽁초나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은 또 어떻겠는가?

이것도 모두 수사회에서 감당하실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웃이 스스로 감당하여야 한다는 깊은 가르침이실런가?

 

자, 그런데 이제 이런 가르침은 어떠한가?

나의 지난 생각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진(秦)나라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중에 하나이다.

 

棄灰於道,以惰農論

 

길에다 함부로 재를 버리면, 농사일을 게을리 한 죄로 묻겠다.

 

그런데 이런 전통은 그보다 사뭇 앞선 은나라에도 있었다.

 

殷之法,棄灰于公道者斷其手

 

은나라의 법(엔), 재를 공도에다 버리면 그 손을 자른다.

 

이런 모습을 두고는,

혹자는 고대의 법제는 너무 무자비하다고 평한다.

요즘 의식으론 그러하지 않다 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형량(刑量)의 경중, 또는 양형(量刑)의 정부(正否)를 시비하기 이전에,

그 법의 집행 정신을 살피는 것이,

여기 이 자리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리라.

 

殷之法,棄灰于公道者斷其手,子貢曰:「棄灰之罪輕,斷手之罰重,古人何太毅也?」曰:「無棄灰所易也,斷手所惡也,行所易不關所惡,古人以為易,故行之。」

<韓非子 內儲說上>

 

은나라의 법(엔), 재를 공도에다 버리면 그 손을 자른다.

자공이 공자에게 여쭙는다.

 

‘재를 버린 죄는 가벼운데,

손을 자르는 벌은 무겁습니다.

옛 사람은 어찌 이리 엄하오니까?’

 

공자가 이리 말씀 하시다.

 

‘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다.

손을 잘리는 일은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다.

쉬운 일을 행하는 것과,

싫어하는 일은 서로 무관한 일이다.

옛 사람은, 쉬운 일이니까,

그로써 그리 행할 뿐이니라.’

 

대개의 시골 사람들은 밭에다 온갖 비닐 따위를 버리고,

태워서 다이옥신을 온 세상에 퍼뜨린다.

 

(난 기실 여기 시골 땅에 와서,

이 지경으로 허물어진 저들의 모습에 경악하였다.

 

도시에 살 때,

나는 저들이 마냥 순박하고 지순한줄 만 알았다.

저들의 일방적인 사회적 희생을 아파하였고,

지지를 보내고 응원하였었다.

물론 지금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저들의 천박한 모습, 무지한 행태에 대해서는 용인하기 힘들다.)

 

그것은 참으로 쉽다.

수거하는 일도 귀찮고,

만에 하나 혹 수거하였다하여 그것을 챙겨 쓰레기봉투에 넣거나 집으로 가져가는 일은,

성가신 일이다.

그러나 밭에다 버리거나,

슬쩍 태워버리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이게 과연 쉬운 일인가?

온 천하의 공기를 발암 물질로 더럽히고, 

토양을 오염 시키는 일을 어찌 쉽다 할 수 있겠음인가?

천하인 모두에게 위해를 가하는 짓이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저들의 패악질로 자연은 신음하고, 하늘 창은 오존층이 파괴되어 뻥 뚫리고,

극지의 천년설, 얼음이 엿가락처럼 녹고 있다.

실로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지르는 개인에겐 쉬운 일이지만,

천하인에겐 중하고 큰일이다.

 

하니깐,

앞 선 공자의 말씀은,

쉽다 이르신들 그게 결코 쉽다는 뜻이 아니다.

천하에 큰 해악이 된다는 말씀이다.

 

헌즉 큰 벌로써 저들을 응징하는 일이야말로,

쉬운 일이어야 한다.

 

저런 패악질은 저지르는 족족 엄한 벌로써 징치(懲治)하여 한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온 천하가 태평하리라.

 

저런 천(賤) 불한당이 농부로 있을 땐,

비료를 퍼부어 아질산염이 그득 든 짙푸른 소채(蔬菜)를 만들어 낼 것이며,

토양은 온갖 오물로 더럽혀져 예토(穢土)가 되어 갈 것이다.

실로 끔찍한 일이다.

 

혹, 저들이 도시로 나아가 공인(工人)이 된다면 어떤 짓을 일삼을까?

가령 두부 장수를 한다면,

두부에다 횟가루를 처넣을 것이요.

콩나물 장수를 한다면,

농약물을 거침없이 들이 부어 콩나물을 만들지 않을 터인가 말이다.

 

또한 저들이 상인(商人)이 된다면 무슨 짓을 할런가?

교묘히 저울 눈금을 조작하여 근량(斤量)을 속일 터이며,

거짓 간판을 세워 소비자를 우롱할 것이다.

 

실제 여기 시골엔,

서울에서 내려온 농부 허울 쓴 장사꾼 하나가 있다.

농장 개설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ooo 농업인 대상’

이런 상을 받았다.

아직 열매도 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유기농, 자연 재배 명품 과일을 생산한다며,

유명 언론사가 주는 상을 받았다.

아니 이 상은 받는 것이 아니라 기백만 원을 주고 사온다.

난, 나중에 이를 또한 이 자리를 통해 고발할 것이다.

 

그러함이니,

농부니, 공인이니, 상인이니 하는 허울은 문제가 아니 된다.

사람 하나가 있어,

그가 서있는 자리에서 얼마나 옳게 사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농부라면,

땅을 아끼고,

식물을 귀히 여겨,

천하인의 목숨을 바로 부축할 수 있도록,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아니 갖추어진다면,

유기농 인증, 자연 재배라는 명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속임 수, 헛짓거리일 뿐이다.

 

내가 머무르는 이곳 가근방을 통틀어,

그들이 유기농 인증을 준다면 내가 첫 째가 될 터이며,

혹여 자연 재배 인증이 있다면 나를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허지만 유기농 인증도 가짜가 판을 치고 있음은,   

이미 온 천하에 밝혀졌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친 환경 유기농의 진실- 1부. 가짜 인증의 덫)

 

난 진작 이런 인증 따위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만, 내 양심을 지킬 뿐이다.

그 외의 것은 사번(事繁)스런 짓일 뿐이다.

호무의(毫無意),

터럭 하나만큼도 뜻이 없다.

 

(※ 事繁

사마중달이 제갈공명과 오장원에서 대치한다.

촉나라 사자에게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의 근황을 묻는다.

사자는 말하길 식사는 적게 하고, 업무량이 많다고 아뢴다.

이 말을 듣고는 사마중달은 

“공명이 그리 적게 먹고 일을 많이 하니 어찌 오래 살 것인가?” 

(食少事煩 安能久乎)

이리 짐작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공명은 죽고 만다.

 

공명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인데,

홀로 걱정을 도맡아 하다 끝내 명을 재촉하고 만다.

 

도대체가 유기농이니 자연재배하면 그 뿐이지,

왜 제 삼자가 나서서 인증을 하는가?

또한 농부는 마른 혓바닥 내밀며 죽 늘어서서 이를 받지 못할까 안달을 하는가?

이는 모두들 속임을 으뜸 가치로 삼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 이를 감시하고자 국가를 내세웠지만,

국가 또한 미덥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

결국 천하에 믿을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래 사람을 직접 구하고자 한다.

미더운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이를 찾으면 이젠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그가 곁에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이런 이들이 이 시대에 남아 있는가?

나는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그런 이들은 별처럼 하나 둘 어둔 하늘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파도가 일더라도,

깊은 바다 속에서 명주(明珠) 진주를 영글리며,

제 고상한 뜻을 안으로 고이 익히 듯.)

 

두부장수가 설혹 횟가루를 섞는다한들,

야밤에 몰래 숨어서 한다.

그러함인데 농민 하나가 있어,

백주대낮 도로변 밭에다 태운 채 내뺄 수가 있는가?

 

숨어서함은 일말의 수치스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백주 대낮 밭에다 태연하게 비닐을 태우고,

각종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실종되어 있음이다.

이러고도 과연 농부라 이름할 수 있겠음인가?

나는 결단코 말하거니와,

저들은 농부가 아니라 천민(賤民)일 뿐이다.

농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無羞惡之心 非人也

부끄러움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의 말씀이다.

이 어찌 삼엄한 가르침이 아니랴?

 

나는 바로 앞의 글에서 이리 인용하였다.

(※☞ 2015/10/09 - [소요유] - 로드킬 ⅱ

 

今世皆曰「尊主安國者,必以仁義智能」,而不知卑主危國者之必以仁義智能也。故有道之主,遠仁義,去智能,服之以法。

 

오늘날 모두 말하기를,

군주를 존중하고 나라를 안정되게 하는 자는 필히 인의와 지능으로써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군주를 비하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자도,

반드시 인의와 지능으로써 한다는 것을 아지 못한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군주는 인의를 멀리하고, 지능을 버리며, 법으로써 따르게 한다.

 

인의로 대하여 인의를 따를 사람은,

애초부터 쓰레기 투기 따위의 그런 못된 짓을 하질 않는다.

혹간 실수를 하였다한들 바로 잘못을 바로 잡아 고친다.

 

하지만 인의로 대하였다한들 인의를 따르지 않을 사람은,

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遠仁義,去智能,服之以法。

따라서 도를 아는 이는 인의와 지능을 버리고 법에 의지한다.

 

그런즉 악인을 다스리고자 할 때,

인의로써 바로잡고자 하는 방법은 현실 정합성이 사뭇 떨어진다.

애오라지 법으로써 규율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리 법가의 이론을 신봉하지만,

수사회 원장님의 깊은 사랑의 정신을 훼(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런 인의지도(仁義之道)가 펴지지 않은 세상을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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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5. 10. 20. 1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