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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소요유 : 2019. 11. 4. 13:22


아바타


현대를 살아가는 이 치고, 

아바타란 말을 들어보지 않았다든가,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헌데, 이게 불교 내지(乃至)는 힌두교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아지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민속에도 삼신이란 개념이 있지만, 

불교에도 이와는 다르지만 삼신(三身 · Trikaya)이란 게 있다.

즉 법신(法身 dharmakāya), 보신(報身 sambhogakāya), 응신(應身 nirmāṇakāya) 또는 화신(化身)이 그것이다.


법신이란 절대진리를 말한다. 

즉 중생이 지닌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이는 구체적 현실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시태(可視態)가 아니라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헌데도 불신이라 身자가 들어간 것은,

보신, 응신과 어울린 대귀적 형식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보신이란,

구체적 현실에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수행을 한 결과,

진리를 증득하여 그 갚음의 결과 부처가 된 경우를 말한다.

하니까 구체적 실천 현장에서 원만구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화신이란 부처의 변화태(變化態)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나투게 된다.


아바타는 이 중에서 바로 화신을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가령 닉(nick)을 두고 말한다면,

대부분은 자기 이름씨 말고,

무엇인가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새로 짓고는 한다.

헌데, 드물지만, 자기 이름을 닉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묘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화신은 범어로 अवतार,Avatar라,

특수 능력을 지닌 자를 뜻한다.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자기 형상을 변화시켜, 

다른 사람, 또는 동물 등으로 모습을 바꾼다.


가령 비슈누(Vishnu)는 천계에 있다가,

지상으로 하강(下降)하여 내려오니,

물고기, 거북이, 멧돼지, 야마(羅摩) 등으로 나타난다.

부처 역시 전세(轉世)하여 지상에 내려온 화신(응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미륵이 변화하여 포대화상을 모습을 보이고,

지장보살이 신라의 김교각이 된다든가 ...

이리 모습을 바꾸어 현현(顯現)하는 사연은 무엇인가?


나만 하더라도,

어떤 사이트에서는 닉을 甲으로 하였다가,

또 다른 사이트에선 乙로 변신하여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이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

도달한 지경(地境), 만나는 사람, 그날의 인연에 따라,

변신(變身)하여 오늘과 앞날을 바르게 지향하고자 함이라.


가령, 인도 종교에서 비슈누가 물고기로 변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홍수가 났을 때, 그럼 돌덩이로 변신할 텐가?

비슈누가 물고기로 변신할 때라야, 

물속에 빠진 인간을 구하기 수월한 법.

이렇듯, 응신은 처처에 맞도록 응변하여 응신(應身)함이니,

자유자재로 사태를 처리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The Ten Avatars of Lord Vishnu)


헌즉 때마다, 처(處)마다 닉을 바꾸고,

아바타를 달리함은,

모두 처변(處變)하여 응변(應變)함으로써,

맞춤 때에 임하고, 상황에 대응하며, 미래를 전망하고자 함이다.


관음보살은 얼굴이 여럿으로 변화기도 하지만,

눈 또는 팔이 여럿으로 바뀌어 등장하기도 한다.

일면사비(一面四臂), 삼면사비(三面四臂), 삼면육비(三面六臂), 십면팔비(十面八臂),

십일면이십비(十一面二十臂),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등이 그것이다.

32 또는 33 응신이라 하지만, 관음의 변신은 과시 무량이라 하겠다.


千手든 多臂이든 게다가, 千眼을 갖춘 多面의 관음으로 나투시는 바,

이는 시방(十方)에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빠짐없이 살펴,

그들을 제도하기 위한 최승(最勝)의 능력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리라.


※ 十方


음으로는 십방이지만, ㅂ탈락이 일어나 시방으로 소리 낸다.

동서남북 사방(四方)과 그 사이사이인 4유(四維), 

그리고 상하(上下) 도합 10 방향을 가리킨다.

前, 後, 左, 右, 前右, 前左, 後右, 後左, 上, 下

이리 되는 폭인데, 

나는 공간에 대한 기하학적 균등 분할을 위해선,

十方이 아니라, 기왕에 수평 평면을 여덟으로 분할한 이상,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제 十六方을 더 보태 二十六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上과 각 前, 後, 左, 右, 前右, 前左, 後右, 後左

또 下와 각 前, 後, 左, 右, 前右, 前左, 後右, 後左 

사이 중간 부분 방향도 고려하여야 공간 분할이 균등하게 된다.


나는 소싯적부터 이런 생각을 하곤 하였는데,

직교좌표계처럼 차라리 前, 後, 左, 右, 上, 下의 6방(六方)이라면 모를까,

시방은 공간 분할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한 표현법이라 생각하였다.

역법(曆法)이나 명리학(命理學), 풍수학(風水學)에서 말하는,

육합(六合)은 또 다른 평면 또는 공간 분할, 작용 개념이라 하겠지만,

어쨌건 공간을 분할 하려고 할 때는,

균등(均等, equality, uniformity)이나 균질(均質, homogeneity)성이, 확보되어,

등가성(parity)이 행위나, 존재의 질점(質點)이 처한 위치에 부여되었어야,

충실한 표현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현실의 장(場)은 등가 원리(equivalence principle)에 의해,

중력의 영향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공간의 곡률(curvature of space)은 처처마다 다 다르다.


설마하니 시방이 이를 알고, 암시한 것은 아닐 터.

그러함이니, 일단, 원리적으로는 공간 분할은, 균등성을 기초로 하여, 설정되어야 하고,

실제적 공간의 휨은 그 다음의 일이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좌표계는 여럿이 있는데,

직교 좌표계(直交座標系, rectangular coordinate system, Cartesian coordinate system),

극좌표계(極座標系, polar coordinate system)

원통좌표계 (圓筒座標系, cylindrical coordinate system)

이 모두는 공간 분할, 좌표 설정에 있어,

균등, 균질적이다.


허나, 十方이란 것이,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엄밀한 것을 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학적, 철학적인 추상적 상대 지칭 개념어로 역할 하고자 한다면,

나처럼 엄밀함을 따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저 형용의 쓰임 정도로 받아들이고 넘어가도 족하리라.

하지만, 저것이 충분한 말은 아니란 것은 알아둠이,

어찌 무용한 노릇이랴?


또한 시방이란 말은 그저 공간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우주 전체, 나아가 거기 사는 사람, 문화를 형용하는데도,

쓰이고 있음이니, 이젠 저 말 앞에만 서면,

알 수 없는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공덕을 발휘하고 있다.

마치 관음보살의 치맛자락이 문득 애저녁 해그늘 바람에 흩날려,

이는 향기가 일어나는 양 싶은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十方來十方去


온 세상으로 가고 옴이라,

이, 함축적 말법의 쓰임이란,

얼마나 향기롭고, 그윽한가?


외려 하나의 얼굴, 하나의 눈, 팔이라면,

어찌 관음이 변신자재(變身自在)하며,

다할 바 없는 환난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실 수 있으랴?


헌즉,

혹간 닉을 제 이름으로 여전히 새겨 두고,

오연하게 머리를 고추 세우는 이들의 뜻이 굳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은 아마도 응신이나 보신이 아니라,

법신(法身)의 당체가 아닌가도 싶어,

그 놀라운 의지와 꿋꿋함에 다시금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현상계엔, 도도처처 수많은 중생이 진흙 구덩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차라리, 수많은 모습으로 나투는 응신들의 현현이야말로,

이곳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음이 아니더냐?


아바타는,

그런 의미에서,

관음, 지장, 문수 등의 나툰 모습을 지칭함을 넘어,

제(諸) 존재의 꿈이어도 좋고,

지향이어도 좋고,

다짐이어도 좋으나,

개개 각각은 자신을 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어,

외려, 돌려(廻向), 자신을 무량광 한량없는 빛으로,

또 천상에서 나리는 만다라 꽃비로,

그래, 그 표상으로서 당당히 자리하기를 바란다.


네티즌이 아바타를 사용한다 할 때,

이는 가령 관음, 문수를 대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당체가 되는 신비 체험의 경험역 안으로 진입하여야 한다.


곧 아바타와 자신이 따로 분리된 존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아바타가 기어이 되고 말아야 한다.


이런 굳건한 자기 자신과의 약속의 투사(投射),

그 기능 작용 내용이 아바타로 빌려 표출된 것이지,

나 외에 별도의 아바타가 상정될 이유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서유기(西遊記)를 읽다 보면,

흔히 손오공(孫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을 만나게 된다.


본디 현장(玄奘, 602~664)이 구법(求法) 하러, 천축(天竺)으로 향할 때,

도중 고창국(高昌國)에서 현장이 왕의 배려로 이들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데, 이 글 주제와 관련되어, 여기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悟空, 悟能, 悟淨이다.

소설에선 나오지 않지만, 

실제 悟慧까지 총 4명의 제자를 얻는다.


이들은 소설 속에선,

각기 손오공(孫悟空, 猻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을 가리킨다.

悟空, 悟能, 悟淨

여기 돌림자로 悟가 등장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혈연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무슨 말인가?


원래 동북아 전통엔 가명(假名)을 즐겨 쓴다.

하기에 이름 외에 관명(冠名), 자(字), 호(號) 등을 갖는다.

悟空, 悟能, 悟淨은 출신 성분, 혈연이 모두 다르다.

헌데, 이제 현장 문하에 들었은 즉,

모두 형제가 되고, 스승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허니, 같은 돌림자로써, 이들을 결속하고, 

법을 지키는 동지가 되는 법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같은 혈족이라면, 굳이 이름을 빌어, 한데 아우를 필요가 어디에 있음인가?

저렇듯, 천하에 흩어져 따로 살던 이들이,

어느 인연 따라 한데 모일 때, 같은 이름자로써, 결속함이니,

그 사연이 어찌 애틋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기실 이리 돌림자를 함께 쓰는 것은 불교에서 기원한다.

이게 중국의 문화에 깊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이게 혈족에게도 그 이름자를 함께 하는 풍속이 되었으니,

아아, 사람은 이리도, 동혈(同穴)을 지향함인가?

生同衾,死同穴이란 중국 속담이 있다.

 - 살아서는 한 이불, 죽어서는 한 구멍.

願同穴一時喪禮盛

 - 원커니와 한 구멍에 일시에 상례를 치르길.

금병매(金瓶梅)의 한 편명이다.

이리 이름으로 짓고, 원으로 맺기를 바라나,

가족 그 누가 한날한시에 죽는가?

모두는 가을날 흩날려 허공 중으로 흩어지는 낙엽처럼,

뿔뿔이 떨어져 사라지지 않던가?


여기 농장 앞에 있는 부대 하나.

지금은 부대가 떠나고 비어있다.

한 해에 꼭 두엇은 길가에 서서, 고개를 빼고는 부대를 기웃거린다.

모두 제대 군인이다.

내가 그들을 발견하면, 소리를 빽 지른다.


‘그 징글징글했던 곳을 어이 아직도 잊지 못하고 또 찾아 왔는가?’


내 소리를 두고, 그와 나는 한바탕 크게 웃는다.

수구초심(首丘初心)도 아니고,

저들은 그 먼 길을 지나, 왜 또 와서 여기 서서 서성거리는가?


이십여 일 전에도 여기 출신 장교가 하나 찾아왔다.

얼마 전 친구들끼리 술을 먹는데,

마침 지난 시절의 부대 생활이 화제가 되었단다.

하여, 오늘 시간을 내서 여기를 찾아왔다고 이른다.


그가 그 시절 겪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낸다.

그와 나는 손을 맞잡듯,

함께 추억에 취하여,

눈을 가르슴하니 감고,

그 먼 길을 재우쳐 거슬러 올라갔다.


손오공을 두고 보면,

悟空은 空을 깨우쳤다는 말이다.

소위 심원마의(心猿意馬)라, 

마음과 뜻이 원숭이나 말처럼 날뛰는 것을 형용하고 있다.

원숭이 손오공이야말로 空을 제대로 깨우쳐야 한다.

그러함이니, 悟空으로써 이를 경계한 것일 것이다.


저팔계의 八戒는 현장이 후에 붙여 준 것인데,

원래는 悟能이었다.

저팔계는 七十二變이니 三十六變이니 하여,

법술을 펴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돼지처럼 욕심이 커서 더 이상 능력을 발전시킬 수가 없다.

헌즉 이를 염려하여 悟能이라 하였을 터이다.


사오정의 悟淨은 그럼 무엇인가?

이는 그가 수행이 얕은즉, 

그저 남은 것은 청정심(淸淨心)을 닦는 것밖에 없다.


이렇듯, 저들의 법명(法名)은,

모두 그들의 기질 한계를 직시하고,

바른 깨달음을 기약하고자 하는 원망(願望)을 담고 있다.


아아,

그러함이니,

우리가 어느 날 한 사이트에 들려,

자신의 아바타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으로 정하였다고 할 때,

저들의 이름 자 함의가 悟空, 悟能, 悟淨, 悟慧임을 알고나 짓는 것이랴?

따지고 보면, 원숭이, 돼지, 해골 목걸이를 한 괴물 ...

이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는다 하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이루게 된다.


아아,

그러함이니,

기실 따지고 보면,

悟空은 空을 깨우치면 담박에 수보리(須菩提)가 되는 것이며,

悟能, 悟淨들은 바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될 터이다.

이렇듯, 그 이름으로써, 그 뜻을 가슴에 품고, 수행을 하여,

마침내, 도피안(到彼岸, 파라밀다, 波羅蜜多)

그렇다, 그 생사를 여읜 구극(究極)의 피안에 도달하게 됨이다.

(※ 須菩提 : 解空第一이란 별호가 있듯,

그는 부처의 제자 중 제일 空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하여, 금강경, 반야심경에 부처의 대화 상대로 등장한다.)


이제 아바타의 이해 기반이 얼추 설명이 된 폭이다.

우리가 어느 사이트에 가입하여,

아이디나 별명(別名, nick)을 짓고, 아바타를 설정한다.

이러할 때, 그게 그저 시시덕거리며, 재미를 느끼고자 할 수도 있으나,

여기엔 이런 뜻이 숨어 있음이라,

이제, 우리는 저 진실된 징험(徵驗)의 세계로 진득하니 진입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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