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
두꺼운 책
가끔씩 어디 가서 혹간 긴 댓글을 달면,
그들은 나의 글 그림자를 보고는 기겁을 하곤 한다.
댓글을 다는 잣수를 제한하는 사이트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한들 대개는 글 토막을 부려놓기 일쑤다.
단말마(斷末魔)의 외마디처럼,
저들은 막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그렇게 싸지르고는 죽는다.
그리고는 좀비처럼 다시 일어나,
어느 곳에 이르러 또 싸지르고 죽어감을 되풀이 한다.
그 자리엔 도대체 숙고(熟考), 아니 이를 바라지도 않는다.
숙고가 아니더라도 거긴 이성적 판단은 없고,
토끼 똥처럼 짧은 감정의 배설 흔적만 남아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찾으려 한들,
그 자리엔 번뜩이는 기지라 할 것도 없이,
그저 즉발적인 감정의 파도가 포말(泡沫)이 되어,
갯바위 댓글 창에 덧발려지곤 한다.
개들이 흘레질을 할 때, 암컷이 투정을 부리면,
수컷이 문전에 싸지르고는, 그저 헐레벌떡 씩씩거리며,
물러나 연신 침만 질질 흘리는 형세라고나 할까?
거긴 저 짐승들의 본능적 충동만 목격되고 만다.
저들은 도대체가 긴 호흡을 할 존재가 아니다.
만화책도 두꺼운 것은 미처 새기기 버거워,
차라리 책상에 고꾸라져 봄꿈을 꾸는 것이 수지맞는 일이라 여길 것이다.
요즘 세상이 편해졌다.
블로그도 보면 글은 사라지고,
수십 장 사진을 올려 두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나마 이 정도면 좀 낫다.
사진 찍는 것도 수고로운 일이고,
이를 다시 올리는 일도 정성을 기우려야 한다.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그 사진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고,
자리를 배치하며 정리하는 동안,
생각이 가지런해지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익어간다.
이것 전혀 무용의 것이라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는 대개 지난 사물을 대하여,
소극적인 자가 소비, 소일(消日)이 아닌가?
(소일이란, 하루를 지운다는 말이다.
하루를 재우고 끄는 일에 종사한다는 말이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거울에 투영된 제 그림자를 되풀이 하여 소비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도대체가 거긴 창조적인 정신 활동이 부재(不在)하고,
다람쥐가 체 바퀴 위에 올라,
연신 지나간 자신의 굴렁쇠 자취를 재우쳐 추적하는 행위만 남아 있다.
저 나르시시즘에 빠진 소년, 소녀들의 행렬들.
이젠, 저 짓도 성가시고 벅찬 일이라는 듯,
트위터, 인스타그램 따위에,
사진 몇 장 올리고,
한 마디 싸지르고는
커억 트림하며, 거드름 피우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러고서도,
냉수 먹고,
이빨 사이에 낀 고깃점 빼낸다고,
연신 이쑤시개로 쑤시며,
큰일하고 있다는 듯 가슴을 내밀며 뽐내는 이들도 많다.
내 한 가지 생각이 있다.
세상이 이럴수록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한다.
얇은 책을 읽으면 마음도 가벼워지며,
두꺼운 책을 읽으면 정신이 깊어진다.
‘두껍다, 얇다’라 가벼이 이야기하는 내가 마땅치 않다.
허나, 심통 부리며, 내처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싼 책 말고, 비싼 책을 읽어야 한다.
최소 4~5만 원짜리 이상 되는 책을 읽을 일이다.
묻는다.
그대 당신은 근래 1000 페이지 넘는 책을 읽은 적 있는가?
그대가 만약 100 페이지짜리 책을 즐겨 읽는다면,
그대는 레벨 100을 넘을 수 없다.
만약 1000 페이지 넘는 책을 읽어낼 수 있다면,
당장 블로그를 사진만으로 채우지 않아도,
써놓을 것이 옹달샘처럼 새벽 마다 새록새록 고일 것이다.
두껍다, 비싸다 ...
이 말은 기실 천박하다.
나도 안다.
그러하기에,
나는 부러라도 천박한 말에 기대어,
기꺼이 천박한 세태를 고발한다.
‘미남은 결코 자기 사진이 필요 없다.’
사진이 필요하기에,
얼굴에 칼질하고,
몸뚱이에 톱질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외물에 엎어져,
치달아 달려 나가기 바쁘다.
心馳神往
마음을 변방에 앗기고,
다만, 넋 내주고 달려 나가기 바쁘다.
‘미남은 결코 자기 사진을 찍지 않는다.’
제 얼굴에 자신이 없으니,
사진을 찍어 대신 내보여야 한다.
게다가 뽀삽질을 하면,
아무리 추물도 미남, 미녀로 바뀐다.
서시봉심(西施奉心)이라,
미녀도 아닌 것들이,
저마다 서시를 꿈꾸며 가슴에 손을 얹고,
행세를 한들, 따라갈 수 있으랴?
한 번 시험해 볼 일이다.
사진 열 번 찍는 짓을 한 번으로 줄이고,
두껍고, 비싼 책을 읽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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