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지락(知樂)

소요유 : 2018. 11. 2. 20:43


내가 관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여기 시골에 머무르면서부터다.

본디 음양학, 오행술에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애초부터 이를 적용 현실에 가두어 무엇인가를 꾀할 뜻은 없었다.


허나, 시골 동네에서,

하도 많은 일을 겪은 바라,

내 공부에 회의가 일었다.

내 평생 이곳에서처럼, 적나라한 인간 군상,

너저분한 사람들을 섬짝으로 만난 적이 없다.

이제까지 배워온 바와 너무도 다른 인간들을 많이 겪은 바라,

도대체 여기 시골엔 이런 인간들이 왜 이리도 많은가?

내가 배워온 공부는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일자 그렇다면, 차라리 외면을 연구해봄만 같지 못하지 않은가?

그러자, 이내 밀어 도달한 것이 관상, 상학(相學)이다.


물론 이게 술(術)을 떠나 무엇인가,

삼빡한 본질을 알려주리란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외려 그러하기 때문에, 

사무치는 면려(勉勵)와,

간절한 정성(精誠),

절실한 기도(企圖)가 있을 것이라,

결코 허술히 대하지는 않았다.


(utube, Scarborough Fair / Canticle - Cover by Jadyn Rylee, Charlotte Zone and Sina)


오늘 영상 하나를 보았다.

내가 가끔 접하는 동영상 중 Sina 채널이 있는데,

거기 동생 Jadyn Rylee의 영상도 즐긴다.


나는 부지불식간,

이들의 관상을 살핀다.

헌데, 이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관상학의 가르침은 분명 음미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세월은 흐른다.

어제의 好가 오늘의 惡으로 바뀌고,

오늘의 善이 내일의 惡으로 바뀐다.


저들의 관상에 매(繫)일 일이 아니라,

뿜어내는 음악적 감성에 집중하여야 하지 않겠음인가?

이런 회의가 이는 것이다.


음성(音聲)이라 할 때,

聲이란, 又凡響曰聲。이라,

울림, 마찰음 같은 그저 소리인 것이다.

영어로 하자면, sound, noise 같은 것이다.

하온데, 音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凡音者,生於人心者也。樂者,通倫理者也。是故知聲而不知音者,禽獸是也;知音而不知樂者,眾庶是也。

(樂記)


“무릇 音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樂이란, 윤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다.

그런즉, 聲을 안다한들, 音을 아지는 못한다. 

짐승은 보통 이 정도에 머문다.

音을 안다 한들, 

樂을 안다 할 수 없다.

무릇 보통의 인간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絲竹金石匏土革木 이들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聲이지만,

生於心,有節於外라, 이로써 딛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音인 것이다.

律呂之聲合이라,

음률이 聲에 합한 지경에 이르를 정도라야 비로소 音이라 할 수 있다.


그런즉, 짐승은 聲은 알아듣지만,

인간은 최소 音을 듣는다.

하지만, 참다운 인간이라면, 

그로써 樂의 경지에 이른다.


審聲以知音,審音以知樂,則聲音樂三者不同


지음, 지락이 이리 다른 것이라,

聲, 音, 樂은 모두 다른 것이다.


내가 노래를 못하는 소위 음치 수준이지만,

어찌 聲音樂을 분별치 못하랴?


Sina와 Jadyn Rylee 영상을 접하며,

나는 노래 부르는데 있어, 음치지만,

결코 聲音樂을 변별치 못하지 않을 지경은 아님을 알았다.

다행스런 노릇이다.


하여,

저들의 음과 악을 여기 남겨 두는 바이다.

그로써, 樂을 앎이라,

이는 결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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