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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상일륜월(曹溪山上一輪月)

소요유 : 2015. 12. 11. 21:37


어제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일주문을 나오는 장면을 TV로 보다.

일주문이 언뜻 눈에 띈다.

거기 주련(柱聯)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曹溪山上一輪月이라.

본디 불교에선 달은 법(法) 즉 속말로 하자면 진리를 가리킨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도 月은 부처 또는 법을 의미한다.

여기 천강에 도장을 찍는다는 말은,

부처 또는 법이 만물 도도처처에 임한다든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조계산(曹溪山)은 본디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주석하였던 뒷산의 이름이다.

조계종이란 이름도 이를 따온 것이니, 

이로 보더라도 조계종은 선(禪)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曹溪山上一輪月


이 산 위에 수레바퀴 같이 원만(圓滿)한 달이 걸려 있단 말이렷다.

그런데 거기 일주문을 막 걸어 나오고 있는 한상균이 달이란 말인가?

TV에 주련과 한상균이 겹쳐 보이고 있으니,

난 불현듯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흔히 일주문이라고 말하고들 있으나,

실은 저것은 일주문(一株門)이 아니라 굳이 이름을 둔다면 이주문(二柱門)이라 하여야 한다.

본디 일주문이란 외기둥으로 전각을 받치고 있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헌데 저것을 자세히 보면 기둥이 앞뒤로 두 개씩 세워져 있다.

절 집 앞엔 일주문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예사이니,

그 위치로 보아서는 일주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본디 제 이름에 합당한 존재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주문(二柱門)이라 불러줄 수도 없다.

본디 일주문이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하나,

외기둥이라 그 고절(孤節), 올올(兀兀)하니 품은 뜻을 나는 특히 사랑한다.

하여간 이를 특히 높여 특칭하는 바이라,

기둥 두 개라면 굳이 이름을 별칭으로 두어 새길 일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사이비(似而非)라 부를 뿐이다.


다시 돌아와 선다.

말을 잇자니 저것을 임시 일주문이라 불러둔다.

저 일주문에 걸린 글귀를 주련(柱聯)이라 한다.

이것은 대련(對聯)이라 하여 대귀로 짝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曹溪山上一輪月 외톨이로 있질 않고 필시 다른 귀가 있을 터.

하여 조사를 해보니,


以心傳心是何法

佛佛祖祖唯此傳

曹溪山上一輪月

萬古光明長不滅


이리 네 개의 기둥에 도합 4귀(四句)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터자리도 좁은 곳에 쌍 기둥도 아니고 네 개씩이나 되니,

어지간히 위세를 부렸구나 싶다.


曹溪山上一輪月은 

萬古光明長不滅와 짝을 이룬다.


조계산 꼭대기에 걸린 원만구족(圓滿具足) 만월(滿月),

만고의 광명 오래도록 멸하지 않네.


여기 만월은 달 그 자체를 가리켜도 무방하지만,

절집에선 흔히 지혜 또는 불법(佛法)을 지시한다.

그러니까 이런 지혜가 온 누리에 만고불변 빛을 뿜는단 말이 되겠다.


그런데 말이다.

저리 턱하니 폼 잡으며 글귀나 써놓으면,

지혜 광명이 온 세상을 덮치고, 

자비 복덕을 넘치도록 누릴 수 있을까?


무릇 비를 피해 처마 밑에 기어든 새도 쫓지 않는 법이거늘,

이 시대 그렇지 않아도 강퍅해진 노동자의 삶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공권력에,

저항하고, 항변하는 이들을 옷을 벗기고 몰아낼 수 있음인가?

문제는 이게 불법 시위고, 폭력 행사이냐 이전에,

불교 사찰에 들어온 이를 다루는 저들 태도에 있다.


예전 소도(蘇塗)에 스며든 범법자는 정치 권력자라도 건드릴 수 없었지 않은가?

흉악한 강도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절망을 외치다 지쳐 쫓기어 들어왔지 않은가?

“자신으로 인해 성소가 훼손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출두를 결심”

이리 발표를 하고 있지만 종단에서 감싸고 지켜주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신도회의 망동 그리고 경찰의 최후통첩과 같은 강압적 폭위(暴威)가 나타났겠음인가?


도법이란 분이 화쟁위원장을 맡고 있는가 본데,

본디 화쟁(和爭)이란 듣기 좋은 말장난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여기 있는데, 문제는 하나도 풀지 않고,

한상균을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으로 곧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절집으로 쫓겨 들어온 이가 바깥으로 나갔다 하여 화쟁위원회의 소임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법은 무거운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행여라도 절집 바깥으로 골칫덩어리를 내친 것으로 한숨을 내쉬며,

할 일을 다하였다 하여서는 아니 된다.

도법은 법정이 돌아가셨을 때 이리 말씀하셨다.


도법 스님은 법정 스님이 대중과 부대끼지 않고 멀찌막이 떨어져 살면서 당신이 본 세상이나 생각을 아름다운 글로 풀어냈기 때문에, 수행자 삶은 마치 똥오줌은 없고 아름다운 꽃과 향기만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를 대중들에게 품게 만들었다고 말씀을 잇는다. “대중들은 수행자란 추한 똥도 역한 똥냄새도 없이 아름답고 향기롭기를 바랍니다. 법정 스님은 그렇게 사셨어요. 글에 드러나는 모습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법정 스님만이 진짜 스님이야. 고결하고 향기로워. 스님은 그래야 해’라는 환상이 만들어졌죠. 그 틀에 맞추면 다른 스님들은 너무 아닌 거죠. 그래서 실망하고 불만을 갖고 화를 내잖아요. 성철 스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오년 동안 해인사 강원과 선방에서 살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철 스님은 별로 매력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 어른이 불교를 보는 안목은 저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논리로도 수긍이 가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많아요. 다만 그 분이 깨달은 어른이고 선지식이니까 비록 제 이성과 사유로 이해되거나 수긍이 가지 않는다하더라도 제 능력으로 볼 수 없는 더 심오한 뜻이 있겠지 하는 차원에서는 모르겠지만, 승복되지 않는 점이 많아요. 그렇지만 그 분은 신화가 되셨잖아요. 세속을 멀리하고 은둔했기 때문에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 청정하다는 환상이 만들어졌고, 그 어른이 검정고무신과 누더기로 상징되어지는 무소유도 본의가 어찌되었던 대중들한테 비쳐질 때는 법정 스님처럼 고결하고 담백한 꽃으로서 출가수행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환상을 떠올리게 했죠. 그렇지만 실제 삶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 어른들도 밥도 먹고 옷도 입고 불도 때고 사셨잖아요. 성철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사셨고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 사시다가 길상사에도 계셨는데, 해인사, 송광사, 길상사 이 절들이 돌아가니까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삶이 가능했죠. 그러면 백련암이나 불일암이 돌아가도록 하는 힘은 뭐겠어요? 들여다보면 돈 백 원 벌려고 땡볕에서 땀 흘리고 추위에 떨고, 이른 새벽에서 늦은 저녁까지 사하촌(寺下村) 거리에서 나무 팔고 감자 판돈이 들어와서 절이 운영된다는 말이에요. 또 절을 운영하려고 기복(祈福)이나 상업 수완을 끌어들이잖아요. 이곳을 저는 혼탁한 연못이라고 봅니다. 이 바탕에서 길상사도 돌아가고 불일암도 돌아가고 해인사도 돌아가고 백련암도 돌아가잖아요. 과연 그 분들 고결함과 향기로움이 혼탁함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현실은 모든 영광은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한테 가고 모든 비난은 상업화되고 기복으로 몰고 가는 절을 운영하는 사람들한테만 쏟아지잖아요.” 침대에 사람을 맞춘답시고 팔다리를 잘라내는 테세우스 침대처럼, 누구라도 환상으로 만들어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멋대로 재단하고 도리질을 치는 세태를 꼬집는다. 똥냄새 없이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고 향기가 풍겨날 수 없는데, 똥냄새 없이도 꽃이 피고 향내가 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지면 결국 실제 삶이 왜곡되고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판 없는 존경은 맹종일 수밖에 없고, 또 존경 없는 비판은 비난과 매도가 될 위험성이 높아 냉철한 비판과 진지한 존경이 늘 함께 가야만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이다.

(출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978 )


세인의 상찬을 받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면에서 고단한 현실을 부담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이젠 지리산을 떠나 도심 한가운데 들어,

자승 밑에 들어 때론 그를 비호하고, 

이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곤 한다.


民有三患:飢者不得食,寒者不得衣,勞者不得息,三者民之巨患也。然即當為之撞巨鍾、擊鳴鼓、彈琴瑟、吹竽笙而揚幹戚,民衣食之財將安可得乎? (墨子, 非樂上)


“백성에겐 세 가지 우환이 있다.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입지 못하고,

일한 자가 쉬지를 못한다.

이 세 가지는 백성들의 커다란 병이다.

그러한즉 (권력자가) 큰 종을 쳐대고,

북을 울리고, 거문고를 뜯고, 피리를 불며, 춤을 춘다면,

백성들의 먹고 마시는 재화는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큰 종, 북, 거문고 따위는 모두 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부담시켜 만든 것이며, 이를 가지고 질펀하게 놀고 즐긴다.


그날 한상균 위원장이 머리에 두른 띠엔 ‘비정규직 철폐’란 구호가 적혀 있었다.

저 띠를 보자 종소리가 들리고, 젓대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이 소리는 바로 노동자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든가?

특히 이 땅의 비정규직들은 정규직에 비해 일은 곱으로 많이 하고서도,

월급은 반 이하로 받고 있다.

어찌 이것이 묵자가 2,400여 년 전에 지적한,

바로 그 권력자들, 기득권자들의 종소리, 젓대 소리가 아니겠음인가?


오늘날 이 땅의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35% 내외이다.

그런데 시간제, 기간제, 비정형근로 따위의 유사 비정규직을 보태면,

정규직의 1.6배를 넘고 있다.


勞者不得息


‘일하는 자가 쉬지를 못하고 있다.’


묵자는 이 이유를 권력자들이 장구치고 놀며,

저들의 고혈을 빨기 때문이라고 외친다. 


도법이 지칭한 불덩어리 한상균.

그 역시 저 종소리, 북소리를 향해 불을 토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저이를 쫓아내고 있는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


도법은 한 때 지리산에서 결사체를 만들어,

소외된 사람을 위해 절규하고,

유린당하고 있는 자연을 아파하지 않았던가?

그런 분이 도시 한 복판에 와서,

번지르한 말품만을 팔아서야, 

중하디 중한 시줏밥의 무게를 어찌 감당하려 함인가?


비정규직 철폐(非正規職 撤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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