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하마(聞香下馬)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봄은 꽃단장하고 찾아온다.
(작년에 일기불순으로 작황이 예년에 비해 사뭇 못 미쳤는데, 올해는 꽃망울이 튼실하다)
문향하마(聞香下馬)란 글귀는,
그 전거(典故)가 이백(李白)에 가닿아있다.
(소동파(蘇東坡)란 일설도 있다.)
옛말에,
真金不怕紅爐火,酒香不怕巷子深。라,
즉, 진짜 금은 제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술향은 골목이 아무리 깊어도 꺼리지 않는다 하였다.
聞香下馬라,
향이 나면, 말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으며,
知味停車라,
참 맛을 아는 이는 수레를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요 시절 잠시잠깐,
매화꽃 향을 대하지 않으면,
명년을 다시 기약하여야 한다.
들리는가?
듣는가?
문향(聞香) - 향을 듣고,
관음(觀音) - 소리를 보는,
이 crossover하는 오감의 경지.
순결한 숨결은 귀가 코가 되고, 눈이 귀가 될 때라야 마음으로 만질(觸) 수 있다.
도대체, 코로 냄새를 맡거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얼마나 속된가?
신선이라야,
향을 듣고, 소리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매화나무 밑에 서면,
마음이 가지런해지며,
저 그윽한 곳으로 그저 침잠하고 만다.
요즘 보면, 맛객이라 칭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먹고살 만들 하니, 맛 찾아 삼만 리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허나, 진짜배기 미식가는 혓뿌리를 앞세워 골골 누비지 않는다.
다만 눈을 지그시 감고 귀로 취향(取香)할 뿐이다.
이를 취문(嗅聞)내지는 문미(聞味)라 한다.
냄새를 듣고, 맛을 듣는다.
이쯤이면 맛을 혀로, 향을 코가 아니라,
귀로 듣는 경지가 아연 지펴지시는가?
옛 사람은 감각기관 어디 하나에 매어 계시지 않았음이다.
두루 통섭 걸림이 없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취문(嗅聞)도 그러하지만 관음(觀音) 역시,
대경(對境)의 짝이 되는 인식능들을 살펴보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차서(次序)가 어긋나 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작용자인 근(根)이 소연(所緣)되는 경(境)보다 언제나 한두 발 앞서,
짝이 맺어져 있다.
능연(能緣) 즉 인식 주체가 한 두 단계 낮은 것으로,
소연(所緣) 즉 그 객체를 대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꼬붕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두목이 나설 일이 있겠는가?
割雞焉用牛刀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쓸 수 있음이랴?
물론 저 경지를 넘어서면 이젠 차서가 문제가 아니라,
넘나들기를 팔난봉이 야밤에 과붓집 드나드는 것처럼 걸림이 없게 된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욕계(欲界) 말씀을 보탠다.
욕계엔 육천(六天)이 있는데,
그중 화자재천(化自在天)의 세계에선 자기 스스로 향락을 만들어서 즐길 수 있다.
그 아랫 단계인 도솔천의 경우만 하여도 다만 주어진 것을 즐길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스스로 향락을 창조하여 노닐 수 있게 된다.
또한 상향소(相向笑)라 하여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웃기만 하여도 음행(淫行)이 만족된다.
다음 꼭대기 하늘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경우엔,
자기가 수고롭게 향락을 만들어 노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시중드는 천신들이 향락을 대신 만들게 하고는 그를 즐기는 경지를 말한다.
이곳에선 상시(相視)라 하여 서로 슬쩍 보기만 하여도 음애(陰愛)를 즐길 수 있다.
취문(嗅聞) 따위의 crossover 경지는 우스운 게다.
도대체가 마냥 즐거운데 애써 수행을 구할 필요도 없게 된다.
때문에 이런 하늘 세계가 외려 인간 세계보다 부처가 되기엔 더 어렵다고들 하는 것이다.
허나, 또 다시 깊이 생각해보면,
도대체, 애써 수행을 구할 필요도 없는데, 도를 이루는 것 하고,
애쓰고, 발분하여 수행을 하고, 도를 이루는 것 하고,
어떠한 것이 더 높은 경지인가를 바로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