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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어물(感於物)

소요유 : 2015. 12. 17. 19:57


내가 오늘 아침 길을 나서는데, FM 라디오에서 해피 바이러스 운운하더라.

진행자가 그런 것이라면 그것에 감염되고 싶다고 맞장구를 친다.


A virus is a small infectious agent that replicates only inside the living cells of other organisms. Viruses can infect all types of life forms, from animals and plants to microorganisms, including bacteria and archaea.


바이러스는 유기체의 살아있는 세포 내에서 자기 복제를 하는 작은 전염성 병원체이다.

본디 바이러스란 단어는 라틴어의 virus에서 유래한 말로 독(毒, poison)을 뜻한다.

이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갖지 않으므로 숙주의 효소를 이용한다.

이리 남의 것을 빌어 제 욕심을 만족 시키는 녀석이구나.

아주 흉측한 짓이다.


해피 바이러스라 할 때, 이는 바이러스의 증식력에 주목하여,

이에 빗대어 행복감(幸福感)을 사람 사이에 널리 퍼지게 하는 행위, 상태를 지칭한 것이리라.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조어(造語) 태도는 문제가 사뭇 크다고 생각한다.


해피와 바이러스는 본질 상 서로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대상이 아니 된다.

비록 그 취하고자 하는 현실 기능이라든가, 원망(願望) 기능이 유사하다한들,

이것이 본질 한계를 넘어 사물을 규정할 만한 시급성 또는 중대성을 갖고 있지 않다.


행복과 독 또는 병원체가 함께 자리할 수 있는가?

독, 아니 이제 이해를 쉽게 하게 흔히 쓰는 독버섯으로 바꿔놓고 보자.


‘행복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다.’


당장 이렇게 두고 보면 이런 말은 터무니없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장마철 독버섯도 바이러스처럼 마구 퍼져나가는데,

이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전자는 숲에서 퍼져 나가지만,

바이러스 독은 생체 안에서 퍼져 나간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숲을 위험하게 만들고, 생명을 위협한다. 


사물에 깃든 하나의 속성을 빌기 위해, 그 본체의 본질을 외면하여도 좋은가?

감수성이 건전한 이라면 아무리 급하여도,

이런 말의 조합 앞에 서면 마음이 이내 불편해지며,

에둘러 피해갈 터이다.


欲不可從


남이 마구 쓴다 하여,

덩달아 아무 말이나 따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樂者。音之所由生也。其本在人心之感於物也。(樂記)


악이란 소리에서 생겨난 것이라,

그 근본은 사물에 느껴 일어난 사람의 마음에 있느니.


感於物而動。故形於聲。聲相應。故生變。變成方。謂之音。(樂記)


사물을 두고 느껴 움직이기 때문에, 고로 소리로 나타난다.

소리가 서로 응하기에 변화가 생긴다.

변화하여 형식을 이루니, 이를 일러 음이라 한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한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물을 접하여 감동이 일고 이를 밖으로 말로 표출하게 될 터이다.

헌데 말이란 방(方) 나는 이를 일시 형식이라 풀이 하였지만,

문(文)이라 하여도 좋다. 

즉 變成文이니 변화하면 표현 형식에 얹혀 표출이 되니,

이를 일러 말이라 부른들 무슨 차이가 있겠음인가?


그러함이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함은,

곧 사물에 즉응하여 그 느낌이 바로 일지 못하는 소이라 하겠다.


대야 냉면이란 무지막지한 말을 들어 보았는가?

이게 무엇인가 물었더니,

어느 음식점에서 냉면을 커다란 대야에 넣고 내놓는다 한다.

그래서 대야 냉면이란다.

맛은 몰라도 양이 많은 것을 으뜸 가치로 내세운 것이리라.


그런데 대야(大匜)란 무엇인가?


古代一種盛水洗手的用具。

古代一種盛酒的器具。


고대에 물을 담아 쓰던 세수 용구.

고대에 술을 담는 기구.


우리나라에선 대야라 하면 대개는 세숫대야를 지칭한다. (盥器)

요즘은 정취(情趣)어린 것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것 역시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아침에 일어나 세숫대야에다 낯을 씻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함인데 먹는 음식을 대야에 담을 수 있겠음이며,

설혹 대야가 아닌 음식 그릇이라 한들,

그 이름을 빌어 어찌 제가 만든 음식 이름으로 삼을 수 있는가? 


내게 대야 냉면이란 말을 처음으로 알려준 이에게 나는 이리 말해주었다.


‘제 아무리 맛이 뛰어나다한들 나는 저것을 차마 먹을 수 없겠다.’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대야 냉면이란 말 앞에 서면 저게 차마 견딜 수 없는 심한 처사임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내가 언젠가 말한 ‘수구문 국밥집’ 역시 매한가지다.

(※ 참고 글 : ☞ 2014/10/14 - [소요유] - 개구멍)

시체가 나가는 문 즉 시구문(屍口門->수구문) 옆에 국밥집이 명호(名號)가 났다한들,

이를 빌어 음식점 옥호로 삼는 무신경은 도대체 무슨 배짱에서 기인함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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