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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如是我聞)과 타설(他說)

소요유 : 2016. 1. 21. 19:18


여시아문(如是我聞)과 타설(他說)


내가 아침마다 차 안에서 듣는 FM 라디오.

거기 ‘그가 말했다.(他說)’라는 토막 프로그램이 있다.

저들은 어떤 이가 한 말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가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으면,

불경에 등장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과 대비되며,

묘한 상념에 젖어든다. 


나는 여시아문이란 말을 학교에서 처음 들었다.

당시 나는 전공외 몇몇 과목을 도강(盜講)하곤 하였는데,

때론 전공과목과 강의 시간이 겹치면, 

전공과목을 빼먹으면서도 열심히 도둑 강의를 들었다.

동국대에서 여러 교수님이 우리 학교로 외부 출강을 하여 강의를 해주셨는데,

여시아문은 김용정 교수님으로부터 처음 배웠다.

칠판에 如是我聞이라 적으며 그 유래를 일러주시는데,

엄숙한 가운데 적지 아니 감동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阿難!如汝所問,如來滅後,結集法藏,

一切經初,安何等語者?阿難!如來滅後,

結集法藏,一切經初,當安『如是我聞:

一時佛住某方、某處,與諸四眾,而說是經。

(大般涅槃經後分卷上)


“아난아!, 

네가 들은 바와 같이, 

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불경을 결집할 때,

일체의 경 앞에 어떤 말을 둘 것인가?

아난아!,

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불경을 결집할 때,

일체의 경 앞에 마땅히 이리 시작하여야 하느니라.

‘내가 이와 같이 들었으니,

어느 때에 부처께서 어느 방향, 어느 곳에, 4부 대중과 더불어,

이 경을 설하셨다.’”


불멸후(佛滅後) 왕사성(王舍城)에서 제1차 불경 결집 모임이 있었다.

아난(阿難)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다.

그는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법구경(法句經) 등의 경전을 암송해내었다.

하지만 아난은 아직 깨우침이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대중은 그를 믿질 못하였다.

때문에 세존은 입멸전 아난에게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4자를 경전 앞에 두어,

대중의 의심을 그치게 예비하셨던 것이다.


기실, 여시아문은 부처가 열반 전엔 아난이 물었던 4 가지 문제 중의 하나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여시(如是)는 법(法)을 지시한다.

여기서 법이란 부처의 교설 내지는 불교적 진리를 가리킨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이와 같이(如是) 부처의 가르침을 내가 들었다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니고 부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암송해내고 있다.

하니 이는 믿을 만하게 된다.

이는 곧 부처로부터 직접 인가(印可) 받은 말이니,

고칠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가령 ‘내가 말했다’라든가 ‘그가 말했다’는 주체적 화법은,

주체의 주장에 머무를 뿐,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하지만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간접화법은 화자의 주장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를 외부로 돌리고 있으니 겸양의 문법이자, 신뢰의 문법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미 입멸 전에 부처가 아난에게 경전 초두(初頭)에,

여시아문(如是我聞)란 4 자를 넣고 시작하라고 지시를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를 교주로 하는 불교인 바,

부처의 권위에 의지하는 즉,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인도 논리학 즉 인명학(因明學)의 전통에 의지할 때,

성인(聖人)의 말씀도 추론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므로,

여시아문이라 이르면 대중의 의심을 파(罷)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

가령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있는,

能成立法有八種者。一立宗。二辯因。三引喻。四同類。五異類。六現量。七比量。八正教量。

이 중 正教量이 이에 당(當)한다 하겠다.

(※ 至教量 : 三量之一,又曰聖教量,正教量,聲量。以聖教之至言量邪正也。

   ‘지교량 : 삼량의 하나. 또한 성교량, 정교량, 성량이라 한다.

    성인의 가르침, 그 지극한 말씀이라 삿됨과 그릇됨을 잰다(헤아린다).’)

(※ 正教量者。謂一切智所說言教。

   或從彼聞。或隨彼法。此復三種。一不違聖言。二能治雜染。三不違法相。

   不違聖言者。謂聖弟子說。或佛自說經教。展轉流布。至今不違正法。不違正義。

   (瑜伽師地論))


그가 말했다.(他說)는 그 언명이 아무리 절실하고, 강력하다한들, 正教量이 될 수 없다.

개별 인격의 주장 하나에 머무를 뿐이다.

혹간 일시적 감동을 생산해낼 수는 있지만,

진리 담지를 보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판적 평가와 선별적 수용이 따르지 않으면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럼 4 가지 문제란 무엇인가?

차제에 잠깐 알아보고 간다.

부처가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아난은 머리가 아찔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아난은 냉정을 찾고 부처에게 4 가지 질문을 드리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1. 불경 결집 시, 경전 초두에 넣을 대표 글자?

2. 불멸후 의지해야 할 것?

3. 불 재세 시 부처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불멸후엔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는가?

4. 악성(惡性) 비구를 어찌 대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 부처는 이리 답을 내리셨다.


1. 경전 초두에 여시아문 4 글자를 앞세운다.

2.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한다.

  身,觀身不淨。

  受,觀受是苦。

  心,觀心無常。

  法,觀法無我。

3. 불멸 후 스승으로 삼을 것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이는 곧 계율에 해당됨.

4. 악성 비구에 대한 처리

   침묵으로 물리침.

   즉 무시하고 상대해주지 않는다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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