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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reductionism)

농사 : 2018.09.28 13:52


환원주의(reductionism)


현대 사회는 환원주의가 의식하든 아니든, 널리 퍼져 있다.

환원주의는 한자로 還元主義라 쓴다.


元은 근본이란 뜻을 갖는다.

元者、氣之始也。

원은 기의 시초라 했다.


그런즉, 환원이란 復返이라,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드러난 현상은 근원이 있고, 실체가 있을 터이고,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역으로, 관찰한 경험적 사실을 결합하면,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 또는 그것이 곧 실체다.

환원주의는 이런 사고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Justus Freiherr von Liebig(1803~1873)는,

식물이 공기로부터 얻는 이산화탄소와 뿌리로부터 얻는 질소 화합물과 미네랄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을 알아냈고, 그로부터 질소 비료를 개발하였다.

그 전까지는 부식토(腐植土, humus)가 식물 생장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허나, 이제 이것은 필요없고,

질소만 잘 공급하면 식물이 잘 자란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리 전체를 부분 요소의 합으로 나눠 보는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는,

얼핏 복잡다기한 사물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매력적이다.

또한 이런 사고 방식은 현대농법에 깊이 뿌리 박힌 생각의 기초가 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리 요소 분해한 것의 화(和)로 전체를 재구(再構)하는 것이 옳은가?

N, P, K

질소, 인산, 칼륨

비료의 삼대 요소.

식물은 이 삼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렇다면, 이를 많이 공급하면 식물이 잘 자라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를 기초로 이 삼자가 바탕이 된 비료가 개발되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밭엔 풀도 몰아내고, 두엄도 넣지 않게 되었다.

애오라지 N, P, K를 주재로 한 비료만 쳐넣어지게 되었다.

이게 현대 농법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여러 부작용이 생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병충해가 들끓게 되었다.


내가 여기 시골에서 나이 많이 드신 농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 농약도 없었을 텐데, 어찌 농사를 지었는가?’

이리 질문을 하니, 당장 이런 말씀이 되돌아왔다.

‘그 때는 지금처럼 병충해가 많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비료에 의지한 결과다.

하지만, 이제 뒤로 되돌아가기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비료를 넣지 않게 되면, 소출이 격감하기 때문이다.

대신 병충해를 제어할 수 있는 농약을 투입하면 된다.

인간 세상엔 문제가 생기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이 뒤이어 개발된다.

간교한 인지(人智)의 발휘는 결코 쉼이 없다.

현대에 들어와 부쩍 창궐하는 병충해, 이것 수작업으로 일일이 대처할 수 없다.

헌즉, 농약에 의지 하지 않는 현대농법은 더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현대농업은 대량, 대익(大益)을 목표로 하기에,

대농 위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골목 상권만 재벌들이 접수하는지 아는가?

농토도 정책적으로 대농 위주로 판을 짜도록 기획되고 있다.

헌즉, 그런 대단위 농장에서,

비싼 노동력을 투입하여, 손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비료, 농약 등 약제에 의지한 농법을 벗어날 수 없다.


최근 스마트팜이니 뭐니 하여 떠들고 있지만,

이것은 자본과 자원을 고도로 투입하여야 가능하다.

양액재배(nutriculture), 수경재배(hydroponics), aquaponics 농법도 그 중 하나이다.

이것 공통적으로 흙 없이 식물을 재배한다.

마치 동물을 똥이 아래로 떨어지게 바닥을 철그물로 만들고,

좁은 상자 즉 소위 뜬장 안에 가둬 사육하는 것과 같다.

이 농법들은 모두 식물을 물 속에 넣어, 필요한 양액만 공급하는 방식이다.

(때론 황토볼을 쓰기도 하나, 이는 그저 뿌리 지지 역할을 할 뿐이다.)

전형적인 환원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법이다.

천박할뿐더러 사악한 농법이다.


저들은 말한다.


친환경이다.

깨끗하다.

게다가 저것을 들어 유기농이라 주장하는 이도 나타나고 있다.


하기사 aquaponics 이것은 물고기 배설물을 이용하니,

유기질 비료 성분이 공급된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말인즉 유기농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유기농이라 할 때,

단순히 유기질 비료를 사용한다 하여 그리 부르는 것인가?

거긴 일정분 기존 화학비료에 의지한 농법에 대한 반성이 있고,

식물이란 생명체에 대한 존중 사상이 미약하나마 깔려 있다.


하지만, 흙도 없이 키우면서,

이를 어찌 유기농이란 이름을 빌어 자신을 거짓으로 꾸며 참칭할 수 있단 말인가?

참람스럽다.

물론 나는 유기농에 대하여도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유기농도 본질적으로는 관행농과 

그 작법 태도, 그 농부가 지닌 철학이 엇비슷하다는 것을,

나는 목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전에 여러 번 논한 적이 있다.



aquaponics 농법을 처음 대하는 이는,

모두 입을 벌리며 찬탄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내막을 알게 되면,

마냥 그리 놀랄 수만은 없으리라.


우선은 저 물고기 배설물이 흙 속에서처럼 미생물 분해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식물에게 공급되면 흡수도 어렵지만, 분독, 뇨독에 그냥 노출되는 위험이 있다.

물고기 역시 순환수에 변, 뇨 등의 미분해 단백질이 여전히 잔류해있기에,

해를 입게 된다.

요는 순환 path가 너무 짧기 때문에,

물고기, 식물 모두가 건강한 생태환경 속에 놓여 있지 못하다.

이는 마치 뜬장에 갇히 동물과 매한가지라 하겠다.


path를 길게 하여,

예컨대 중간에 분해조(分解槽)를 두어,

충분히 미생물 분해가 일어나도록 하는 채비를 한다면 좀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 되면 비용도 많이 들고, 

좁은 실내에 설치하기도 여의치 않다.

게다가 썩는 냄새가 필연적으로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는 채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거죽만 멀끔한 저 모습에 속아 넘어가서는 아니 된다.

저것은 그저 일시 사람을 속이는 자기만족적 취미, 놀이 정도로 보아주어야 하지,

저기서 건강한 농산물이 산출되리란 기대를 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저 시스템에 묶인 식물도, 동물도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다.


나는 무엇보다 식물이 흙도 없이 살아간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설혹 어떠한 가치 획득이 있다 하여도,

결코 저 따위 사악한 농법에 찬동할 수 없다.


흥분하다 보니 곁길로 샜다.

나는 기실 환원주의가 엉터리인 것을 말하고 싶었다.


현대농법은 환원주의 치고도, 물리적 환원주의라,

일말의 관념, 정신적 가치에 대한 고려도 거세되어 있다.

모든 것을 전부 물질적 기초 하에 쳐다보고,

물질적 해석으로 이해(利害)를 가늠하며, 

욕심껏 미래를 도모한다.

아주 천박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감히 비교하기 송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나,

적당한 예를 찾기 힘들어, 부득불 아래 가상 예를 하나 들어본다. 

김구 선생님은 용서하시라.


김구와 이완용


이 양자를 물질적 구성 요소로 환원해보자.

염통, 허파, 위, 창자 ...

모두 매한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뿐인가?

화학적으로는 모두 산소 65.0%, 탄소 18.5%, 수소 9.5% ...로 조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그럼 거꾸로 이 구성 성분을 가지고 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설혹 있다 하여도 모두가 김구 선생님이 되는가?


환원주의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환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이런 지점이다.


N, P, K 그밖의 Ca, Mg, S ...

그 어떤 원소로 분해를 하든 식물은 그 해석을 뛰어넘는 존재이다.


환원주의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너무 쉽고 편하다. 

자칫 이 때에 세상이 그러하게 만들어져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이것 대단히 위험하다.

환원주의가 아니라도,

그 어떠한 창(windows), 틀(frames)을 통해 세상을 볼 때,

그게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내가 자연농법을 하는 이유는,

그 어떠한 농법이든, 창(windows), 틀(frames)에 갇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즉 기실, 자연농법이라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름의 본성을 거슬리게 된다.


내가 을밀농철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취의지만, 사실 을밀농철이라 이름 부르는 순간,

이 또한 내가 가는 길을 고정시켜버리는 즉, 바르다 할 수 없다.

다만, 말을 하자니 도리없이 일시 손아귀에 쥐고자,

이리 칭할 뿐이다.


吾不知其名,字之曰道


그 이름을 아지 못할쎄라,

그런즉 그저 道라 이를 뿐이듯,

나 역시 그저 을밀농철이라 이름지었을 뿐인 것임을.


내가 밭에 풀을 무성하게 키우는 까닭 역시,

바로 세상을 환원주의란 뜬장에 갇히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헌즉, 관행농은 물론이거니와, 유기농도 내겐 도시 뜬장처럼 여겨질 뿐이다.


앞에서 올린 동영상 중에 여뀌가 한참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참고 글 : ☞ 여뀌, 고추 그리고 가을 연(鳶))


(ⓒ bongta.tistory.com)


풀을 적으로 여겨, 전 포장(圃場)을 방초망으로 덮고,

제초제로 몰살 시키며, 현대농법을 따라 비료와 농약으로 키웠다 하자.

저 여뀌가 밭에다 내놓은 삼출물, 동체(胴體)가 나중에 썩어 흙으로 돌아가,

창출할 기기묘묘한 세상을 어찌 상상이나마 할 수 있겠음인가?

(※ 참고 글 : ☞ 삼출물)


환원주의는 세상을 보는 좁은 안경 하나일 뿐,

결코 전 세상을 조망하지 못한다.

환원주의를 공부한다면,

그게 전 세상을 조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관점, 이치를 엿보기 위해서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視之不見名曰夷,聽之不見名曰希,搏之不得名曰微。


보아도 볼 수 없으니 夷라 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니 希라 하며,

잡으려도 얻을 수 없으니 微라 이른다.


아, 그러함인데,

N, P, K

이게 식물의 전체인 양 여길 수 있음인가?

환원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영혼들이란 얼마나 욕스러운가?


故常無欲,以觀其妙


묘한 이치를 보려면,

어느 한 곳에 치우치거나, 욕심을 끝없이 팽창시키면 아니 된다.


어쩌면 인류는 세상의 근원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원주의가 더욱 그 가능성마저 훼방 놓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善弓者、師弓,不師羿;善舟者、師舟,不師奡;善心者、師心,不師聖。

(文始真經 五鑑)


“활을 잘 쏘는 자는 활을 스승으로 삼지, 궁술의 명인인 예(羿)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배를 잘 부리는 자는 배를 본으로 삼지, 힘이 넘쳐 배를 육지로 끌었다는 오(奡)를 본으로 삼지 않는다.

마음을 잘 조어(調御)할 수 있는 자는 마음을 따르지, 성인을 따르지 않는다.”


진정한 농부가 되려면, 결코 aquaponics , LED농법 따위의,

환원주의에 찌든 현대 농법을 무작정 좇을 일이 아니다.


가만히 하늘 밑에 서서, 


땅을,

식물을,

마음을 배울 일이다.


그대가 선농(善農)이 그리고, 선인(善人)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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