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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 ⅱ

소요유 : 2021. 4. 18. 17:51


개똥 ⅱ

천불한당이 하나 있어,
개똥을 농장 출입구 앞에 노상 싸게 하고는 치우지 않고, 도망을 가기에,
며칠 전, 주의를 주었다는 말을 하였었다.
(※ 참고 글 : ☞ 개똥 ⅰ)

그다음 일은 어찌 되었을까?
우선 나는 이젠 개똥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행이다.

(출처 : 網上圖片)

그런데, 기실 그들은 하나도 달라진 바 없다.
왜 그런가?
그는 이웃 농장 출입구로 옮겨가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다.
아무리 시골 동네이지만, 남의 농장 출입구에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도대체가 도리를 저버린 이 인성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예기엔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禮不下庶人,刑不上大夫。
(禮記·曲禮)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는다.”
(※ 여기 刑이란 형벌을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는 사대부가 지켜야 할 것이고,
서민들에게 지키도록 강제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를 지키지 않아도 좋으니 외려 서민들에게 좋은 일인가?
예를 지킴으로서 인간인 것이다. 
예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미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대부는 예악을 따라야 하지만, 
대신 형벌은 받지 않는다 함은,
그들은 이미 인간 이상의 인간인 것이다.

아마,
죄를 짓고도, 
형벌을 받지 않는다 한들,
그 사대부는 차라리 죽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왜냐? 
명예가 더럽혀졌은 즉,
살아 있어도 이미 그는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돼버렸을 터.
더 이상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서인들은 예를 벗어난 존재이기에, 예를 지키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인격 주체가 아니고, 부림을 받는 객체일 뿐인 것이다.
다만 죄를 저지르면 형벌로 다스릴 뿐,
고상한 예법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지조차 않는다.
누가 짐승에게 예를 지키라 요구하는가?

오늘날과 같은 대중 사회(mass society)에서,
서민과 사대부의 차별이 없다.
여전히 인격 내용으론 서민에 불과할지라도,
차별 없이 대부의 지위로 대접을 해준다.
본디 예법이란 외부에서 강요한다기보다는,
개별 인격의 주체적 자각에 따라 자연 갖춰지는 행위 양식,
또는 내적인 자기 충족 원리인 것이다.

이게 현대 사회에선 누구에게나,
다 갖췄다 여겨 그리 대우해준다.
가령 모든 시민에게 표 하나 무게의 동일한 투표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시민적 자각 현실 내용은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리 돌멩이에다 매일 물을 준다 한들,
결코, 꽃이 피지 않는다.

여기 현대 대중사회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고대에,
한비자는 사회 규율을 어찌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
아주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를 잘하는 요순과 같은 성인을 기다리지 말고,
법적 시스템으로 항구적 토대를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夫待越人之善海遊者以救中國之溺人,越人善游矣,而溺者不濟矣。夫待古之王良以馭今之馬,亦猶越人救溺之說也,不可亦明矣。

“무릇 월나라 사람 중에서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기다려서,
중국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헤엄을 잘 친다 하여도,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옛날의 왕량을 맞아, 지금의 말을 부리게 한다는 것은
역시나 월나라 사람에게 중국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밝지 못한 처사라 하겠다.”

이게 무슨 말인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한들,
이를 불러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겠는가?
설혹 불러다 중원에 데려왔다 한들,
물에 빠진 이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말을 잘 부리는 왕량은,
오늘에 불러다 쓴다는 것도,
도대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러함이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요순과 같은 성인이 나타나길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란 이야기다.
당장, 법이나 시스템을 잘 마련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다.

夫良馬固車,五十里而一置,使中手御之,追速致遠,可以及也,而千里可日致也,何必待古之王良乎!

“대저, 좋은 말을 매어 놓은 견고한 수레라면,
오십 리마다 역참을 하나씩 두고,
보통의 마부(中手)에게 그것을 부리게 한다면,
속력을 내어 따라잡게 하여, 먼 거리 미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천릿길일지라도 하루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옛날의 왕량을 기다릴 필요가 있으랴?”

예전에 말이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가서 일을 보려면,
뒤늦게 온 자들이 차례를 지키지 않고,
마구 서류를 어깨너머로 들이밀며 먼저 해달라고 보챘다.
하여 언제나 창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은즉,
큰소리치고, 힘이 좋아 앞 사람을 잘 미치거나,
또는 빽이 있거나, 염치를 제집 뒷간에 내다 버리고 온 사람이,
언제나 일을 남보다 먼저 마칠 수 있었다.

헌데, 어느 날, 대기 순번 번호표를 자동으로 나눠주는 기계가 등장하자,
언제 그랬다는 듯이 질서가 확 잡혀버렸다.

이젠, 염치 팽개치고 완력을 행사할 힘의 공간이 없어져 버리고,
새로운 자동 규율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한비자는 바로 이런 세상을 꿈꿨다.
사대부니, 서민이 하는 계급으로 구분되지 않는 세상,
힘이나 권력으로 작동되지 않는 세상,
백마 타고 나타날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 세상.
한비자는 그런 세상을 꿈꿨고, 
이를 법이란 도구를 통해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는 바로 저 Queue Management System의 등장으로,
전격 확보된 질서의 세계처럼,
그는 공평무사한 법으로 구성, 구축하고자 하였다.

대깨문처럼,
한 인격을 우상화하고,
거기 무릎 꿇고,
꽃다발 헌화하고,
뽕 맞은 듯, 
주야로 통성기도 하며,
제 영혼을 청와대 제단에 갖다 바치며,
하늘에 계시온 달님에게 헌신하고 마는,
저 도깨비들의 행진이란,
도대체가 얼마나 눈물겹도록 측은한가 말이다.

2200여 년 전, 한비자(韓非子, 約 기원전 281년-기원전 233년)는,
이미 현대의 경영학, 공학의 시스템적 사고와 실천 기술을 채비한 인물이었다.
헌데, 수천 년 떨어진 오늘날,
덜떨어진 인간들은,
아직도, 한 인간에 영혼을 저당 잡히고,
물에 빠진 귀신 몰골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이다.

다시 돌아와 서자.
저 개똥 부부.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고,
이어 설득이 가능하겠음인가?
아니 설혹 설득이 가능하다 한들,
그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값어치가 있는가?

禮不下庶人,刑不上大夫。

유가의 이 논법은,
더러운 현실을 툭하면 마주치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에게,
기실 얼마나 놀랍도록 그럴싸한가?
하지만, 현대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사고이자 방법이다.

한비자는,
인격을 차별하지 않는다.
아니, 차별하든 말든,
그것은 각자 알아서들 하고,
이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전격 우회하여,
시스템으로 규율하자 주장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산뜻하며, 우아한가?
그는 오늘을 사는 그 누구보다도, 선진적이며, 현대적이다.

저 개똥 부부를 한비자에게 데려가면 어찌할까?

자, 내가 이제, 자료 글을 여기 부려다 놓고자 한다.
이 글을 읽으면, 한비자의 태도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진(秦)나라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중에 하나이다.

棄灰於道,以惰農論

“길에다 함부로 재를 버리면, 농사일을 게을리 한 죄로 묻겠다.”

그런데 이런 전통은 그보다 사뭇 앞선 은나라에도 있었다.

殷之法,棄灰于公道者斷其手

“은나라의 법(엔), 재를 공도에다 버리면 그 손을 자른다.”

이런 모습을 두고는,
혹자는 고대의 법제는 너무 무자비하다고 평한다.
요즘 의식으론 그러하지 않다 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형량(刑量)의 경중, 또는 양형(量刑)의 정부(正否)를 시비하기 이전에,
그 법의 집행 정신을 살피는 것이,
여기 이 자리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리라.

殷之法,棄灰于公道者斷其手,子貢曰:「棄灰之罪輕,斷手之罰重,古人何太毅也?」曰:「無棄灰所易也,斷手所惡也,行所易不關所惡,古人以為易,故行之。」
(韓非子 內儲說上)

“은나라의 법(엔), 재를 공도에다 버리면 그 손을 자른다.
자공이 공자에게 여쭙는다.

‘재를 버린 죄는 가벼운데,
손을 자르는 벌은 무겁습니다.
옛사람은 어찌 이리 엄하오니까?’

공자가 이리 말씀하시다.

‘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다.
손을 잘리는 일은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다.
쉬운 일을 행하는 것과,
싫어하는 일은 서로 무관한 일이다.
옛사람은, 쉬운 일이니까,
그로써 그리 행할 뿐이니라.’”

손모가지는 두 개뿐이다.
두 개가 잘리고 나면,
다음 차례는 이제,
어깨 위에 달린 하나뿐인 모가지가 되지 않으랴?

강아지를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 농장 주변을 아무런 수거(收去) 채비 없이,
개를 끌고 다니며 함부로 개똥을 싸게 하고 도망가는 이라면,
나의 다음 말을 주의 깊게 읽어둘 일이다.

하늘가에 예도(銳刀)보다 더 날카로운 초승달이 떠오르는 날,
가만히 그대 모가지를 훑어볼 일이다.
과연, 아직도 붙어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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