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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와 고양이

소요유 : 2018. 11. 25. 11:04


텃세와 고양이


앞글에서 언급한 놀부 할머니에 연상된 이야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직접 겪은 것이 아니라, 

어느 분과 온라인상에서 사적으로 대화하다 들은 이야기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직접 전재(轉載)한다.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분께 연락할 방도가 없다.

혹 나중에 이 글을 보시고,

별다른 분부를 내리시면,

그를 좇겠다.


시골인심 때로는 상상을 넘습니다.  도회지에서 사시던분들이 시골인심 좋은것으로 상상하시는데 그것은 그분들만의 희망 회로 일뿐입니다.  제 장모님이 격은 시골인심을 들려 드릴까 합니다. 


처갓집이 ooo에 한 촌인데 한동네에서 30년 이상 동고 동락하던 이웃과 생긴 헤프닝입니다.


제 장모님이 조금 활동적이셔서 동네 아낙들과 계를 결성 하시고 계주를 맡아서 운영하신 모양입니다.


아무 탈없이 계를 전부 태워주고, 나서 저희 장인어른이 조금 깔끔 하고 소심하신데 문뜩 잘 마감된 계와 관련된 농협통장을 소각해버리신 겁니다  그것도 몇몇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 이거 계 끝났으니께 맘편히 없애 버려야뎌 " 그런데 일주일 정도 뒤에 계원들 몇몇이 계을 안태워줬으니 태워달라고 청구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두 노인들이 1주일동안 동네 계원들에게 시달려서 몸져 누으시고 급기야 그소문이 당시 oo에 살던 제 귀에 까지 들어 왔네요. 저희 장인, 장모님이야 법 없이도 사시던 분들인데 원통하고 분하시다면서 딸들에게 전화하셔서 하소연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장모님에게 계관련 통장원본이 농협에 있을 것이니 복사 해달라고 하시면 증거가 되지 않느냐 말씀 드려서,  장모님께서 다음날 농협 갔더니 해줄수 없다고 거절 당했다고 하시네요. 몸져누우신 두분을 위해 하루 휴무내고 내려가서 두분 하소연 들어 드리고. 그마을 이장님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다행이 이장님은 계원이 아니더군요  자초지종 말씀 드리고 차에 태워 모시고 농협에 가서 농혐 지점장님과 상담하니 그때서야 구좌 내역 복사 해 주더군요. 그것으로 분란이 해결되기는 했지만 젊었던 제게는 정말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해프닝이 일어나는곳이 시골이더군요.


그 이후 몇주동안 동네사람들과 말도 안하신다던 장인 장모님, 언제부턴가 그들과 어쩔수 없이 희희 낙락 어울리고 계시더군요.  좁은 사회라서 어쩔수 없이 또 교류하시는 두분을 보고 안쓰럽기도 하고 세상이 참 험하고 사람들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쓴웃음을 짓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사건은 답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3명의 직접적인 청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계원은 다 알고있으면서도 동네의 분란을 방관만 하고있는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지요....


덕분에 시골 생각과 작년에 작고 하신 장모님 한번더 그려보는 시간이됬네요.

편한 밤 되십시오.


텃세는 한자어로 기생(欺生) 또는 장세(仗勢)라 한다.

어의(語義)로만 새기면,

기생은 생짜배기, 즉 풋내기를 속이거나 업신여긴다는 뜻이고, 

장세는 병장기, 권력 등 세력에 의지하여, 남을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텃세는 왜 생기는가?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존 자원의 분배에 대한 위협을 감지하여,

미리 사전에 이를 방비하기 위함일까?

특정 지역, 세력권 안에 낯선 이가 들어서면,

그 안에서 창출되던 이권, 자원을 나눠야 되니,

자신에게 돌아오던 몫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게 된다.

나아가, 신참자가 자기를 이기고, 더 많이 빼앗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잠재적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기득권 세력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된다.


또한 생짜배기들은 일이 서툴고, 

기존 조직의 질서를 교란하기 일쑤니, 

이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위계(位階)가 만들어진다.

나아가 신분(身分)의 차별이 생기고, 계급(階級)으로 고정된다.

이리 되면, 이 안에서 일응 질서가 잡히고, 겉보기 안정이 이뤄진다.

이런 견고한 구조 속에서, 

개인의 인격은 충분히 존중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 구조의 경사면을 따라 자원의 불공평한 분배가 자행되지만,

이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런 일이 된다.

이 때, 대부분의 대중은 스스로 이 강고한 질곡에 순응하고,

노예가 돼 버리고 만다.

이로써, 안정과 평안을 얻는 이도 많다.


개중에 영악하고 교활한 이는,

지배 계층에 편입되기 위해,

기존 구조를 강화하는데 앞장서고, 

하부 구조를 핍박하고, 상부 계층에 아첨하며,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길 마다하지 않는다.


보수와 수구의 차이는 무엇인가?

합리적 보수는 주장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이는 100을 갖고, 어떤 이는 미치지 못하여 10을 갖는다.

이것은 당연한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이게 대를 이어 기득권화 되어,

태생적 기회 균등을 방해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이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의 욕심이란 100을 가지면 1000을 갖고 싶은 것이니,

부단히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교묘한 방법으로 제도와 법망을 뚫고, 

그 너머의 영역으로 침투하곤 한다.

보수와 수구가 갈리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는 합리적 규칙을 정하고, 이를 따르며, 

각자 능력껏 자신의 재능을 펴, 

자기 존재를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창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의 고깔모자를 쓰고는 있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몫을 지키고, 늘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게다가, 끼리끼리 무리를 짓고,

이런 탈법, 위법을 감싸고, 변호하며, 서로를 아끼며 보호한다.


불행한 것은, 이들의 심리적 정서 안에서,

배외(排外), 기생(欺生)의 속성이 간단없이 자란다는 것이다.

‘나는 내 재주껏 사는데, 너는 못나서 그리 살 뿐인 것임이라,

엄살 피우지 말고, 너의 못남을 탓할 일이다.’

내 밖을 배척하고, 서툴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길 잘한다.

한마디로 군림천하(君臨天下)라,

욕심껏, 재주를 부려, 천하 위에 군림하여, 한껏 뽐내고자 한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니,

이게 어찌 자신이 책임질 노릇이냐?

그러함이니, 못난 네들은 징징 짜며 투정 부릴 일이 아니다.

저들은 자랑스레히 이리 외친다.


게다가, 기득권자도 아닌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들의 선전,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고, 따르며, 복속한다.

왜 그런가?

자존심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블로그만 하여도,

(서로)이웃맺기 숫자에 연연하여,

이를 수집, 사냥하듯 나다니며, 안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때론 구걸까지 불사한다.

나는 이 창구를 아예 폐쇄하여버렸다.

그래도 어떤 통로로 들어왔는지, 이웃맺기를 하는 분도 계시긴 하다.

나는 이런 따위에 관심이 없다.

페이스북 같은 데는 대신 follower 양으로 위세가 정해진다.

하지만, 추종자가 들러붙지 않은 이도 만족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유명인의 추종자가 되는 일이다.

누구누구의 follower가 됨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follower가 적더라도,

조그마한 위안, 아니 전도된 커다란 허영을 획득할 수 있다.


노예는 기꺼이 주인에게 복속함으로써,

자신의 안전과 먹거리 그리고 허영을 보장받는다.

(※ 참고 글 : ☞ 인정투쟁 별고(別考))


진보는 능력의 차이를 함께 고르고,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구호는 언제나 찬란하지만,

실제는 기득권 지향의 구심력을 여의지 못하여,

외려, 합리적 보수보다 더 사회적 신망을 잃고는 한다.

강남좌파니, 입진보니 하는 데는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진보의 고깔모자를 일시 빌려 쓰고 있을 뿐,

내막을 알고 보면, 보수나 수구꼴통 못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문재인 현 정권은 문빠들이 착각하듯이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선거 전에는 그나마 합리적 보수처럼 보이기도 하였지만,

정권을 획득하고 나서는 그들은 곧바로 수구 본색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내가 보기엔 저들은 촛불 시민의 정신을 네다바이한,

네다바이수구일 뿐이다.

저들은 과시 흉쿠나.


본능을 여의기는 어렵다.

하기에 대개의 기득권자들은 보수 나아가 수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탈권자(奪權者), 소수자(小數者), 약자(弱者)들이라 하여,

누구나 진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저 태극기 부대에서 보듯,

저들은 태극기는 물론 성조기 나아가 이스라엘 국기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존재 조건을 의탁하며, 고단한 생을 잠시 위로 받는다.

기꺼이 기득권의 노예가 됨으로써. 


모름지기 인격을 가진 주체적 사람이라면,

강아지가 되지 말고 고양이가 될 일이다.

최소 고양이는 주인이 부른다고 바로 달려오지 않는다.

그가 주인에게 다가갈 때는, 제 마음이 동할 때일 뿐이다.


내 바라거니와,

세상의 모든 약자, 탈권자들은 일떠 일어나,

수가 틀리면,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주인 손일지라도,

바로 물어 뜯는 고양이를 본받기를 빈다.


이어, 왕따론에 미치고자 하였는데,

더 쓸 마음이 급히 식어버려,

이에 그치고자 한다.


하여, 완결되지 못한 글이 되고 말았다.

차후 마저 채워 더 나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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