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1/n

소요유 : 2021. 3. 26. 11:21


내가 어제 글 하나를 우연히 읽었다.

(출처 : facebook)

이야기를 잇기 전,
우선 읽어 둘 일이다.
제법 그럴싸하니 재미가 있는가?

나는 이것 읽자마자 이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저 글은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선동에 불과하다.
거기선, ‘하나’의 중요성을 거푸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하나가, 
사물의 향방을 결정하고,
성공의 열쇠라며,
읽는 이들을,
그이가 규정한 결론으로 손잡아 이끌며 몰아가고 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저 주장은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저 글 속의 주장대로 설혹 하나가 중요하다 한들,
저것으로써,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주워섬기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저 노인이 악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갔다면,
그로 인해, 나쁜 상원의원 하나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그의 활약으로, 미국이 텍사스를 잃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법.

그는 오직 제 편의를 위한 성공 사례만 주워섬기고 있다.
(아니, 성공이라 규정하고픈.
아마, 세상의 헛된 전설, 신화 그리고 종교조차도 이리 꾸며질 것이다.)
역사적 사례로 찾아내자면,
실패 사례도 얼마든지 들춰내 꿰어 엮어낼 수 있다.
헌데, 과연 저 노인의 행동 하나만이,
최종 결정에 기여를 하였단 말인가?
당장 저 노인 이웃 노파는 반대파에게 표를 주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소 저 마을 노인네들의 표는,
상계(相計)되어 투표 결과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편 멕시코 입장에선, 저 한 표로 인해,
국부를 잃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헌즉, 이때라면,
저 한 표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조건이 되고 만다.

그러니, 정작은 한 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써,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이의 내심의 의사, 의도에 따라,
한 표의 가치 평가가 자의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이야기가 윤색되고, 꾸며지는 이 현장.
나는 과학, 진실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신앙 설교만을 목격한다. 

이로 보건대, 당장 저 한 표의 주장이란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 판단, 감정적 선동이란 것을 당장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기실 저 동원된 서술의 부당함을 지적하는데,
온전한 논거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알기 쉽게,
저 펴는 논리를 딛고, 거꾸로 그 허구를 지적하였을 뿐이다.

통계치라는 것은 어느 특정 하나가 아니라 집단의 표상(表象)일 뿐이다.
낱낱의 하나가 아니라, 이들 전체를 아우르는 집합적 결과로 드러나는 지표 가치란 말이다.
오직 저 노인 하나로써, 사물의 내용이 규정될 수도, 되는 것도 아니다.

(출처 : Normal distribution)

저 특정된 노인 하나만으론 결코 모집단의 표상 내용을 알 수 없다.
저 노인의 역할 비중은 다만 1/n에 불과할 뿐이다.
헌데, 저 글의 필자는 마치 하나가 모든 것인 양, n/1
열을 올리면서 뭇 우중(愚衆)을 선동하고 있다.
낱낱의 모든 개인들을 모은 n이 되어야,
이때 비로소, 최종 결과가 도출될 뿐이다.
아무리 높이 쳐준다 한들,
저 노인의 결정 기여도는 1/n을 결코 넘을 수 없다.

한마디로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 개별 사례로 전체 사물을 왼통으로 재단하고 있으니,
논리 비약이 너무 심하다 하겠다.

같은 패거리를 규합하는데,
저런 선전 선동술이 먹힐 수는 있겠다.
아울러, 얼치기 우중(愚衆)을 견인해내는 데 쓰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바른 가치 판단 자료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외려 자칫 감정에 매몰되거나, 선동에 오도되어,
그릇된 판단을 내릴 위험조차 있다.

나는 당장 저 글을 쓴 이는 문과 출신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여축없이 그는 그렇더라, 
이공과 출신, 그리고 바로 공부를 한 이는 절대로 이런 식의 글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사물을 과학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선거가 중요하다 한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혹여 투표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 할 손,
그 선거의 가치, 의의를 설파하면 하였지,
바르지 못한 선동으로써 사람을 꾀지는 않는다.

내가 전에 쓴 글이 여기 하나 있다.
(※ 참고 글 : ☞ 항아리 속 젤리)

당시 나는 그 교설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논파하였다.
거기, 역시 어줍지 않은 논리로,
젤리를 들어 한참 언설을 늘어놓은 이가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그 분도 직업이 같았다.

편협하지 않고 균형잡힌 논설을 펴려면,
그리고 누구든 합리적 인간을 지향한다면,
과학적 태도를 배워둘 일이다.

그 반성으로 가령, 사회학도 요즘엔 사회과학이라며,
과학적 방법론, 태도로 학문을 하지 않던가?
이는 과학 만능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과학 이 양자는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건너는 두 날개임을 강조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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