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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착과 이재명

소요유 : 2018. 11. 30. 14:53


조착과 이재명

 

조착(鼂錯∨晁錯)은 한(漢)나라 사람이다.

내가 한 때, 이 인격에 주목하여, 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오늘 이재명에 생각이 미치자,

이에 견주며 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조착의 이름 자 錯은 발음이 ‘조’나 ‘착’이다.

중국어 발음은 [cuò]이다. 

이 인물을 두고 한국에선 조착 또는 조조라 부르는 등 일정치 않다.

물론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와는 다른 이다.

일단 이 글에선 조착이라 부를 것이다.

 

뜻은, 어긋나다, 섞이다, 잘못하다 등이다.

그런데 도대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름 자에 이런 말을 쓸 까닭이 있겠는가?

허나, 錯은 金涂也。라, 

본디, 안료, 도료를 칠한다는 뜻을 지녔다.

그러하니, 요즘 식으로 이해하자면 도장, 도금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조착(기원전 200~154년)이란 인물은 주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잘 그려져 있다.

오늘날, 중국에선 이 인물을 중심으로 드라마가가 곧잘 만들어지고 있다.

그만큼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이다.

 

조착은 어려서부터,

장회(張恢)에게서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의 법가 학설을 배웠다.

 (學申商刑名於軹張恢先所 - 史記)

법가를 제대로 배운 이들은 대개 개혁가로 나선다.

돌이켜 보면, 진(秦)나라 당시 상앙은,

기득권 세력의 적폐를 혁파하는 등,

실로 진나라 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하겠다.

(※ 상앙 참고 글 : ☞ 드잡이질 후기)

 

법가를 제대로 배운 이라면,

사회 부조리와 부패를 바로 잡을 꿈을 꾸지 않을 수 없다.

웅지를 품고, 사회에 헌신하는 저들을 생각한다.

이 땅에 법학을 배웠으되,

(※ 법가의 법과 오늘날 법학의 법은 한결 같지 않다.

다만, 사회 정의를 대상화한다는 점에선 일정분 같은 영역을 공유한다.)

이재명처럼,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고,

왕곡(枉曲) 휘어지고, 구부러진 것을 바로 펴고자 한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재판 거래하고, 재벌에 영혼 팔기를 밥 먹듯 하는 이가,

홀아비 사타구니 북북 긁을 때, 떨어지는 이처럼 많지 않던가?

 

모름지기, 

법을 제대로 배운 이는,

恥不從枉

수치를 아는 것이니, 

구부러진 것, 바르지 않은 것을 따르지 않는 법이다.

 

후에 조착은 당시 상서(尚書)의 권위자인 복생(伏生)에게서 이를 배웠다.

 (錯為人陗直刻深。孝文帝時,天下無治尚書者,獨聞濟南伏生故秦博士,治尚書,年九十餘,老不可徵,乃詔太常使人往受之。太常遣錯受尚書伏生所。 - 史記)

그는 문제(文帝) 때, 부단히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경제(景帝)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개혁 정책인 삭번책(削藩策)을 지어 올렸다.

비로소, 봉건 제후들의 할거(割據)를 막고, 

기득권의 세력을 깎는 등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허나, 이로 인해 그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삭번(削藩)이란 별거 아니다.

제후 봉건 세력을 깎겠다는 것이다.

마치 이재명의 억강부약(抑强扶弱)과 같다.

기득권의 세력을 억누르고,

약자를 부축하여, 재화를 고르게 분배하고, 

사회 정의를 세우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流不濁水, 積水易腐라,

무릇, 흐르는 물은 탁하지 않으며, 오래 고이면 쉬이 썩게 마련이다.

헌즉, 역사적으로 삭번책은 쉼없이 되풀이 대두된다.

오늘날 적폐청산이란 것도 이와 매한가지인 것이다.

다만, 문가정권, 말만 요란하더니,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으며,

요즘엔 말조차 실종되고 말았다.

이는,

이들이 진작에 기득권에 포섭되었거나,

스스로 기득권 세력의 하나인 방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당시엔 황제권의 강화에 방점이 있다하겠으나,

이는 봉건 제후들의 발호와 오늘날 재벌, 기득권의 적폐와 대비시키면,

그 정치사회 역학 구조와 그 왜곡된 힘의 행사, 

그리고 이의 혁파에 이르는 일련의 문제의식의 흐름은,

그 궤를 함께 한다고 하겠다.

 

遷為御史大夫,請諸侯之罪過,削其地,收其枝郡。奏上,上令公卿列侯宗室集議,莫敢難,獨竇嬰爭之,由此與錯有卻。錯所更令三十章,諸侯皆諠譁疾鼂錯。錯父聞之,從潁川來,謂錯曰:「上初即位,公為政用事,侵削諸侯,別疏人骨肉,人口議多怨公者,何也?」鼂錯曰:「固也。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錯父曰:「劉氏安矣,而鼂氏危矣,吾去公歸矣!」遂飲藥死,曰:「吾不忍見禍及吾身。」死十餘日,吳楚七國果反,以誅錯為名。及竇嬰、袁盎進說,上令鼂錯衣朝衣斬東市。

(袁盎鼂錯列傳)

 

“마침내 어사대부가 되자, 제후들의 봉지를 깎고, 속령을 거둘 것을 주청하였다.

공경, 제후를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모두는 난감해할 뿐이었다.

다만, 두영(竇嬰)만이 다툼을 일으켰다, 이에 조착과 틀어지게 되었다.  

조착이 바꾼 법령은 30장에 이르렀는데, 제후들은 모두 조착을 헐뜯었다.

조착의 아버지가 이를 듣고 영천에서 올라왔다.

조착에게 이른다.

 

‘폐하가 즉위하시고, 네가 나랏일을 맡으면서, 제후의 영지를 깎고,

그 집안사람들 간 골육상쟁을 일으키지 않았느냐,

모든 사람들이  너를 원망하는데, 도대체 어인 일이냐?’

 

조착이 대꾸하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의 존엄이 없어지고, 종묘사직이 불안해집니다.’

 

아버지가 다시 말한다.

 

‘유씨가 편안하면, 조씨는 위태스럽게 되어도 좋은가?

나는 너를 버리고 떠나겠다.’

(※ 유씨 : 황제家)

 

드디어 약을 먹고 죽어버렸다.

그가 남긴 말이다.

 

‘내 차마 내 신상에 화가 미치는 것을 참지 못하겠노라.’

 

죽은 지 10여일 후,

조착을 죽일 것을 명분으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이 난을 일으켰다.

 

두영과 원앙의 진언을 받아들여, 

황제는 영을 내려,

조착을 동쪽에 끌고 가 죽여 버렸다.”

 

아, 사기의 이 부분을 읽다보면,

의기로운 사람치고 어찌 장탄식을 금할 수 있으랴?

 

이 장면을 드라마에선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이는 이를 참고하라.

(※ 참고 글 : ☞ 독사에게 손가락을 물리면, 장사가 팔을 절단하듯이)

 

(utube, 汉景帝&晁错)

 

(utube, 汉景帝&晁错)

 

특히 이 장면에 이르면,

따라 울지 않을 수 없다.

 

경제가 마지막 자리를 나누며,

조착에게 이리 말하고 있다.

 

"분명 잘못된 것인데,

어떻게 하지 못할 데가 있고

분명 옳은 것인데,

어떻게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자, 조착은 굿굿이 이리 말하고 있다.

 

"허나 신의 생각에 옳은 것은, 

결국에는 옳은 것이었으며,

잘못된 것은 결국 여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조착의 아버지가, 

조착을 나무라는 장면에 이르면,

숱한 역사적 데쟈뷰(Déjà vu) 연못에 빠져들게 된다.

 

하여, 이를, 여기 다시 상기해보고자 한다.

 

范文子喜直言,武子擊之以杖 “夫直議者不為人所容,無所容則危身,非徒危身,又將危父。”

 

범문자는 직언하기를 좋아했다. 

범무자(범문자의 아버지)는 몽둥이로 그를 때리면서 이리 타일렀다.

 

“대저, 직언이란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다. 

소용이 없으니 외려 몸이 위태로워질 뿐이다.

단지 네 몸이 위태로워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장차 네 아비인 나도 위태로워진다.”

 

과연 범문자는 어리석은 사람일까?

범무자는 세상의 번연히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일까나?

 

子產者,子國之子也。子產忠於鄭君,子國譙怒之曰 “夫介異於人臣,而獨忠於主,主賢明,能聽汝,不明,將不汝聽,聽與不聽,未可必知,而汝已離於群臣,離於群臣則必危汝身矣,非徒危己也,又且危父矣。”

 

자산은 자국의 아들이다. 

자산은 정나라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자국은 노하여 말한다.

 

“대저, 많은 신하들과 다르게 홀로 임금에게 충성하려고 한다면,

그 임금이 현명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하지 못하다면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들어줄 것인가, 아니 들어줄 것인가 아직 아지도 못하면서,

너는 많은 신하들과 떨어져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뭇 신하들과 등지게 되면 너의 몸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또한 단지 너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아비도 덩달아 위태로워진다.”

 

범무자든 자국이든 말하는 바,

아들 혼자뿐이 아니고 family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고 경계하고 있는 게다.

 

그러하니 난언(難言)인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말하는 이 하나를 넘어 구족(九族), 십족(十族)까지 위태로워진다.

(※ 십족은 범주가 혈연을 넘어 친구 등 관련 인사까지 아우른다.)

 

그러하니 지언(至言)이란 실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이 없으면 감히 나올 수 없음이다.

만약 그런 위태함임에도 이를 무릅쓰고 나온다면,

여기엔 공명심이라든가, 벼슬을 사겠다든가, 출세를 하고 말겠다는,

무엇인가 꾀하는 간절한 원망(願望)이 숨어 있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라면 이미 지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득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에 살면서 지언으로써 설득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비자는 난언(難言), 세난(說難)편을 두어 이를 신랄하게 경계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오늘 날, 이 땅에서,

스스로 범문자(范文子)가 되어, 

집안 식구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는 이가 있으며, 

어느 날, 자산(子產)이 되어, 

뭇 극문 똥파리로부터 몰매를 맞는 이가 있으며,

때론 조착(晁錯)이 되어, 

재벌 등, 기득권 적폐 세력으로부터, 갖은 모함과 참소를 받는 이가 하나 있다.

 

내,

오늘,

문득 그가 떠올라,

이 글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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