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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이야기(馬說)

소요유 : 2015. 12. 4. 19:49


한유(韓愈)는 대문장가로 흔히 알려져 있다.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그의 글은 당시 형식미에 찌든 현실에 대한 반동이자,

문이재도(文以載道)라, 즉 문장이란 도를 싣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듯,

삼대양한(三代兩漢)의 유도(儒道), 그리고 질박한 문체로 돌아가길 꿈꿨던 것이다.


당시의 글은 병려문(駢儷文)이라 하여,

4, 6귀의 대귀, 압운의 형식에 갇혀 있고,

문사수식(文辭修飾) 즉 문학작품을 다수 인용하여 수사에 치중하였다.


얼핏 문학적 복고주의로 보이지만,

이는 수단이지 실제 목적은 도(道) 즉 유가의 도로 돌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불교와 도가에 의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유가는 맹자 이후,

거지반 실전(失傳)의 위기에 처하여 있었다.


이제 그의 글 하나를 소개해두고자 한다.

비록 짧지만 논리 구조가 명확하고, 리듬이 살아 있어,

예로부터 명문으로 꼽힌다.


世有伯樂 ,然後有千里馬 。千里馬常有,而伯樂不常有。故雖有名馬,祇辱於奴隸人之手,駢死於槽櫪之間,不以千里稱也。馬之千里者,一食或 盡粟一石,食馬者不知其能千里而食也。是馬也,雖有千里之能,食不飽,力不足,才美不外見,且欲與常馬等不可得,安求其能千里也?策之不以其道,食之不能盡其材,鳴之而不能通其意,執策而臨之曰:「天下無馬!」嗚呼!其真無馬耶?其真不知馬也! (昌黎先生集.雜說)


“세상엔 천리마가 있은 연후라야, 백락(伯樂)이 있는 법이다.

천리마는 항상 있되,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런즉 명마가 있다한들 마부의 손에 욕을 보다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성도 듣지 못하고,

마구간 속에서 보통 말들과 함께 죽는다.


천리마는 한 끼에 한 섬의 곡식을 먹지만,

말을 먹이는 자는 천리마인줄 모르고 먹인다.

비록 천리를 달리는 능력이 있지만,

배불리 먹질 못하니 힘이 달린다.

재주가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여,

보통 말처럼 달리려 하여도 달릴 수 없으니,

어찌 천리를 달릴 수 있으랴? 


그 말의 성격에 맞지 않도록 말을 몰고,

그 자질을 다 할 수 없도록 먹이며, 

울어도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면서도,

채찍을 들어 말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천하에 말이 없도다.’ 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진짜로 그런 말이 없는 것인가?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는 태어날 때 모친이 죽고, 3세에 부친을 잃었다.

맏형에게 맡겨져 자랐는데, 이도 일찍 죽자 형수에게 의지했다.

가문도 그리 잘 알려진 명문가가 아니었기에,

출세하는데 적지 아니 힘이 들었다.

위 글은 그런 사정을 두고 읽으면 이해가 빠르리라.


고장난명(孤掌難鳴)인 것이라,

외손바닥은 소리를 낼 수 없다.


명창(名唱)도 고수(鼓手)를 잘 만나야 빛을 발할 수 있다.

하기에 예로부터 일고수 이명창(一鼓手二名唱) 또는

수(雄)고수, 암(雌)명창이라 이르고 있는 게 아니랴?


이쯤에서 나는 또 다른 고사 하나를 상기해보게 된다.

이제 이를 아울러 병치(竝置)하며 음미해보고자 한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뾰족하니 절로 뚫고 나오느니,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도 자연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신뢰하게 되면,

자연 실력만 닦으면 세상에 드러나 쓰임이 있게 되리란 기대를 가질 수 있다.

하니, “조급하니 안달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 하거라.” 란 

가르침이 그럴싸하니 의젓하게 무게를 갖게 된다.


과연 그런가?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은 송곳은 어떠한가?

대저,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려면 먼저 주머니에 들어가야 한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바에랴, 더 이상 무엇을 시험할 수 있으랴?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사기가 출처인데 우선 그 고사를 더듬어본다.


때는 전국 시대 말엽이다.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 평원군(平原君: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20명을 선발하여 동행하고자 했으나 마지막 하나를 정하지 못했다.

이 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무릇 현명한 사람의 처세는 비유컨대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 그 끝이 보이는 것과 같다.

이제 선생이 나의 문하에 삼년이 되었으나, 좌우에서 아직 칭송하는 바가 없었으며,

내가 아직 들은 바가 없으니, 이는 선생이 가진 재주가 없음이라.

선생은 능력이 없으니 그냥 여기 머무르십시요.”


모수 왈


“신은, 이제 오늘 주머니에 넣어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 주셨다면, 이내 자루까지 나와 있었을 것이니,

비단 송곳 끝뿐이겠습니까?”


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其末立見。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左右未有所稱誦,勝未有所聞,是先生無所有也。先生不能,先生留。毛遂曰 臣乃今日請處囊中耳。使遂蚤得處囊中,乃穎脫而出,非特其末見而已。(史記)


이에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고,

초나라에 가서 모수 덕분에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출전을 제대로 읽어 보면,

낭중지추는 흔히 널리 새겨지듯이

“재능이 뛰어나면 자연 외부에 드러나 알려지기 마련이다.”라는 뜻을 사뭇 넘고 있다.


즉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마땅한 기회가 없으면 그를 드러낼 수 없다.

하기에 3년 간 모수는 모시고 있던 주인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기회를 맞아, 모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추천하고 발신(發身)한다.

원래 추천이란 다른 사람이 어떤 이를 들어 소개하는 것이다.

경계 또는 시기하느라, 모수 주변엔 그를 주인에게 추천할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모수가 때를 기다리느라고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음인가?


김수현 원작의 ‘사랑이 뭐길래’라는 예전 드라마에서 가끔 흘러나오던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와

김국환의 ‘타타타’란 노래를 기억하시는가?

거기 김혜자가 타타타란 노래를 듣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실인즉 나는 음악은 잘 모르는데,

며칠 전 차안에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란 노래를 들었다.

곁에서 듣던 집 사람이 이 노래의 내력을 알려주니 

그제서야 그 사연이 되짚어진다.


이후 이 두 노래는 빅히트를 한다.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곡들이지만,

김혜자 혹은 김수현이 드라마란 주머니에 집어넣음으로서,

비로소 송곳의 날카로움을 밖으로 드러나게 한 것이다.


그러하니 송곳이란 주머니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뾰족한 것임이 드러난다.

세상의 귀한 것은 모두 이런 역설적인 구조에 갇혀 있음이라.


아니 혹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런 역설적인 구조를 뚫고 나온 것을 세인들은 

그제서야 이름하여 귀한 것으로 부르고 마는 것일까?


재능은 원인충족적인 것인가?

아니면 결과만족적인 것인가?


1970년대 버전으로 바꿔 말하면,

사장이기에 회전의자에 앉는가?

회전의자에 앉았기에 사장이 되는가? 

(※ 참고 글 : ☞ 2008/03/12 - [소요유] - 격언의 배리(背理))


모수는 자신을 스스로 주머니에 넣는 수고를 하였지만,

외부에서 나를 주머니에 넣어주는 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우리는 귀인(貴人)이라 부르곤 한다.

(※ 참고 글 : 貴人 ☞ 2008/06/27 - [소요유] - 富와 貴)


재능도 재능이지만,

자천이든 타천이든 주머니에 일단 들어가야 하는 바,

이런 통과의례(通過儀禮)를 

기회(機會), chance, 혹은 시험(試驗)이라고 바꿔 음미해볼 사.


하지만, 재능도 없이 우선 주머니 속에 들고 보자고,

그 안으로 무작정 자맥질을 한다면 어찌될까?

아마 마술 병에 갇히듯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버리지 않을까?

속담에 이르길

"남이 장에 가니 똥장군 매고 따라 나선다"고,

뭉툭한 끝을 가지고 욕심만 사납다면,

설혹 천년 되풀이로 대든들 죄과가 어찌 가볍다 할까?


오늘날의 세태는 그야말로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

이자 저자 가리지 않고 이름을 내지 못하여 안달이다.

한편으론 이름을 사고자 죽자 사자 매달리는 이들도 많다.


나의 경우엔 농장 전화번호가 노출되어서 그러겠지만,

심심치 않게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블로그를 단시간에 파워블로그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

언론사에서 시행하는 농업대상을 받게 해주겠다는 이 등.

모두 이름 파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장사치들의 삿된 짓거리다.

실로 이들은 세상에 사악함을 퍼뜨리는 흉측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예컨대 농업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좌고우면 돌아볼 것 없이 무작정 이름부터 먼저 내자는 것이다.


관에서 주관하는 농업대학에 가면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 역시 실(實)보다 먼저 이야기를 만들어 팔자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농부들이 품질 좋은 작물을 낼 연구는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름을 그럴싸하게 내어 재빠르게 팔까 하는 궁리만 트게 만든다.


명실쌍전(名實雙全)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장사치라는 것들은 실질(實質)은 뒷전에 팽개쳐 두고,

모두 허명(虛名)에 매달리는데 익숙하다.


옛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바삐 죽 훑어본다.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이로되,

막상 정명론(正名論)은 내가 예전에 먼저 언급을 한 것인즉 이번엔 생략한다.


名者所以別同異、明是非,道義之門,政化之準繩也。

孔子曰 必也正名,名不正則事不成。(魯勝墨辯注敘)


“이름이란 같고 다름이 있고, 이로써 옳고 그름을 밝힐 수 있으며,

도의(道義)로 들어가는 문이며, 정치 문화의 표준이 된다.

공자가 말씀 하시다.

‘반드시 발른 이름이여야 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


人主誠明於聖人之術,而不苟於世俗之言,循名實而定是非,因參驗而審言辭。是以左右近習之臣,知偽詐之不可以得安也,必曰:『我不去姦私之行盡力竭智以事主,而乃以相與比周妄毀譽以求安,是猶負千鈞之重,陷於不測之淵而求生也,必不幾矣。』

(韓非子)


“군주가 성인의 술법에 밝아서, 세속의 말에 끌려다니지 않고,

명목과 실질이 부합하는가에 따라 시비를 판정하고,

증거를 대조해봄으로써 말을 살필 수 있게 되면,

이로써 좌우 측근의 신하들은 속여서는,

자신의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반드시 말하리라.

‘간사한 행동을 버리고, 힘을 다하고 지혜를 짜내어 군주를 섬기지 않고,

외려 패거리를 지어 망령되이 남을 헐뜯거나 칭찬함으로써 안전을 구한다면,

이는 마치 천 근 무게의 짐을 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에 빠져서,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절대 기약할 수 없다.’”


民之性,有生之實,有生之名。為君者有賢知之名,有賞罰之實。名實俱至,故福善必聞矣。

(韓非子)


“민의 성향은 생의 실질에 있고, 생의 명예에 있다.

군주가 된 자는 현명함과 지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상벌이라는 실질을 지닌다.

명과 실이 함께 갖춰졌으므로, 

修福積善

즉 공덕이 높다는 평판을 듣게 된다.”


定名實,明賞罰,樂萬民

(六韜)


“명실이 바로 정해지고,

상벌이 명확하면,

백성들은 안락하다.“


이 말을 나는 몇 차례 되뇌어본다.

명실을 함께 아우르지 못하고,

이름만 추구하게 되면,

상벌이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즉, 바른 이에게 상이 가지 않고 그른 자에게 돌아가며,

그른 자에게 줄 벌이, 바른 이에게 가해진다.

이러고서야 어찌 백성이 편안하리.


이 사태를 두고 난이라 한다.


謂彼而彼不唯乎彼,則彼謂不行;謂此而此不唯乎此,則此謂不行。

其以當,不當也;不當而當,亂也。

故彼彼當乎彼,則唯乎彼,其謂行彼;此此當乎此,則唯乎此,其謂行此。

(公孫龍子)


“저 이름으로 저 사물을 불러 이르되, 저것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으면,

저 이름으로 저것을 바로 부를 수가 없으며,

또한, 이 이름으로 이 사물을 불러 이르되, 이것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으면,

이 이름으로 이것을 바로 부를 수가 없다.

그 마땅한 것으로 부당한 것을,

부당한 것으로 마땅한 것을,

이름하면(부르면) 난이 일어난다.“


이 문장은 사실은 명가(名家)의 소론인 바,

논리학적 의론을 펴는 것이로되,

이를 나는 확장하여 일상 삶의 도리에까지 확장 해석하였다.

왜 아니 그러지 못할쏜가?


修名而督實,按實而定名。名實相生,反相為情名實當則治,不當則亂。名生於實。實生於德,德生於理,理生於智,智生於當。(管子)


“이름을 닦고, 실질을 살피며,

실질을 따라 이름을 정한다.

명실이 상생하나,

이들이 어긋나면 정실에 흐른다.


명실이 맞으면 잘 다스려지고,

뻐그러지면 난이 생긴다.


명은 실질에서 생기며,

실질은 덕에서 생긴다.

덕은 이치에서 생기며,

이치는 지혜에서 생긴다.

지혜는 합당함에서 생긴다.”


名實不爽曰質。

名與實爽曰繆。

(逸周書)


“명실이 일치하는 것을 질(質)이라 하며,

명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류(繆)라 한다.”

(※ 質 : 여러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본질 정도로 새겨두련다.

     繆 : 사위(詐偽)로 풀어 두련다.)


모수가 주머니 속에 들어가지 못하여 송곳의 날카로움을 뽐낼 기회가 없었음은,

실로 불행한 사태다.

하지만 모수는 3년 동안 아무런 불평 없이 참고 견디었다.

마침 때가 왔음이니 그가 뾰족한 송곳임이 이내 밝혀졌다.


그의 공덕은 날카로운 송곳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랜 동안 인욕(忍辱)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무딘 송곳을 자진하여 주머니에 넣고자 안달을 한 것이 아니란 소리다.


여상(呂尙)은 나이 80세를 넘어 세상에 나아갔으며,

진목공(秦穆公)에게 발탁된 백리해(百里奚)는 70세,

함께 등용된 그의 의형(義兄)인 건숙(蹇叔)은 그보다 한 살 위이니,

모두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재상으로 쓰임을 받았다.


이름을 구하려 함인가?

명마라면 백락을 기다릴 것이요.

강태공(여상)이라면 서백창(西伯昌) 문왕(文王)을 고대하였을 것이며,

백리해라면 진목공으로 주군을 바꿔 갈아탈 때를 구하였으리라.


허나, 하많은 명마가 마구간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죽어 갔으며,

모수이로되 주머니를 구하지 못하고,

여상이면서도 문왕을 만나지 못하고,

백리해이면서 진목공을 찾지 못하고 죽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으리.
그러나 이 또한 명운(命運)이라 할 터.


내 저들 이름도 없이 죽어간 무덤가에 서서,

삼가 옷깃을 여미며 香一抹香 향공양을 드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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