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유감
스토리텔링 유감
스토리텔링이란 것을 나는 농민대학에서 접하고는 여러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내 감상을 좀 늘어놓고자 한다.
내가 농민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자니,
마땅히 나보다 앞선 이들의 말씀을 챙겨 듣고,
배움을 돈독히 해야 하리라.
마침 군에서 개설한 농민대학은 내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거기 각기 다른 작물을 키우는 농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외에도 두엇 프로그램을 더 신청하여 듣는다 한다.
원래 하나 밖에 등록이 아니 되는데,
이이는 무슨 재주인지 이를 무릅쓰고 모두 듣는다 한다.
이유인즉슨 이리 하여야 정부 지원을 받는데 유리하기에 이리 무리를 한다고 한다.
배움이 목표가 아니고,
가욋일에 열중하고자 함이니,
의표(儀表)가 실질을 감추는 것을 넘어,
잇속이 내용을 능욕(凌辱)하고 있다 하겠다.
이로, 과히 소인의 모습이 그로 인해 약연(躍然)함을 알겠음이다.
중이 잿밥에 눈이 팔리면,
제 뱃속을 기름으로 채울 수는 있지만,
도는 성글고, 깨우침은 멀어지니,
물에 떠내려가는 지푸라기 하나도 제도할 수 없게 된다.
과연,
듣건대,
저이는 농장을 팔려고 내놓았다 한다.
나는 마켓팅 분야를 깊게 배운 이가 아니다.
헌데 어느 강사 하나가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를 집중 강의하였다.
이 분 말씀을 따르자니 전국 농가, 농민 관련 현장을 주르르 꿰고 있으니,
그 깊이와 너비에 제법 공을 많이 들인 양 싶더라.
전국을 통틀어 주어 섬기는 그의 말씀은 실로 대단하였으니,
동서를 철(徹)하여 아우르고,
남북이 막혔음을 서러워할 일이었다.
헌데 나는 그의 말이 늘어지자 몽긋하니 한 의심의 연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스토리란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술 또는 연행(演行)된 서사(敍事)를 말한다.
구성(plot)처럼 인과 관계를 엄히 따르지 않고 사건을 서술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런데 오늘날 농업에서 말하는 스토리텔링에서는,
단순한 사건 서술을 넘어, 허구적 구성도 불사(不辭)하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나는 일으키게 되었다.
강사의 말을 들으면서 저들은 스토리를 텔링하면서,
듣는 이를 너무 심하게 의식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스토리텔링이라면,
무엇보다 화자(話者)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듣는 이를 위해,
이야기를 꾸려나가려 작정하게 되면,
여러 무리가 따르게 된다.
전자는 진실(眞實), 진정(眞情)을 고백하는데 힘을 내지만,
후자는 과장(誇張), 허구(虛構)도 불사하며,
본업인 농사가 아니라,
가욋일에 용을 쓰게 된다.
허구를 기반으로 하는 소설이라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독자를 과도히 의식하게 되면,
유의미한 주제의식을 잃고,
탄탄한 플롯 전개를 하기 어렵다.
다만 인기에 영합하고,
표피적 자극과 천박한 흥미 위주로 판을 몰아가게 된다.
스토리텔링이든 소설이든,
이쯤 되면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고,
그저 상품 판매를 위한 홍보 매개 수단이 되고 만다.
이를 나는 스토리쇼잉(storyshowing)이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영상매체를 통해, 또는 행위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양식을 두고, 이리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이야기 발출자나 매개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서 telling의 주체가 제각된,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데,
급기야, showing이 관객내지는 소비자를 향해,
이야기나 쑈가 소비되길 꾀하는,
그 목적 지향적인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본업인 농사는 사라지고,
거기엔 애오라지 ‘소비(/판매)’만 의식되고 있다.
물론 농사를 지었다면 자가 소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닌 한,
유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통되어 소비자에게 건네지기 위한 농산물이 먼저 산출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제대로 감당하기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고,
이어 유통도 하여야 하고, 가공도 하여야 하고,
때론 체험이니 관광, 숙박 서비스 등으로 소비자를 유인할 판을 만들려고 한다면,
여간 비상한 재주와 노력이 없으면 감당키 어렵다.
소위 요즘 언필칭 떠드는 6차 산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어떤 이가 하나 있어, 이리 말한다.
나는 농사를 두 가지 짓는다.
낮엔 밭에서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인터넷에 매달려,
카페, 카페, sns 매체를 통해,
농장을 알리기 위해 부심한다.
그런데,
그이를 잘 관찰하면,
그는 농사짓기보다는,
밤일에 더 열중하는 양 싶다.
낮에도 일은 별로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맡기고 나돌기 바쁘다.
이 사람은 농사를 가족이 돕기에,
별 탈이 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알고 있는 또 다른 어떤 이의 경우는 어떠한가?
크지도 않은 개인 농장인데도,
남에게 농사일을 맡기고,
종일 sns에 매달리다시피 한다.
케이블 TV에 방송을 올리고,
블로그 관리 업체에 관리를 위임하기도 한다.
이 모두 돈을 주면 다 해결은 된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실상을 한참 벗어나,
엉터리 내용으로 채워지곤 한다.
이 경우를 지켜보고 있으면,
앞에서 언급한 스토리쇼잉(storyshowing)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거긴 텔링은 사라지고,
스토리를 들으라며 강매하는 행위만 덩그란히 남아있다.
이를 나는 스토리히어링(storyhearing)이라 부른다.
실제 그의 농장을 보면,
sns에서 선전되는 것과는 딴 판으로,
숨어 갖은 험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를 거론하는 것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란 이름하에,
원질(原質)은 거세되고 꾸며진 스토리(story)가,
거리를 유령처럼 횡행함을 경계하고 싶었다.
스토리란 본업인 농업을 잘 지으면 절로 만들어질 것이다.
서양 속담에 개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말이 있다.
tail wagging the dog.
주인을 만나 반가우면 개는 꼬리를 흔든다.
하지만 꼬리를 억지로 흔든다고 집 나간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도 좋고 6차 산업도 다 좋지만,
원질인 농업을 여의면,
그것은 telling이 아니고
showing 강매이며,
hearing 강요가 된다.
게다가 그 전하는 text조차,
충실치 못하고,
때론 꾸며 메꾸고,
지어 가린 것이기 일쑤이니,
이는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 된다.
技巧華飾而傷農事,王者必禁之。
(六韜)
“기교를 부려 꾸미면, 농사를 상하게 하니,
왕자는 이를 필히 금하게 한다.“
不祥之言,幻惑良民,王者必止之。
(六韜)
“상서롭지 않은 말로 양민을 현혹시키면,
왕자는 필히 이를 그치게 한다.“
이것 강태공이 주문왕께 한 말씀인데,
오늘날 대통령이란 게 죄를 짓고 옥에 갇힐 정도인데,
강태공 아냐 강태공 고조 할아버지가 돌아와도,
이를 기다려(望) 반길 왕이 남아 있을라고?
願聞其道
주문왕은 강태공에게,
그 도 묻기를 간절히 원하였음인데,
지금은 천하 필부도 모두 조동부리 헐어 저 잘났다고 선전하기 바쁜 세상이 아니더냐?
그 누가 있어 도를 듣고자 하겠음인가?
게다가 일반인도 매한가지다.
그저 남의 스토리에 엮여,
쪼르륵 체험이니, 관광 숙박이니 하며 달려가,
인스턴트화한 형해(形骸)만 소비하고 돌아올 뿐이다.
마치 물 마시고 이 쑤시는 격이다.
그러고도 잘 먹었고, 잘 놀았다고 하니,
가여운 노릇이다.
쑈맨이 되고, 관객으로 차있다.
'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농사 이력 (0) | 2017.04.15 |
---|---|
아로니아는 대체재인가? (0) | 2017.04.14 |
안토시아닌의 열적 처리 효과 (5) | 2017.04.09 |
농사 자격 고시가 필요하다. (2) | 2017.03.28 |
파고라 (0) | 2017.03.25 |
연기 ⅱ (0) | 2017.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