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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결집

소요유 : 2024. 5. 21. 16:34


조국이 개헌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작자 정치 일선에 등장할 때,
나는 실로 면판이 두텁떡(厚餠)보다 두터우니, 
참으로 야릇한 인사구나 싶었다.
후흑학(厚黑學)이라도 배웠음인가?

(※ 출처 : viewsnnews)

설혹 아무리 윤석열의 수사가 무리한 것일지라도,
그의 드러난 죄상은 덮을 수 없다.

당시 조국 sns를 두고 조만대장경이란 비아냥이 떠돌았다.
지난날 그가 한 말이 그의 행동과 반하니,
사람들은 아연실색 기겁을 하지 않았던가?

이게 엊그제 일인데,
그는 다시 조만대장경 2차 결집에 나서고 있다.

선거전에는 곧바로 탄핵할 듯이 방방 거리더니만,
표 앍아내고는 개헌으로 덮어버리고 말겠다는 심사가 아닌가 말이다.

개헌을 하려면, 어쨌건 여당이나 윤석열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래 상대인데 어찌 그들을 마냥 적대시할 수 있으랴?
그러함이니 개헌 논의와 동시에 탄핵은 진행될 수 없다.
이 양자는 배반사건(排反事件, exclusive events)이라 하겠다.
곧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사상(事相, 事象)을 말한다.

개헌 주장은 탄핵하지 않겠다는 내심의 고백과 다르지 않다.
물론 해야 할 일을 하겠다 슬쩍 바람에 실어 깃털 조각을 날려 보내고 있지만,
이미 숨긴 뜻이 다 드러나고 말았는데, 어찌 믿어줄 수 있으랴?

선거 전 그가 팔았던 물목(物目)과 전혀 다른 것을,
선거 후 좌판 벌려놓고 팔려 하고 있음이니,
이는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히고, 구매자를 우롱하는 짓이라 하겠다.
야바위꾼도 아니고 말야.
고약하다.

팔만대장경은 진리의 말씀이나,
조만대장경은 거짓, 위선으로 점철되어 있다 할 밖에.
그래 정상모리배들 믿으면 아니 된다.
헌데, 정치하는 치들 중에 모리배 아닌 자를 과연 찾을 수 있으랴?
좌나 우나 모두 썩을 것들이 지천이다.

결집(結集)은 산스크리트어로 상기티(saṃgīti)이니 이는 합송(合誦)을 의미한다. 
한데 모여 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읊는 풍속이 아름답다 하겠으나,
전승지간에 자칫 그릇되게 변용되거나,
일실되어 부처의 말씀을 잊을 우려가 크다.

하기에 1차 결집에 이어 4차 결집에 이르도록,
수 백 년 동안 연역(演繹), 증산(增刪)되어 정비되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을 어찌 다시 불러낼 수 있으랴?
결집 과정 중에 파가 갈리어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이 옳다며,
상대와 대립하니 실로 이때부터 부파(部派)불교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부처가 살아 계셨다면 어찌 이리 파가 갈려 찢어질 수 있으랴?

하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길 일도 아니다.
사람이란 千人千色, 萬人萬色임이라 다 다르다.
수없이 많은 부파불교가 일어난 일을 나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로 본다.
각행기로(各行己路)
각자는 모두 다 자기 나름의 길을 갈 일이다.
천인천색(千人千色)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색을 재주껏 뿜어낼 일이다.

부처가 팔만 사천 장광설을 토해내었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 팔십사만 장광설을 쏟아내어야 한다.
풀숲에 가보아라,
하나라도 같은 것이 있는가?
팔십사만 기화요초가 제각각의 저 자신을 뽐내고 있다.
이야말로 화엄의 꽃세계가 아닌가 말이다.

조만대장경 2차 결집을 보고서는,
문득 불경 결집을 생각해보았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그리 입을 털어가며 고고한 듯 외쳤지만,
뒷구멍으로는 흉한 짓을 자행하였지 않은가?

인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자에게 다시 표를 건네주었을 터라.
그렇지만,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변솟간에서 똥 싸고 와서는 다른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은가?
뻔뻔하구나.

만약 선거 전에 개헌 주장을 하였다면,
과연 그들 무리에게 표가 그리 쏠릴 수 있었으랴?
아아,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린,
저들의 죄가 어찌 작다 하랴?

天行有常,不為堯存,不為桀亡이라 하였음이다.

하늘의 도는 사심 없이 원리에 따라 운행될 뿐이다.
요를 보존하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걸을 망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존망이란 하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요, 걸 각자에게 달렸을 뿐이다.

조국 역시 매한가지임이라,
하늘이 그를 벌하거나, 흥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에 따라 복된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욕된 길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인 것을.
應之以治則吉,應之以亂則凶라 하였다.
길흉이란 실로 하늘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내는 것이다.
얼마나 준엄한 말씀인가?

속상하다.
어떻게 정치하는 치들은 하나 같이 이리도 추접스러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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