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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

소요유 : 2021. 3. 24. 12:37


2011년 박원순이 서울 시장에 도전했을 때.
그 최종 상대는 한나라당 나경원이었지만,
기실 그보다 앞서 안철수와 단일화가 더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오세훈이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시의회와 갈등을 빚다가,
스스로 승부를 건 주민투표 결과,제안 투표율 미달로 오세훈은 시장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하여, 지금처럼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박원순은 그 선거에서 이기고도, 다시 내리 2번이나 더 연임하게 된다.
그런데, 작년 그의 자살로, 
꼭 10년 만에 다시 또 시민들은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다.

그제나 이제나,
그 중심에, 오세훈, 박원순, 안철수가 있는 셈이다.
이들은 도대체, 서울 시장 자리를 두고,
이리 마치 자녀목(姿女木)이라도 되는 양,
떠나지 못하고 원귀(冤鬼)가 되어,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왜?

저들은 귀신이 되었는가?
정녕 시민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자신을 위한 것인가?
원귀는 怨을 품고 죽어, 恨 풀기를 원망(願望)할 뿐,
도대체가 다른 이를 돌볼 이유도, 여지도 없다.

안철수는 두 번이나 모두 미끄러지고,
오세훈은 한 번은 퇴진, 그리고 다시 도전할 기회를 거머쥐었다.
한 편, 박원순은 자살로 현실계에서 사라져버렸다.

박원순이 시장 후보로 나올 때,
당시 동물보호 단체에선 박원순을 적극 밀었다.
왜 그런가 하면, 당시만 하여도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이,
요즘보다 사뭇 떨어지던 시절이라,
박원순처럼 동물보호 운동의 선각자인 인물이 귀했기 때문이다.

‘동물권의 전개와 한국인의 동물 인식’ (1994, 박원순)
(첨부 파일 참조

동물권의_전개와_한국인의_동물_인식(박원순변호사).doc
0.11MB

)

박원순의 이 논문은 동물보호에 대한 서양의 역사적 이론 전개와,
그 구체적 실천 내용을 잘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나는 2000년도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동물해방’을 읽고,
책을 덮자마자 당일부터 바로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수도승보다 더 철저히 15년간 이를 지켰다.
동물해방이란 책만큼 나를 각성시키고, 충격을 준 책이 이제껏 없었다.

당시 나는 박원순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고,
안철수에 대하여는 익히 알고 있던 바라,
내심으로 그를 지지하였었다.

헌데, 동물보호 단체에서 적극 박원순을 밀고,
그의 선거 운동을 하자, 바로 저 논문까지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피터 싱어의 가르침에 경도되어, 
저들 훌륭한 선각자에 대하여 서서히 앎의 지평을 넓혀가며,
현실 한계 조건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일을 찾았다.

그 후, 박원순의 시장직 수행을 지지하였다.
그는 서울시 예산을 절감하여,
그 고질적인 해마다 되풀이되는 보도블록 교체를 없앴고,
GMO 표시제에 대하여도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반한,
적극적 관심을 표하고, 정책도 시행하였다.
그는 시민을 위한 문화, 복지 정책을 보다 깊고, 넓게 폈다.
공공형 어린이집, 마을 도서관 확충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정책이다.

그는 민주당 소속이지만, 
기실 그들과는 기질적으로 차이가 커,
실사구시 하는 진보정책을 더 적극 추진, 시행하였다.
지금 문가 무리들은 무늬만, 입만 진보지,
실질은 위선 보수에 불과하다.

허나, 2020년 비서로부터 성추행 고소를 당하였다.
그의 자살로 사법적 판단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여러 드러난 사실로 보아,
성추행은 사실로 보인다.

민주당 무리들은 고소인을 두고 ‘피해 호소인’이라 부르며,
사실을 덮는 데 급급하였다.
속칭 피해 호소인 삼인방이라 부르는,
남인순, 진선미, 고민정
이 셋은 모두 여자들이다.
실로, 몹쓸 자들이다.

박원순은 정말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나
~
박원순은 미래 가치와 생활 이슈에 가장 민감하고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딱딱한 행정에 사람의 온기와 숨결을 채우려 무던히 애쓰던 그의 열정까지 매장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뉴욕의 센트럴파크 부럽지 않을 
용산 공원의 솦 속 어느 의자엔가는 
매순간 사람의 가치를 높이고자 치열했던 박원순의 이름 석자를 소박하게나마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출처 : 임종석, facebook~myjsstory)


기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임종석의 저 말을 접하고 나서다.
특히, 

“용산 공원의 솦 속 어느 의자엔가는 
매순간 사람의 가치를 높이고자 치열했던 박원순의 이름 석자를 소박하게나마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이 말을 접하자, 피가 끓었다.

그렇다면, 성추행 피해자는 어쩌란 말인가?

박원순이 제왕이라도 되는가?
그가 설혹, 아무리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해,
헌신하였다 한들, 그는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스스로 버리지 않았던가?
피해자가 아무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피해 사실을 드러내고, 소를 제기하였겠음인가?

임종석은 참으로 몹쓸 사람이다.
그가 박원순을 추모하고 싶으면,
고인이 묻힌 곳에 조용히 찾아가,
술 한 잔 따르고 읍을 할 일이다.

공인으로 일을 하였던 자가,
이리 사적 감정인지, 정치 선전인지 모를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다니,
그는 참으로 몹쓸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피해자 편에 서서,
그의 아픔과 함께 하련다.
용기를 잃지 말기를 빈다.
 


‘세월이 가면' 모두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출처 : 픽사베이)

임종석의 의자 운운의 글을 접하자,
박인환의 시가 떠올랐다.

박인환은 벤치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두고,
그게 흙이 되고,
그에 덮혀, 사랑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 눈동자, 입술은 가슴에 있다고 노래했다.

그래, 그와의 추억, 사랑은,
벤치에 새겨 박제(剝製)시키는 것으로 과시할 것이 아니다.
임종석은 박인환의 사랑을,
느닷없이 정치로 오염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는 가슴이 없는 자라 할 밖에.
그는 몹쓸 사람이다.

게다가, 시인은 가슴도 그냥 가슴이 아니라,
서늘한 가슴이라 노래하고 있다.

의자를 두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사람의 가슴이란 서늘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임종석은 뜨거워지고 있다.
이 마당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그는 여전히 정치를 할 뿐임이라,
그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젊을 때 운동이란 것도,
그는 인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리 의심을 하고 만다.

사랑은,
현장에서, 오늘의,
가슴에 남기는 것이다.
서늘한 가슴 속에.

요즘 것들,
애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어디 밖에 나다니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다 사진 찍기에 바쁘다.

정작, 그들의 눈은 제 역할을 버리고,
다만 손만이 ‘일’을 할 뿐이다.
그래 그들은 ‘일’을 한다.
하기에 추억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도대체 오늘 이 현장에서,
왜 미래에 구매할 추억 생산에 종사하여야 하는가?
저들은 오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장사치가 되어,
생 날것의 오늘을 삶아 캔으로 봉해,
미래의 소비 단자(單子)인 추억 목록을 만들기에 혈안이다.
언제나, 오늘은 그들에게 부재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을 파는 장사치가 되어 간다.
정녕, 저들에게서 창기(娼妓)와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 참고 글 : ☞ ‘추억 만들기’ 유감)

저들은 사진을 보고 추억한다며,
한껏 정치질을 자행한다.

정치란 이렇듯,
현실을 유린하여,
제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팔아 재끼는 일에 열중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없다.

시인은, 사진이 아니라,
눈동자, 입술을 가슴에 남겨둔다.
그리고, 이제,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영원지속의 오늘이 된다.

추억은 의자나 사진에 새기는 것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추억은 그날 그때, 
그 눈동자, 입술을,
제 가슴에 담아, 감추는 것일 뿐.
그리고 그 서늘한 가슴 안에서,
영원을 살아간다.

인스타그램이라든가,
뭇 SNS라는 부박(浮薄)한 것들은,
사적 행위를
공개적 행사로 돌려버렸다.
마치 들병이들이,
제 치마 까내리면서,
허멀건 허벅지를 내놓고,
잔 술을 파는 것처럼.

사랑을 모르는 자들은,
추억을 생산하는 것도 모자라,
좌판 벌여놓고 팔기에 열중일 뿐이다.
그런데 이 짓 하지 않으면,
마치 새끼 잃어버린 고양이 상을 하고서는,
똥 마려운 강아지 행색으로,
종일 불안에 시달린다.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저 천박한 영혼들은,
제 가슴도 없은즉,
어찌 서늘한 가슴인들 알 수 있으랴?

시인은 없다.
다만 정치모리배들만 창궐할 뿐이다.
이 천박한 세태를 나는 마냥 염오(厭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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