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인드라망(因陀羅網)
코로나19와 인드라망(因陀羅網)
코로나19가 온 지구를 퍼져나가자,
방역당국은,
마스크 착용(wearing mask),
손 씻기(hand-washing),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등을 권장하고 있다.
헌데, 언제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엊그제만 하여도,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연대하고 소통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들은 사랑이 엷어지고, 연대와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충분치 못한 현실 환경을 일정분 전제하고 있다.
그러기에, 애써 권청(勸請)하고, 강조하며,
사회적 환기를 꾀하고 있는 것이리라.
기실, 연대와 소통을 구하고 있는 모습은 내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소통을 구하는 이들 중엔,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신념 체계 안으로 타자를 강제로,
갈고리 걸어 이끄는 즉, 구인(鉤引)하려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연대를 외치는 이들 역시,
제 이해의 관철을 위해, 상대를 동원하고 얽고자 하는 경우를,
적지 아니 목격하곤 한다.
내가 시골 생활을 하자,
여기 동네에 있는 여호와증인이 근 2년 간,
질기게도 찾아와,
연대와 소통을 구하였다.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는 이젠 포기하였는지,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그들보다 사뭇 질긴 위인이다.
(※ 참고 글 : ☞ 포교(布敎))
정치 사이트엔,
인간들이 늘상 목울대를 붉히며 연대, 소통을 외친다.
내가 보기엔 대다수가 빠돌이들이다.
잿빛 밤하늘 쳐다보며 울부짖는 늑대 목소리는,
그 처연함으로 우리를 숙연케 하나,
저 빠돌이들의 달뜬 영혼들이란,
길 잃고 어두운 숲을 헤매는 이매망량(魑魅魍魉)을 방불한다.
그들 외침은 그저 슬프게 여겨질 뿐이다.
신천지 역시 길거리 전도를 하며,
자신의 신분을 속이며,
순진한 사람들을 꾀지 않던가?
따라서, 연대나 소통보다,
더 선행하는 가치는 개인의 주체적 각성(覺醒)이라 하겠다.
각성은 소통이나 연대를 통해 학습되고 배양되기도 하지만,
최종적 사태가 일어나는 종착역은 개별 주체 안이다.
따라서 각성은 개별적이며, 선행하는 가치다.
(※ 참고 글 : ☞ private distance(個人距離))
이것을 잊으면,
미혹을 벗어날 수 없다.
묘한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개별 인간 단위가 홀로 낱개로 존재하지 않음을 일깨우고 있다.
미처, 인간들이 주체적 각성도 하지 못하고 있는 판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 그대들은 홀로 살지 못하는,
사회적 존재임을 재우쳐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함이니, 사회는 물론, 개별 인격 주체인 인간들이,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신천지 교도들은 자신들만 영생하겠다며 깊은 해자(垓子) 파고, 높은 성곽을 둘렀다.
게다가, 성곽 안에 들어온 이도,
144,000안에 들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며,
재우쳐 울을 쳐놓고 사람들을 궁박하였다.
이제 그 수가 차자, 다시, 시험을 치겠다면,
거푸 허들을 세우고, 나래비 줄을 세웠다.
정작 구원은 요원한데,
종국엔 온천지마저,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불각시(不覺時)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미몽 속을 헤매는 이들을 잡아 흔들며 일깨웠다.
화엄경엔 인드라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因陀羅網
梵語 indra-jāla。(一)又作天帝網、帝網。為帝釋天之寶網,乃莊嚴帝釋天宮殿之網。網之一一結皆附寶珠,其數無量,一一寶珠皆映現自他一切寶珠之影,又一一影中亦皆映現自他一切寶珠之影,如是寶珠無限交錯反映,重重影現,互顯互隱,重重無盡。華嚴經以因陀羅網譬喻諸法之一與多相即相入、重重無盡之義;若依境而言,稱為因陀羅網境,依定而言,稱為因陀羅網定,依土而言,稱為因陀羅網土,此皆為顯示事事無礙圓融之法門。
(華嚴經探玄記卷一、華嚴五教章卷一、慧苑音義卷下)
인드라망은 天帝網, 帝網이라고도 하는데。
제석천의 보물 그물(寶網)이다.
제석천 궁전을 이로써 장엄한다.
그물망의 코 하나하나에 구슬이 맺혀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낱낱의 구슬은 모든 다른 구슬의 모습을 비춰 드러낸다.
또한 그 비추인 모습들 가운데엔 다시 모든 다른 구슬의 모습이 비춰 드러난다.
거푸 거듭되어 그 모습들이 드러나고,
서로 드러내고 감춘다.
이를 거푸 거듭 끝없이 되풀이 한다.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으로써 제법(諸法)의,
일대다, 상즉상입(一與多相即相入)이,
무한히 거듭되는(重重無盡) 실상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 網上圖片)
하니까, 존재나 법(法, dharma)은,
一與多相即相入
重重無盡
함을 가르치고 있다.
나와 타자는 서로 동체(同體)이며, 포함관계임을 언명하고 있다.
한편 그 관계가 일회적이거나, 일편적인 것이 아니라,
처처불문, 시시무진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존재가 얽혀 있음을,
벼락 천둥이 되어,
온 지구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정작 필요한 것은,
social distancing 나아가 public distancing이 아니라,
personal distance(private distance) 안에 들어,
내적 각성(spiritual enlightenment)을 혁명적으로 일으켜야 한다.
이는 마치, 중국무술 영화를 보면 접하듯,
동굴 속에 들어가 폐관수련(閉關修練)할 호기로 삼아야 한다.
본디 불교에도 이런 행법이 있으니,
밀실이나, 심산엄동(深山巖洞)에 들어가 사람을 피하여,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청정(淸淨)히 하며,
유가행(瑜珈行), 관상(觀想), 송주(誦咒), 염불(念佛)을 한다.
장소나 시간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일관(日關), 월관(月關), 년간(年關)의 시간별 구분법이 있으며,
암실에서 하는 흑관(黑關),
노천양광(和露陽光)에서 하는 백관(白關)의 구별도 있다.
실내에서 하는 내관(內關),
조장(鳥葬)터인 소위 응장장(鷹葬場), 또는 물가 등 야외에서 하는 외관(外關)이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야말로 응장장(鷹葬場)이라,
바로 이 장례가 치러지는 곳이 아니랴?
여기 화장터를 응시하라.
인도의 시인 까비르(kabir, 1440~1518년)처럼,
화장터를 공부의 자리로 삼을 일이다.
그는 화장터에 거하며,
아침 이슬보다 더 영롱한 영성 가득한 시어를 빚어내었다.
타다 남은 사람 뼈다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빛나는 옥구슬을 꿰어내셨음이다.
마스크 착용(wearing mask),
손 씻기(hand-washing),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이리 혼자만 기를 쓰고 살아남겠다며,
정신 사납게 설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여기야말로,
수승(殊勝)한 도량(道場)임을 알 일이다.
각성(覺醒)을 두고,
불교학에선 대개 enlightenment라 번역한다.
en은 in이나 put의 뜻을 갖는다.
빛이 내적으로 던져진 상태를 의미한다.
覺醒이란 술 취한 미몽에서 깨우친 상태이니,
잘 들어맞는다 하겠다.
한편 각성은 다음과 같은 영역도 가능하다.
이것 제법 재미가 있은즉,
대충 일별해두고자 한다.
disenchantment
enchant란,
마법 주술에 걸린 것이니,
빠돌이처럼 무엇인가에 홀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disenchantment는 그것으로부터의 이탈 상태를 말한다.
dishallucination
hallucinate는 환각, 환상에 빠진 상태를 지칭한다.
그러함이니, dishallucination는 그것의 반대 상태를 뜻한다.
이 글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에 따라,
바로 앞의 글, [색경(色鏡)]에 이은,
동일한 결론에 이르는 또 다른 한 생각을 기술한 것이다.
지금, 여기야말로,
수승(殊勝)한 도량(道場)임이니,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깊이 반성하고,
좋은 도리를 찾아내,
그대로 실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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