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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훈장, 배지, 리본

소요유 : 2019. 11. 30. 20:11


완장, 훈장, 배지, 리본


완장에 대하여는 내가 진작에 쓴 글 안에 다룬 적이 있다.

(※ 참고 글 : ☞ 물노빠)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리본이나 배지(badge)에 관련된 감상을 중심으로 말을 해보겠다.

기실 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마침 오늘 술국 괴듯, 가슴에 차올랐음이니,

이를 샘물 긷듯 표주박으로 떠내본다.


세월호 사태가 터지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마치 내 일인 양, 가슴이 아팠다.

슬픔의 강물 앞에서, 엉덩이 까내리고, 춤을 추던 그 개망나니들이란 도대체가?

폭식 투쟁한 인간 밖의 쓰레기는 다시 꺼내지 말자.


이어, 우리는 제대로된 진실을 알고 싶었으며,

죄인들의 책임을 묻고, 이들을 희생자들의 영전에 제물로 바치고,

유가족의 아픔을 위무하게 되길 기원하였다.


당시, 박주민의 행동은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해 앞장 서서 노력하였고,

후에 국회의원이 되어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등,

약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가슴엔 배지 여럿이 달려 있다.


(출처 : eunpyoung.joomin)


그의 양복 왼쪽 깃에는 국회의원 금배지 외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나비 브로치, 제주 4.3 항쟁 희생자의 아픔을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 그리고 ‘청소년에게 참정권을’이라고 적힌 배지가 붙어 있다. 오른손 팔목에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만든 고무 팔찌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팔찌, 스텔라데이지호 희생자 추모 팔찌가 있다. 

 

배지와 팔찌는 그의 이념 지향과 가치관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헝클어진 머리와 피곤에 절어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은 ‘성실함’ ‘워커홀릭’(일 중독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 탓에 인터넷에서는 ‘거지 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밀착마크]'거지갑'이라 불리는 박주민 "촛불 구호 벌써 잊었나“


과히 그는 걸어다니는 간판대(看板臺), 게양단(揭揚壇)이라 하겠다.

그는 이념의 폿대 끝에 원망(願望, 怨望)의 손수건을 달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공중에 달 줄 안 사람이런가?


유치환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을 내달은 그의  마음을 알겠다.

헌데, 이제 그가 몸을 담은 당은 수권 정당이 되었고,

정권은 담임 기간 반을 넘어가고 있으며,

그는 당의 최고의원이 되었다.


그러함인데, 과연 세월호 사태의 진실이 밝혀졌는가?

가습기 사건 전모가 밝혀졌는가?

유가족들의 아픔이 덜어졌는가?


이 물음 앞에 서면,

그의 가슴에 달린 세월호 노란 나비 브로치는,

이젠 지쳐 매달려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단단히 핀으로 꼽았다한들,

이젠 날개가 부셔져, 

기어히 노란 가루가 되어 허공중으로 흩어지고 있다.


불현듯,

달겨들어, 확 뜯어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저 인간 가슴팍에 달린 허울 좋은 그 구역질나는 생철 조각들을.


우리 때는, 학생들 가슴을 저들이 필요에 따라 빌리는 거치대로 썼다.

불조심, 혼식 .... 등등의 행정 당국 정책에 따라,

가슴에 핀으로 리본을 꼽는데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이것 달지 않으면, 주의를 듣고, 기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어린 학생들이 저들의 도구가 되었어야 하는가?


아무리 좋은 의도라한들,

학생들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옳지 않다.

개별 인격은 누군가의 도발, 징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박주민은 제 가슴을 스스로 내어,

제 이념과 사상 그리고 사회, 정치적 아우성을 대변한다.

그러함이니, 저이의 판단, 행동을 비판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나처럼, 완장, 훈장, 뱃지, 리본 따위를 근원적으로 싫어하는 입장에선,

박주민의 개별 행동 하나 하나를 겨냥할 수도 있지만, 이를 넘어, 

저런 행위 일반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밝히는 것이 허물이 될 수는 없을 터다.


리본을 가슴에 다는 행위는,

종국엔 그 행위의 목표가 달성되어, 떼어내질 것을 기약하고 있다.

헌데, 목표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박주민처럼 왼종일, 정권을 내놓을 때까지, 가슴팍에 매달아 두어야 하나?


여긴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수권 정당 당원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저 리본이 가슴에 달려 있는 것은,

문제 해결에 있어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그동안 저이와 그가 속한 정권 도당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말이다.

지금 정권 인수하여 반이 넘어가지 않았는가?

딱하기 그지 없는 노릇이라 하겠다.


저 리본은 문제 해결 행동 의지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이제와선, 게으름의 표지로서 전락하였다 하겠음이니,

그동안 실로 염치없는 저들만의 잔치 놀음이 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본은 달아매는 순간,

저것은 자신을 떼어내기 위한 운동 전위(前衛)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종국엔 스스로의 존재를 무화시킴으로써,

제 존재 목적을 완성하는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꽃이, 종국엔 떨어져 씨앗을 맺듯이,

리본은 씨앗이란 결과(結果)를 위해 자신을 산화시켜야 하는 숙명을 갖는다.

(※ 참고 글 : ☞ 금화교역(金火交易))


헌데, 가슴팍에 매달려,

자신이 화려한 꽃이란 사실을 자랑만 한다면,

가을을 어찌 맞이할 수 있겠음인가?

이는 자신은 물론 가을 기다리는 이들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모르겠다.

정치인 하나가 있어,

지지 않는 꽃이 되기를 작정하고,

씨앗을 맺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면,

그는 내심의 목적을 이뤘다 하겠다.


게다가, 우중(愚衆)은 화려한 꽃에 속아,

지지 않는 꽃을 향해 연신 박수친다.

마치 마약하고, 음주 운전한 연예인을 향해,

팬이란 이름으로 방패가 되어, 눈물 흘리며 변호하기 바쁜,

저 닷냥 서푼의 창광(猖狂)이 되고 만다.


이 때 리본은 목적 사업이 아니라,

그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을 위한,

선전의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유예됨으로써,

명예를 지속시킬 명분을 사는 저 비열한 핑계.

마치 사이비 목사처럼, 하늘 나라를 팔아 제 입의 사치를 구하고,

땡중처럼, 극락을 핑계 삼아 시줏 쌀을 훔칠 수 있으리라.


이 가치 전도된 역할 구조를 잘 아는 이,

특히 정치인, 종교인 따위는,

그것만으로도 현실 세계에선 곧잘 보상을 받는다.

시민들을, 약자를 늘 의식하며,

헌신하는 훌륭한 인물로 묘사되며, 칭송을 받곤 한다.

실질 행동 이전에, 리본을 다는 행위만으로도.


야만국에서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한 쿠데타(coup d’État) 장군은,

가슴에 무공 훈장을 달다 지쳐,

나중엔 등짝까지 빌려 번쩍이는 생철로 도배를 하고 만다.

나는 가끔 이 장면을 떠올리면,

  (박주민 가슴팍, 그리고 이도 모자라, 손목에까지 이르른 저 거룩함의 아우성에 전율한다.

  아프리카와 만리 길을 격하여 있지만,

  그 유사 행동 패턴에 놀라고 마는 것이다.

  이 문명국에서, 왜 박주민은 쿠데타 장군과 함께 오버랩 되고 있는가?

  그는 정녕 쿠데타 역을 이 땅에서 실천 현실로 아바타가 되어 재현하고 있음인가?

  (※ 참고 글 : ☞ 아바타))


이제 훈장은 더 이상, 구국의 가치를 선양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저 개인 위세의 선전 장치로 전락하고 만다.

대중 가운데 깨어 있어,

설혹 역시 저것이 엉터리임을 아는 이라할지라도,

저 앞에 서면, 오금을 저리며,

발 밑에 복속하며 엎드린다.

자유를 잃은 노예들.


그런데, 말이다.

자작 훈장이든, 리본이든,

한번 달면 스스로 떼어내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떼어내는 순간 훈장의 권세를 놔버리는 일이 될 터이며,

리본의 표상 목표를 이제는 포기했다는 선언이 되고 만다.


허니, 저 무거운 것을, 도대체가 더는 뜯어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놔버리고 싶어도, 족쇄가 되어, 옴싹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아아,

그러함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애시당초,

훈장의 거룩함을 믿지 않으며,

리본의 선전에 의지하지 않는다.


저것들은 모두 사람을 어리석은 속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전쟁에 나선 병졸들을 동원하기 위해,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쳐댄다.

이들은 종국엔 병졸들의 목숨을 피로 구할 뿐이다.


그대 당신의 목숨을 보존하려면,

장수들이 흔드는 깃발에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정치인들의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믿지 말 일이다.


다만, 자신의 뜨거운 가슴 속에 솟는 순정의 깃발을 높이 들 일이며,

차가운 머리로 사태를 냉정히 분석하고, 판단하며, 진실을 찾아 나설 일이다.

버려진 약자의 대오에 합류하며,

손을 잡고 결의와 의기를 나눌 일이지,

거리를 나선 장사꾼들의 깃발에 취하고, 리본에 혹할 일이 아니다.


天子居青陽大廟,乘鸞路,駕倉龍,載青旗,衣青衣,服倉玉,食麥與羊,其器疏以達。


월령(月令)의 한 구절이다.

여기 보면, 천자의 거동에 푸른 깃발을 들어올린다는 말이 나온다.

이 깃발을 보면, 백성들은 돌아온 봄과 함께, 천자의 위세를 실감한다.


그대가 진정 자유인이라면, 이 깃발에 주눅이 들거나, 놀라서는 아니 된다.

저것은 천자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한 것임이라,

빼앗아 내 것으로 할지니라.


아니, 진짜배기 대자유인이라면,

외물에 의지하여, 제 삶을 가탁하지 않는다.


봄은 실로, 천자가 타는 수레나 가마 그리고 깃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에 번지는 양기(陽氣)로써, 자각하는 것이다.

이게 아니고, 아직도 음기(陰氣)가 가득하여,

천자의 깃발에 놀라고 있다면,

봄이 왔다한들,

그대는 아직 겨울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둠을 두려워 한다.

밤에 나가면, 

골목마다 도깨비가 살고 있고,

숲엔 귀신이 서려 있다 믿는다.

하여 아무리 오줌이 마려워도,

새벽까지 참아낸다.

어둠 속에서 떨며.


이 나약함이란 도대체가.


나는 한 철 야반삼경, 산에 올라가, 바위에 앉아, 어둠을 마주하곤 하였다.

하산하여 산 입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가 묻는다.


‘무섭지 않은가?’


‘무섭긴 뭣이?

외려 산 아래 사는 인간처럼 무서운 게 또 있던가?’


사람은 승냥이나 범보다 몇 곱은 더 무섭다.


자유를 원한다면,

깃발에, 리본에, 어둠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될 일이다.


사자는 배지 없이, 홀로 걷는다.

이런 동물을 일러 사자라 한다.


猶如獅子不怕聲響,風兒不怕羅網,蓮花不怕污水,讓他像犀牛角一樣獨自遊蕩。

(巴利語佛典 經集)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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