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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출물

농사 : 2017. 5. 27. 15:27


내가 얼마 전에 여기 시골 동네 농부 하나를 만났다.

그는 벼농사를 짓는다.

트랙터 하나를 가지고 벼농사를 짓는데,

한 2 만평 남짓 상대를 하는 모양이다.


내 셈을 자세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규모면 좀 건지는 게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모두 근방 논을 빌린 것인데,

한 삼 년 전쯤엔 이리 농사를 짓던 이가 손을 뗀 것을 이어 받은 것이다.

필경은 전번 농사를 짓던 이는 그리 큰 수지를 맞추지는 못하였지 않았는가 싶다.


쌀값은 밑바닥 모르게 떨어지고 있다.

20kg 한 포에 26,000원 짜리도 있다.

내가 앞글에서 유박에 대하여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쌀값이 이 정도로 폭락을 하다가는 조만간 유박 값과 같아질는지도 모른다.

기름을 짜고 남은 지게미가 쌀값과 비견(比肩)된다면,

차마 말을 꺼내기도 민망스럽고도 송구스러운 짓이지만,

유박 대신 쌀을 비료로 대신 써도 될 판이다. 

아마 유박을 땅에 뿌리는 것보다,

쌀을 뿌리면 토양에 공급되는 비료학적 작용효과는 사뭇 뛰어날 것이다.

(※ 참고 글 : ☞ 유기농 유감(遺憾) 3)


그 농부와 말 거래를 트는데, 한 사춤에,

내가 제초제를 치지 않고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가 물었다.

대뜸 그리 어찌 농사를 짓는가 반문한다.

그리고는 우리 밭을 보듯이 풀로 엉망이 되지 않는가 하며 되묻는다.


아,

이리도 인식의 차이가 큰 것이다.

내가 가끔 우리 농장을 중심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나서,

집 식구에게 곧잘 말하곤 한다.


‘가근방에서 우리 밭이 제일 아름답다.’


시골 동네는 봄철엔 주택가, 산을 빼고는 모두 누렇다.

농경지에는 제초제가 살포되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늦가을 초목이 조락(凋落)한 기운이 온 들판을 죽음처럼 덮고 있다.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철이지만 봄은 아직도 오지 않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농부들은 풀을 백년 원수 대하듯 한다.

그가 트랙터를 몰고 달려가는 논엔 그야말로 풀 한포기 보이지 않기에,

그 넓은 논판은 누렇게 부황이 든 모습으로 드러누워 있다.


저러함이니 논 속엔 도대체가 양분도 남아 있지 않았을 터이고,

미생물 역시 제대로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추수 후 볏짚은 공룡알이라 부르는 곤포사일리지를 만들어 거둬가고,

풀은 모조리 제초제로 제압을 하니,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저곳에서 벼를 키우려면,

원하지 않아도 도리없이 화학비료를 투입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은 땅 속 환경에 대하여 생각할 틈도 없을뿐더러,

그럴 한가로운 생각을 할 이유도 없다.

오직 영악스럽게 짜여진 영농 과정을 쫓아가면 그 뿐인 것이다.

현대의 농업은 땅을 잃어버렸다.

아니 버렸다.


저들은 애오라지 벼에 달릴 나락 하나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벼는 나락 하나 달기 위해,

소쩍새도 울고, 천둥 번개도 치며, 비바람 치는 들판을 달려,

한 생을 꾸려 나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간다.

하지만 여기 논에 선 농부는 이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만 많은 소출을 바랄 뿐이다.


저 너른 논에 도대체가 이야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다만 트랙터 굉음만 요란할 뿐이다.


풀 한 포기도 용납을 하지 못하는 논을 보고 서있자면,

산다는 것이 너무도 서럽다.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건만,

밭에 자라는 풀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듯이 무작정 달려가고 있는 세상을 보고,

어찌 서러운 감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모진 삶들, 각박한 마음보들이 가엽지 않은가 말이다.


과연 풀은 적(敵)인가?

도시에서도 들고양이를 적(敵)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시끄럽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주변을 더럽히는 짓만 일삼으니,

모두 죽여 버려야 한다는 이도 있다.

풀 역시 농작물 재배에 해로우니,

어떻게 하든 제압해야 하다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에서 데려온 들고양이와 마주치면,

웃음이 절로 나며 녀석에게 말을 건다.

녀석은 낯가림이 심하여 아직도 곁을 완전히 내주지 않지만,

야옹 소리를 내며 화답을 한다.

녀석은 내 친구이자, 동반자이기도 하다.


풀 역시 제거하기는커녕 외려 키우고 있는 나는,

그저 허황된 관념에 빠져, 꿈속을 헤매는 이인가?

이제 좀 점검을 해보자.


모든 식물은 뿌리에서 삼출액(滲出液)을 분비한다.

영어로는 exudation이라 하는데,

나는 이런 지칭(指稱)에 대하여는 좀 유감이 있다.


ex는 알다시피 out또는 out of란 뜻이 있고,

나머지 어근은 라틴어의 sudare에서 유래하였은즉,

땀을 흘리다(to sweat)란 뜻을 갖고 있다. 

삼출액(滲出液) 역시 이와 그 뜻이 비슷하다.

즉 각 성분 글자는 ‘스미다+나오다+액’이란 뜻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식물을 두고 관찰한 바를 그저 1차원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내 의견으로는 액을 내놓는 주체는 식물이기에,

송출(送出)한다는 뜻을 드러내는 단어나,

새로 알맞은 것을 조어(造語)해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식물의 필요에 의한 능동적 행동’이란 점을 부각시키지 않으면,

사뭇 미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출액이나 exudation은 모두,

그저 식물이 액을 바깥으로 내놓는 현상을 피상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거니와,

삼출액(기존의 이 말을 잠정 사용한다)은 식물이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외계(外界)를 경영하는 과정 중에 밖으로 내보내는 중심, 중요 물질이다.


보살은 바라밀행을 닦는다.

하지만 식물은 바라밀행을 별도로 다시 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그들의 삶 자체가 바로 바라밀행이다.

삼출액은 그 바라밀행의 대표적인 하나의 체현(體現)이다.

내가 바로 앞에서 적극적 의지란 말을 썼는데,

이는 인간적 관점이지 실인즉,

의욕하지 않으면서 삶을 구현해가는 저들 순수체(純粹體)에겐,

그리 적합한 말은 아니라 하겠다.

그들은 구체적 실천행으로 나아가지,

별도의 다짐, 원망, 기획, 꾀함이 없다.

하기에 낱낱의 행이 바라밀다(波羅蜜多)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식물은 아낌없이 남에게 내주며, 

비바람, 천둥을 견디며 긴 인고의 세월을 건넌다.

삼출물을 내어 지혜롭게도 모든 미소동물과 토양을 아우르며,

상대차별이 아닌 절대무차별의 실재이다.

그 자신이 本이 되고, 根이 되어,

일체만유(一切萬有)의 태자리(胎源)가 된다.


우리 밭 언덕에 서면,

바람결에, 속싹이는 저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들린다.

저들이야말로 육바라밀을 참으로 닦는 보살들이란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식물이 뿌리를 통해 토양에 방출하는 삼출액엔 실로 다양한 성분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은 토양의 종류, 근권(根圈) 환경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Marschner, 1995),

식물은 광합성으로 고정한 탄소 성분의 5~21%를,

뿌리 삼출물을 통해 근권에 내놓는다고 한다.


사람들의 행악질을 알아야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

제초제로 모든 풀을 죽이고, 오로지 화학비료, 농약으로 키운다.

그러다 가을 추수 때는 볏짚마저 둘둘 말아 깡그리 거둬 내다 판다.

단 하나도 땅에 돌려주지 않는다.

똥구멍이 막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내놓는데 인색할 수 있겠음인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농법을 따르고 있는 농부들은 구멍이 막힌 배냇병신이 아닌가 싶다.


삼출물을 포함한 땅은 생땅에 비해 수분 함수율이 높다.

삼출물은 점액질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분을 잘 간직할 수 있다.

이른 새벽엔 한낮보다 식물 뿌리깍지에 수분 함량이 더 많다.

이는 야밤에 뿌리에서 삼출된 액이 뿌리가 토양 속으로 확장되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삼출액은 증발이 일어나면 건조해지며, 인접 토양 입자에 들러붙게 된다.

이처럼 뿌리깍지 영역은 수분 함량이 주기적으로 변하며,

주변을 통제하는 역동적 역할을 한다.


이제 양상추(lettuce)를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잠시 둘러본다.

삼출액 성분은 아미노산, 당분, 유기산, 페놀산, 요소, 인 등인데,

좀 더 자세히 나눠보면 이러하다.

글루타민산염, 글리신, 류신, 포도당, 과당, 맥아당, 자당, 

말산, 숙신산, 안식향산, 푸마르산 ....


(출처 : National Center for Biotechnology Information)


이들 성분은 토양 조건에 따라 수 십 ~ 수 백의 차이가 난다.

가령 황토일 경우 포도당, 과당의 삼출이 많아진다.

또한 가뭄 등 기후 조건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것은 역으로 뿌리의 길이나, 잔뿌리의 활성도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출물이 분비되면,

이를 이용하는 미생물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며,

토양의 생태 환경을 바꾸게 된다는 점이다.

처음엔 세균, 균류가 등장하고,

이어서 선형동물, 원형동물들이 이들을 먹이로 하여 뒤따른다.

다시 이들을 노리는 절지동물들이 나타나게 된다.


식물은 거꾸로 이들이 활동한 결과의 혜택을 본다.

가령 저들이 유기물을 분해하여 식물이 흡수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며,

토양 물성을 식물 생육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킨다.


식물은 root-root, root-microbe, root-insect

즉  뿌리와 뿌리, 뿌리와 미생물, 뿌리와 벌레 간,

삼출물을 통해 모종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삼출물은 이 때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출처 : Root Exudation and Rhizosphere Biology)


밭에 다양한 식생이 존재하면 할수록,

이에 따라 다양한 삼출물이 더욱 더 풍성해진다.

오늘날의 상업적 영농 행위는 대개는 단일종 위주로 짜여져 있다.

예전의 사이짓기(間作), 돌려짓기(輪作), 섞어짓기(混作)는 거의 사라졌다.

화학비료가 등장하자,

이들의 강력한 비효(肥效)를 믿고,

농부는 더 이상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농약, 제초제가 곁에 있기에,

풀을 원수 보듯하는 농부들은,

밭에서 자신이 재배하는 단일종의 작물 외엔,

모두 몰아내고 만다.


아까 서두에 지적하였듯이,

여기 농부들은 풀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애오라지 비료에만 의지하여,

속성(速成), 성력(省力)의 벼농사를 짓는다.


그러함이니,

저 논 속에 삼출물이라야 벼 자신이 내놓은 것밖에 없다.

만약 거기 다양한 식생이 있다면,

실로 셈할 수 없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삼출물이 나올 것이며,

이에 따라 다양한 미소동물들이 제 생을 제 품성대로 구가(謳歌)할 것이다.

작금의 대부분 벼농사에선 이게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런 토양 환경에서 자란 벼는,

애오라지 농부들이 공급한 비료에만 의지한다.

주요 성분인 N, P, K 외 다양한 요소 성분들은,

매년 수탈 농법에 의해 고갈되어 간다.


오늘날, 현대식 축산업이란  미명 하에

좁은 울에 갇혀 평생 신음만 하다 가는 동물들과 단 한 점, 일 획의 차이도 없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화학 성분은,

70~80 가지가 넘는다.

도대체가 저런 작법 체계로 만들어진 쌀로써,

이런 유기체를 바르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킬 수 있겠음인가?


때문에 나는 외친다.

쌀은 비싼(귀한) 것을 사먹어야 한다.

유기농도 좋지만,

그보다 더욱 좋은 것은,

제초 작업을 덜 하여,

잡초가 많이 자라는 논에서 자란 건강한 쌀을 사먹어야 한다.

제초제를 사용하여,

이를 쫓아낸 논에서 자란 쌀들은,

허우대만 그럴 듯하니 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상 내막을 알고 보면 헛것, 헛쌀인 것이다.


요즘 쌀값은 더 이상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싸다.

그러함이니 비싼 것을 사먹는다한들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이리 되면 가족 건강을 지킬 수도 있지만,

농부들이 보다 친환경적인 농사를 지을 동기를 일으키는 계기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대자연의 道에 귀의하는 귀한 인연을 지을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블루베리를 짓는다는 핑계로,

전 밭을 블루베리 일색으로 식재를 하였다.

이것 바람직하지 않다.

이럴수록 밭에 다양한 풀이 많이 자라도록 하여야 한다.


나는 지금 환삼덩굴, 메꽃, 쑥 따위를 하대하여 다루는데,

이들은 블루베리나, 사람들을 좀 괴롭힌다.

해서 이들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문득 든 생각은 저들을 쫓아낸 만큼 다른 식생을 일궈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선 우리 밭의 식생 총상(叢狀)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풍부하게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가령 토끼풀, 호밀, 헤어리비치, 귀리 따위의,

단일종 잡초 제압 식물을 키우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런 작태는 기실 잡초를 없애자는 데 그 뜻이 있은즉,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기본 태도가 바르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夫馬,陸居則食草飲水,喜則交頸相靡,怒則分背相踶。馬知已此矣。夫加之以衡扼,齊之以月題,而馬知介倪、闉扼、鷙曼、詭銜、竊轡。故馬之知而態至盜者,伯樂之罪也。夫赫胥氏之時,民居不知所為,行不知所之,含哺而熙,鼓腹而遊,民能以此矣。及至聖人,屈折禮樂以匡天下之形,縣跂仁義以慰天下之心,而民乃始踶跂好知,爭歸於利,不可止也。此亦聖人之過也。

(莊子 馬蹄)


“무릇 말은 육지에서 살며 풀을 먹고 물을 먹는다.

기쁠 때는 서로 목을 비비고,

노할 때는 서로 나눠 등을 대고는 발로 찬다.

말은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굴레를 눌러 씌우고, 

이마에 달같이 둥근 쇠자박을 얹으니,

말은 이게 괴상한 것을 안다.


굴레를 쳐내고, 쇠자박을 흔들어 떨쳐내며, 자갈을 뱉어버리고, 고삐를 벗어내려 한다.

이리 말은 그 하는 짓이 도둑과 같이 된다.

이는 백락(伯樂, 말의 명인)의 죄라 하겠다.


무릇, 혁서씨(赫胥氏) 때에는,

백성들이 집에 거하면서,

무엇을 특별히 하거나, 어디 나다닐 바를 아지 못하였다.

밥을 배불리 먹고, 기뻐하면서, 배를 두드리며 놀 뿐이었다.

백성들은 이리 자연스럽게 살았다.


성인이 생겨,

예악으로 허리를 굽혀 절하게 되어,

천하의 꼴을 갖춰 나가게 되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인의로 미끼를 내걸었다.


이에 백성들은 지식을 좋아하고,

이익을 탐내어 이를 그칠 줄 몰랐다.

이 역시 성인의 허물이다.”


일득일실(一得一失)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백락이 말에게 고삐를 씌우고 재갈을 물려 말을 부릴 수 있게 되었으나,

말들은 평생 저것에 갇혀 슬픔과 분노 속에서 살아간다.


하버-보쉬(Haber-Bosch) 공법에 의해 질소가 공업적으로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두엄을 더 이상 내지 않게 되었다.

공업적으로 고정된 질소에 의지하면 농사를 편하게 지을 수 있으며,

소출을 많이 보아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오늘날 이 땅의 농민들은 가장 살림살이가 어려운 축에 속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 때문인가, IT산업 때문인가?

나는 이 모두가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농부 스스로 천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귀한 농사를 지으면,

주위 사람들이 귀히 대하게 되어 있다.

지금처럼 마구잡이, 엉터리로 농사를 짓는 한,

결코 농부가 대접 받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자존심을 가질 일이다.


논뿐인가?

밭 역시 하나도 다르지 않다.

풀을 원수 대하듯 하며,

태반은 비료와 농약, 제초제에 의지하여 농사를 짓는다.

모든 이들이 이리 쫓아가니,

농산물 소출량은 비록 더 늘어났다한들, 

공급과잉, 가격 하락으로 농부 소득엔 별반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귀하게 작물을 대하면,

작물도 귀하게 자라며,

덩달아 값도 오르게 되어 있다.

많이 생산하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비록 적게 소출을 보더라도,

귀하고, 건강한 작물을 키워야 한다.


나의 경우 풀을 키우며, 블루베리를 기른다 하여,

소출이 적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소출이 많은가, 적은가에 매어있지 않다.

다만 내가 바른 길을 가는가?

이런 물음에 의지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어려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이 길을 따르면,

마음이 한가하고,

몸도 수고롭지 않다.


다시 되돌아와,

한편, 비료, 농약 비용을 부담하여야 하니,

농민들은 비료, 농약 회사들의 봉 노릇을 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토양이 파괴되어,

유효 미생물은 설 자리를 잃고 구축(驅逐)되고 말았다.

거기 자라는 작물 역시 저 말처럼 마지못해 살아갈 뿐이다.

다만 허장성세(虛張聲勢)라,

거죽만 그럴 듯한 농작물 아니 상품만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건강을 염려한다면,

비싼 쌀을 먹어야 한다.


슬픔과 분노가 아니라,

자연스런 제 품성대로 생을 구가하는 이들.

이로부터 기원하는 축산물, 농산물을 취하려면,

풀과 함께 마음껏 뛰놀고, 자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


***


첨언)


- 멀칭 -


블루베리의 경우 멀칭 효과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고 있다.

대개는 멀칭을 하면 생육이 활발하다고 보고되고 있다.

멀칭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우드칩 또는 다른 물질 단일물 일변도의 멀칭에 대하여,

경계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게 대개는 단순히 유기물 공급이라든가, 제초 효과 따위에 주목하여,

논의가 진행되지만 삼출물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밭에 다양한 풀들이 자라면 삼출물이 덩달아 풍부해진다.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결코 풀들을 원수로 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울러 단일물 위주의 멀칭에 대한 맹신을 좀 덜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런 효과를 처음엔 알지 못하였고,

이를 노리고자 하는 뜻도 애시당초 없었다.

다만 농부가 된다면 나는 풀을 적대시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 하였음이니,

실제 농부가 되자 이를 따랐다.


- 을밀農哲 -


을밀농철은 거죽 속에 숨겨진 비밀스런 근원을 탐구한다.

풀은 원래부터 땅의 임자이다.

인위로 이들을 내쫓고,

인간 위주로 판을 짜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게다가 참람스런 짓이란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을밀이란 농부는, 

겸허히,

땅 그리고 식물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풀의 삼출물 효과를 알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작년과 재작년 우리 밭은 풀이 키를 넘겨 자라며,

블루베리를 덮어버렸다.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지만,

올해 이는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어느 해보다 알이 충실하고, 결실도 잘 이뤄졌다.


나는 곰곰이 그 원인을 생각해보다,

풀들의 삼출물에 미쳤다.

이에 이리 정리해두는 바이다.


혹 또 다른 이치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이 또한 저들의 공덕인 바라, 나의 우둔함을 자책할 뿐이다.

나의 미치지 못함을 저들은 알고 있음이다.

나는 이제 밭에 나가 우리 풀들을 만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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