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가지
며칠 전부터 북한산 등산로 길 옆,
키가 큰 나무 위에 부러진 가지가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몇 해 전(2006년)에도 그 보다 더 아래쪽, 등산로를 가로질러 다 쓰러져 가는
도복(倒伏) 직전의 나무를 처리하여 줄 것을 공원 당국에 신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종무소식이기에 몇 차 더 신고한 경험이 있다.
사람들 머리 위를 단 몇 뼘 정도 남겨 놓고 쓰러진 상태인데도,
어찌 저리 무심히 다닐 수 있을까 싶은 정경이 매일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저들 공원 직원들을 호루라기로 불러대었지만,
저들은 며칠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것도 마찬가지지만 모두 다 등산로 초입 주통로라 만약 사람들 머리위로 떨어지면,
심각한 위해가 예상되는 상황들이다.
나는 며칠 망설였다.
그간 수년래 겪은바 저들 공원 직원들의 근무 태도에 적지 아니 실망한 처지이기에,
저들에게 접촉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무 담임자의 자세와는
한참 벗어난 저들을 가능한 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러다 다른 문제로 만부득 그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과 만난 사연은 나중에 시간을 내서 조금 자세히 적을 예정이다.)
나는 차제에 직원에게 위험 현장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다행히 그 직원은 저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라고 시인을 한다.
당장 처리하겠다고 한다.
그의 시인에 나는 안도한다.
이제껏 대하던 직원들은 감수성이 없기 일쑤다.
공적 의식의 불감증 말이다.
그러하니, 저 직원의 반응은 얼마나 반가운가 말이다.
그런데, 시민이 저들을 반가워야 할 위치에 있을 정도로,
저으기 초라해질 까닭이 있는가?
그래, 정작 부채를 진 것은 저들인데,
왜 내가 먼저 고마워해야 하는가?
그는 나에게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았는가 묻는다.
산에 오르자면 길목에 속하는 그 길을 필히 거쳐야 한다.
하루 1000~1500여명이 지나고, 공원 직원들도 수없이 다녔을 것이지만,
아마도 이를 발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은 수 길이나 뻗은 나무의 위에 걸쳐진 것이라,
고개를 높이 쳐들기 전에는 찾아내기도 힘들겠지만,
부러진 것이 제 가지와 잘 구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이 그것을 보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물론 버릇대로 나무들을 유심히 대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는 위험을 보고는 그를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위험을 보고, 나만 피하여 간다하면 그도 못할 것이 없겠지만,
그를 외재화(外在化)하는 과정을 다른 사람들은 조금 소홀히 하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기에 일전에 쓴 글에 등장하는 약수터 위 낙석 위험에 대하여도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발의하는 이웃을 만나지 못한 것이리라.
(※ 참고 글 : ☞ 2008/05/26 - [소요유] - 낙석주의와 나의 판타지)
등산시 쓰레기 버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위험한 짓이다.
온 산 흙이 썩고 계곡물이 오염되는 그런 사태를 어찌 위험하다고 하지 않을쏜가?
하지만, 자신의 편의와 이기심 때문에 쓰레기 투기가 거리낌 없이 펼쳐진다.
이 역시 위험을 '공적인 사태'로 인식하지 않고,
기꺼이 위험을 창출함으로써 그를 사적인 유익함으로 바꿔,
한낱 봄꿈에 불과할 사욕을 채우는데 분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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