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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소요유 : 2019. 11. 27. 16:49


하늘을 본다.

구름이 아름답다.


마치 깊은 동굴로 들어가듯,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도록,

무한의 지평으로 펼쳐지는 저 아름다움의 비밀.


문득, 저 비밀의 화원으로 자맥질하여,

영원 속으로 빠져 드는 순간,

나는 내 몸에 갇혀 있는 슬픈 죄인임을 깨닫고 만다.


사람이 만든 것도 미치도록 아름다운 것이 있지만,

저것은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아,

그 너머, 무한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이다.

지금은 온전한 이해를 지속하고 있다 자신할 수 없지만,

그 요의의 기초 골격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quantum은 양자(量子)로 번역되는데,

이는 세상을 量으로 분절하여 이해하고 있음을,

저 단어로도 단박에 엿볼 수 있다.


지금 세상이 디지털(digital)로 지배되고 있듯,

똑똑 끊어진 양으로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세상을 건너 띄며 관찰한다.

아니, 세상이 그리 만들어졌다고 저들은 본다.


헌데, 어디 우리의 감정도 이리 또박또박 나눠져 있는가?

감정은 연속체(continuum)이지,

어느 지점을 두고 좌우로 나눠 끊을 수 있도록 결절이 있다 할 수 없다.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면,

자(尺)를 들고 어느 한 부분의 경계를 나눌 수 없다.

저들은 연속적인 무한 변화상을 그려내고 있어,

그 연속성(continuity)을 누군들 감히 훼방하며, 나서 특정 부분을 두고 칼로 나눌 수 없다.


트랜지스터(transistor)




베이스 측에 입력된 전기 신호가, 컬렉터 또는 에미터의 출력 측으로 나온다.

이 때 입력된 신호는 제어, 증폭되어 원하는 결과를 얻게 설계된다.

전형적인 analog 입출력 신호 장치이다.

아무리 증폭이 된다한들,

신호 자체는 여전히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이다.


플립플롭(flip-flop)



그런데, 전자공학내지는 디지털공학에선 교묘한 장치를 고안해내었다.

앞서 이야기한 트랜지스터 두 개를 두고,

입출력을 상호 교차 되먹이는 형식으로, 얽어내어,

어떤 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단위 소자를 만들었다.

이로써, 한 비트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전자적으로, 기술적으로,

세상을 어둠과 빛, 있음과 없음, 흑과 백 ....

그래 바로 음양으로 나눠 취급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래, 이젠 구름조차,

0과 1의 나눔으로 낱낱이 쪼개어,

지상으로 끌어내 팽개쳐 버린 것이다.


이 폭력성을 시인은 가슴 저린 아픔으로 운다.

저 야만의 디지털 기술이 온 세상을 덮자,

사람들은 이제 익숙해져,

더 이상은 구름을 구하지 않으며,

꽃을 노래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디지털적으로 분절된 것으로 알며,

더 이상, 무한 영원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사람이 열 손가락을 가졌기에,

열 단위 십진법을 고안하고,

역으로 그에 갇혀 세상을 조망한다.


나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동원 가능한 수학, 물리학적 구속 조건 때문에,

양자역학적 물리 구조를 그 한계 안에서, 그만의 방법으로 구축하였을 뿐,

그 밖의 시도는 할 수도,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믿는다.


구름을 벗으로 하는 이들은,

수학을, 양자역학을 믿지 않는다.

시인은 오동나무로 만든 흉통(胸桶)으로,

별을 느끼며, 달을 그린다.


하늘의 구름을 보며,

나는 문득,

양자역학, 디지털 세계란 실로 끔찍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폭력적 세계관으로 구축된 오늘의 세상은,

진실이 억눌려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모두들 다 잘난 체,

교만을 떨고 있다.


道通,其分也,其成也毀也。所惡乎分者,其分也以備;所以惡乎備者,其有以備。故出而不反,見其鬼;出而得,是謂得死。滅而有實,鬼之一也。以有形者象無形者而定矣。


出無本,入無竅。有實而無乎處,有長而無乎本剽,有所出而無竅者有實。有實而無乎處者,宇也;有長而無本剽者,宙也。有乎生,有乎死,有乎出,有乎入,入出而無見其形,是謂天門。天門者,無有也,萬物出乎無有。有不能以有為有,必出乎無有,而無有一無有。聖人藏乎是。

(莊子)


“도는 통하되, 나눠져 이뤄지고(成), 이뤄져(成) 허물어진다(毁).

나누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나눠진 것으로 다 갖추어진 것으로 여기며,

갖춰진 것이 나쁘다는 것은, 갖춰진 것으로써, 모든 것이 다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즉, 나가(出) (제 본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귀신이 될 것이며,

밖으로 나가 얻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을 얻었다 하겠다.


이리 (본성이) 멸절되면, 살아있다 한들 귀신과 매한가지다.

형체가 있는 몸으로써 형체가 없는 도를 본받아야만 안정되게 되는 것이다.

형체가 있는 자가 무형을 추상할 수 있다면 안정이 된다.


나오지만 그 본은 없는 것이며,

들어가지만 구멍이 없는 것이다.

.......”


아아,

장자의 저 글은,

마침 내가 문득 고개 들어 치어다 본 구름을 두고,

얻은 깨우침과 다름이 없구나.


저기 장자의 分은 오늘날처럼 디지털 기술로,

세상을 나누고 있는 사태를 지적하고 있음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온 세상을 마치 다 갖춘 양 여기고 있으며,

그 갖춤으로써, 천하를 거머쥔 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헌데, 장자는 여기서,

돌아와야지(反, 返)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귀신과 다름이 없다고 이르고 있다.

이는 천하를 깨우는 천둥 소리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저 홀로 아름답구나.


저 구름을 배워야 한다.

종국엔 저리로 귀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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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하착 2019.12.29 16:20 PERM. MOD/DEL REPLY

    살아 가는데 필요한 이념들이 많습니다.
    우선 도덕을 배워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고,
    배움에 있어서는 옳은 답, 틀린 답을 구분하고,
    종교에 입문 하여서는 불경과 성경을 구분하고...
    그러나, 莊子의 말은 "이렇게 구분 짓는 것은 옳지 않다."
    <分>은 옳은 것이 아니니
    "구름같이 단위가 없는...나무 한그루, 두그루, 세그루가 그냥 하나의 자연이다."
    "이런 시각(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장자의 자연주의를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사용자 bongta 2019.12.29 17:16 신고 PERM MOD/DEL

    돌아온다는 말은 곧,
    지금 돌아올 것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헌데, 돌아올 것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돌아오라는 말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보면, 돌아오라는 말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떠난 그 자리가 없다면,
    요청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요청은 기실, 요청받을 사실을 선언적 언명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freshman 시절,
    제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동양학에 발을 먼저 디딘 이였습니다.

    어느 날,
    이리 사상, 철학이 동과 서가 나뉘어져 있다면,
    이것은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닌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리 대답하였습니다.
    혼란스럽게 생각할 것 없다.
    '둘 다 모두 배우고, 조화를 꾀하면 될 일이다.'

    equilibrium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주체적'으로 세상을 내가 대하며, 세상의 진실을 궁구해갈 뿐.
    저들의 객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길을 가든 결코 허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늘 正見, 正思 .... 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저는 장자아냐, 부처라도,
    저들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묻고 자신의 답을 찾고자 할 따름입니다.
    하다 지치면 쉬어가고, 미치지 못하면 스러질 뿐인 것을.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언제나 正見, 正思하는가?
    이런 물음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반성하고, 그리고 나아갈 뿐.
    외물, 타자에 기대지 않고자 합니다.
    이 말은 저들을 무시하고자 함도 아니오,
    그들에게 반항하고자 함이 아님이니,
    배울 것이 있다면, 뼈속까지 울궈 빼앗겠지만,
    아니라면, 당장 시궁창에 내다버림에 망설임이 없을 것입니다.

    요는,
    주체적 각성, 깨달음.
    여기에 이르지 않으면,
    바깥 일은 모두 다 부질없는 허접부스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구름은,
    바깥 경계일 뿐.

    저는 구름을 빌어,
    외물에 경도되어 반성적 성찰이 없는 세상을 질타하고 싶었습니다.
    구름 한 번 바로 쳐다보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 그 모습을 그려보았던 것입니다.
    하여, 사람은 지치지 않고 구름을 쳐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방하착 2019.12.30 22:44 PERM. MOD/DEL REPLY

    봉타님 답글을 읽고 보니 드는 생각이 이렇습니다.
    양혜왕이 말씀하기를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답하기를 "왕께서는 어찌 利를 말씀하십니까? 왕께서 내 나라의 利를 말씀하시면, 사대부들은 내 집안의 利를 말할 것이며, 서민들은 내 몸의 利를 말할 것이며..."
    이렇게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어 맹자 뒷꽁무니 쫓아 다니기도 바쁜데...
    "分하지 말고 구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제 생각에는 이런 명제를 과연 근본으로 삼을 수 있는가 했던 겁니다.
    제 질문의 요체는...
    자연주의...뭔가 이해 될듯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있던 찜찜함을 여쭈어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많이 부족한 질문을 꿰뚫어 답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봉타님 말씀 다 이해는 못하지만, "둘 다 배우고, 조화를 꾀하면 된다."
    이 한줄 만이라도 만족스럽게 주워 담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몸 건강히 신년 맞으시길 바랍니다.

    사용자 bongta 2019.12.31 09:08 신고 PERM MOD/DEL

    찜찜함.

    과연 내 마음 속에,
    찜찜함이 큰가, 아니면 아니 그런한 부분이 큰가?

    찜찜함이란, 집 떠난 이가, 마치,
    고향에 대한 향수는 남아 있으나,
    그리고 한켠으론 돌아가고도 싶으나, 돌아가지 못할 처지,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태와 비견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가을 낙엽이 지는 오후,
    먼산을 보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이 감정에 기대어,
    돌아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로하거나,
    아니 그것은 실로 변명,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써, 잠시 마음에 이는 물결을 다독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개,
    이런 향수, 변명의 두겁을 쓰고,
    세상을 걸어가며 생을 마칩니다.

    실로 찜찜함이란,
    떡이 되고, 국이 되는 현장을 여의지 못하는,
    마지막 지킴이, 보루가 됩니다.

    그러함으로써, 안락함을 구하고,
    여인을 취하고, 자식을 얻게 됩니다.

    싯달다는,
    야수다라(처), 라훌라(자식)을 모두 버리고, 고향을 떠납니다.
    후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귀향을 합니다.
    이 때 부왕 슛도다나왕은 또 한번 놀라는 일을 겪습니다.

    난다(배 다른 동생), 라훌라가 출가를 해버립니다.
    애초 슛도다나왕은 싯달다가 출가를 해버리자,
    난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난다가 다시 출가하자,
    이제 라훌라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헌데, 라훌라까지 출가를 해버리는 사태가 일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자, 슛도다나왕은 부처에게 가서, 이리 청합니다.
    "모든 비구들이 출가하고자 하거든, 부모에게 물어 출가를 허락 받은 뒤에 출가시키도록 하소서."
    이후, 부처는 이에 동의하고, 계율로 정하겠다 약속을 합니다.

    무문관
    우리나라 사찰에도 몇몇이 이 무문관을 시설한 곳이 있습니다.
    스님들 중 뜻은 굳은 이들은,
    여기에 백 일, 천 일을 작정하고 갇혀,
    도를 이루겠다고 수도를 하곤 합니다.

    찜찜함.
    이를 철저히 여의겠다는 것이 아니올런지?

    거푸 천 일을 도합 3번, 즉 9년을 한 이도 있고,
    그 안에서 남 모르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여기 들어가길 원하는 이가 줄을 나래비로 서있다 합니다만,
    지금 이 땅에 과연 도인은 지금 얼마나 된답니까?
    중국은 지금 무문관에 들어가려는 이가 없어, 거미줄만 가득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찜찜함을 지긋이 관찰하며,
    블루베리를 상대로 자연재배, 아니 그를 넘은 저만의 농법으로,
    세상을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방하착님.
    새해엔,
    큰 복을 짓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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