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물노빠

소요유 : 2009.06.01 17:41


고등학생만 되어도 다 아는 이야기를 꺼내들고 글을 시작해본다.

위치에너지(potential energy)는 물리계(physical system)에 기히 보존된 에너지다.
이게 다른 에너지로 변환을 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potential energy 즉 잠재 에너지로 명명한 것은 사뭇 그럴 듯하다.

예컨대, 높은 댐 위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 담겨져 있는 물은,
그 위치에서 아직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밑으로 떨어지면서 발전기용 수차를 돌리게 되면,
비로소 최종적으로 전기에너지를 만들어내게 된다.
댐 위에 있는 물이 가진 에너지가 이 경우 전기에너지로 변신을 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방앗간 수차를 돌리게 되면,
전기 에너지가 아니라 기계 에너지로 전환된다.
이렇듯 물이 가진 에너지는 변환이 됨으로서 비로소,
거기 걸맞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게 된다.
하니, 변환 전에는 그저 잠재적인 가능태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otential energy는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반면,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위치에너지란 말은
potential energy에 비해서는 한결 함의하는 바 폭이 고정되어 있고,
외양에 치우친 직설적인 표현법이라 하겠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최희준의 노랫말이다.
의자에 사람이 앉는 순간,
그 지위가 보장하는 권위와 권세가 생겨난다.
마치 용수철을 한껏 잡아당기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복원력(restoring force)을 갖게 되듯이,
‘의자’란 외부인이 가진 일상적인 준거 위치(reference position)를 벗어나,
홀로 긴장된 또는 특권화된(privileged) 상태를 보지(保持)한다.

즉 ‘의자’란,
의자에 앉지 못한 다른 사람을 상대로 명령하고, 지시하고, 결재하는 따위의
권능들을 발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그러하니 ‘의자’란 물리학의 potential energy와 상사(相似) 시킬 수 있다.
무엇인가 일을 도모할 수는 에너지를 잔뜩 머금고 있는 지위를 의자는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주번 완장을 차고 나서면,
기껏 물 주전자 심부름을 하거나 지우개 털기의 권한이 생기거나 또는 부담하지만,
기율부 완장을 차면 제법 위세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완장을 찬 이와 완장을 차지 않은 사람들 간의
위치 또는 지위 차이(position difference)는 곧 potential difference인 게다.
그들 간엔 잠재적 에너지 준위 차가 생기게 된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서,
주인공 종술은 저수지를 관리하는 완장의 힘을 빌려, 허망한 꿈을 꾼다.
기껏 낚시꾼을 관리하는 형편이지만,
읍에 나가 제복을 사고 감독 완장을 사서는 낚시터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한다.
술집 작부도 그 힘을 빌려 꼬셔보고, 낚시꾼들에게 기합도 주는 등
주제넘은 폭력을 휘두르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물리학에서의 potential energy는 정확히 그 position에 처하여야,
거기 걸맞는 에너지를 보지(保持)한다.
하지만, 인간세에서는 완장이라는 외양을 빌어,
이를 흉내(simulation)내며 거짓으로 자신의 position을 위장할 수 있다.
즉 명실상부(名實相符)하지 않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꾀하곤 한다.

위 소설 속에서의 주인공 종술의 simulation이 외부인에게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그 정도의 뻔한 완장에 속아 넘어갈 사람들은 별로 없다.
실인즉 그 완장에 속아 넘어간 사람은 외부인이 아니라,
정작은 종술 자신이다.
여기 완장의 비극이 있다.

하지만, 흉내, 위장, 변장이 사뭇 그럴듯하여 외부인이 속아 넘어간다면,
이 보다 근사한(?) 노릇은 없다.
나뭇가지 모양을 한 벌레, 잎새 모양을 한 나방,
피부색을 주위 환경과 비슷하게 변색시키는 카멜레온 등 동물은
이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효과적으로 꾀한다.

인간세에선,
줄을 잘 서다, 와이로를 매긴다, 빽을 쓴다, 인맥을 만든다, 남의 브랜드를 구매한다. ... 등등
제 처한 조건을 넘어 외부적 표상을 제 수준 이상으로 꾸며댄다.
카멜레온의 변색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면,
인간세에서 벌어지는 이런 노릇들 역시 탓할 바 없을까?
문제는 자신의 생존에 그치면 다행이겠으나,
그로 인해 외부인이 속아 넘어가, 다치게 된다면 어찌 하겠는가?
흉내, 위장, 변장은 용인될 수는 있는 것인가?
만약 된다면, 그럼 그 한계와 세기는 어느 정도까지 수인(受忍)되어야 하는가?

기실 노자의 술(術)은 병가와 법가로 흘러 들어갔다.
(※ 참고 글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옹치(擁齒))
법가는 상벌을 엄히 하였음이니 거짓을 가차 없이 벌하였다.
하지만, 병가는 무릇 兵者, 詭道也라 하였음이니,
속임을 그 기본 원리로 적극 채용하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전쟁터에 저마다 하나의 병사로 임한 것이라면,
궤도(詭道)를 쫓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정의를 부르짖고 도덕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는 더불어 산다는 사회적 조건을 자각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 누구도 거죽으로는 궤도를 펴고 있다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기사 궤도를 펴는 이가 이를 궤도라고 사전에 알리면,
그게 어찌 궤도라 할 수 있겠는가?
천하에 거죽으로 횡행하는 것은 모두 정도(正道)뿐이나,
실인즉 도모하는 바 복심은 따로 있는 게 태반은 넘으리라.
개중엔 알고도 속아주는 경우도 있을 터이며,
상대가 알리라 예상하면서도 뻔뻔히 제 욕심을 부리는 이도 있을 터.
참으로 재미있는 세상이다.

의자, 완장, 유니폼을 넘어,
의전(儀典), 의식(儀式) 또한 모종의 거대한 음모, 정치(精緻)한 기도(企圖), 위장된 동원(動員)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 내적 주체가 부재한 것이로되,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하여 스스로 주체가 되는 집단 퍼포먼스.
나는 문득 이런 상상 속에 빠져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 영결식의 현장.
나 역시 그리 예외가 아니지만,
모두들 그 현장에 임하여 추모의 정, 슬픔들을 한껏 길어 올렸다.
동네 아낙들이 채 밝지 않은 희끄무레한 신새벽,
물동이를 이고, 똬리 끈을 입에 질끈 즈려 물고는 새벽길을 나선다.
거기 동네 어귀 웅숭깊은 우물물 속에 두레박 던져 정한 물 길어 올리듯,
우리는 가슴 속 깊은 우물물에서 한동안 고이 잊혀져, 저홀로 괴어가던 정한(情恨)을 긷는다.

그날 그 현장에서, 그게 어찌 노무현 고인을 향한 추모의 정이고, 슬픔 만이었겠는가?
나는 그것이 정작은 8할 이상 자신들의 애환(哀歡), 순정(純情)을 마주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하다면 이는 영결식을 빌은 내 감정의 발산, 위무(慰撫)이기도 하다.
이렇다한들 저 제의(祭儀)가 훼손되거나,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제(機制)가 거국적으로 싱크로나이제이션(synchronization) 되었다는 것만 하여도,
대단한 소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혹자는 여기에 희망을 접수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하리라.
지난번 촛불 역시 이런 기제(機制)가 작동하였다고 나는 여긴다.

그런데,
나는 이런 감정상의 기제(機制)는 시간의 함수라고 믿는다.
그것도 exponential같이 가파른 시간 축에 구속된 함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기왓장 깨지듯 급속히 와해되는 숙명에 복속하고 만다.

하기에 나는,
삼우제(三虞祭)도 지나지 않아 눈물은 마를 것이라고 앞에서 이야기 했다.
강고한 사회적 구조에 갇힌 시민들은 조만간 다시 허리를 꺾고 일상의 질곡에
함몰되고 말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 전망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갑자기 노빠가 많아진 것인가?
나는 원래의 노빠 말고 새로 늘어난 이들을 물노빠라고 부른다.
눈물노빠 말이다.
노무현이란 우물이 아니라, 제 스스로 괴어 만든 우물 속에 풍덩 자맥질한 사람들.
눈물로서 일순(一瞬) 노빠가 된 사람들은 눈물이 마르면,
다시 제 고향으로 귀가들을 하게 되고 말리라.
우리 식구 중에도 물노빠가 있다.

"물노빠?"

나는 답하여 일러준다.

"허당, 가짜노빠가 아니라, 눈물노빠 말야."

이게 조금 실례가 될까?
그렇다면, 아래 조금 보충해둔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노빠가 되어야 하는가?
물론 진성 노빠라면 이를 원할는지 모르겠지만,
반명박일지언정 노빠가 아닌 나로서는 오히려 이게 건전해 보인다.
술국 괴듯 제 가슴에 괸 무엇인가 고귀한 그것을 그동안 아지 못하다가,
이제라도 발견하고 눈물로써 참회하듯 꺼내든 그 모습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가치가 아니어도 관계없다.
저마다 방치해두었던 제가 빚은 슬픔, 정한, 순정, 정의 ...
그 어떠한 것이든 순일(純一)한 그것이면 그로서 족하다.
눈물로 드러내 그린 것이 어찌 순일하지 않으랴.
순결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은 모두 쉬이 증발하고 말리라는 예상을 나는 하고 있다.
나는 당췌 감정의 지속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햇빛이 나면 쉬이 증발하고 마는 이슬처럼,
그것은 한 때 얼핏 보석보다 아름다와 보이지만 늘 쉽게 사라지고 만다.

한껏 잡아 늘린 용수철이,
임계점을 넘어 끊기지 않는 이상,
다시 쉬이 복원되고 말리란 우울한 전망을 나는 갖는다.
아직 용수철이 끊어지기엔 그 사회적 극복 potential은 충분하지 않다고 믿기에.
(※ 참고 글 : ☞ 2008/02/18 - [소요유/묵은 글] - 예측술(豫測術) - ①/②)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2007년도에도 다른 것 다 필요없다고,
좌고우면 돌보지 않고, 한 곳으로 죽 달려들 가지 않았던가?
범죄고 도덕이고 다 팽겨치고 경제에 올인한 저 무리들.
그래 그 덤벼든 치들 주머니가 지금 툭툭 터지도록 불거지기라도 하였는가?
이런 사람들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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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도사 2009.07.14 02:31 신고 PERM. MOD/DEL REPLY

    임계점... 참, 무서운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유도가 매우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변화하지 않더군요.
    개인과 조직의 아집, 습관, 타성 등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나비효과'가 아무런 효용이 없게 만드는 범인은 바로 높은 임계점이 아닐까 싶네요.

    제 나쁜 습관들을 리모델링 하려는 시도는 매번 여지없이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저 같은 범인(凡人)은 쉽사리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것(7.9km/sec) 처럼 말입니다.

    bongta 2009.07.14 21:38 신고 PERM MOD/DEL

    임계점을 넘을 에너지를 강제로 공급하는 형식으로는,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물결이 둑방을 타고 넘을 때까지 어느 세월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때 성미가 급하거나, 의기로움이 드높은 자가 썩 나서서,
    횃불에 불을 붙이고, 깃발을 높이 들며 완장을 차고 앞장을 섭니다.

    그런데,
    혁명분자들 역시 둑방을 허물고 나서는,
    저들 역시 자신을 위한 둑방을 더욱 견고히 구축하곤 합니다.

    저 둑방은 누가 다시 부셔야할까요?

    threshold energy를 넘어,
    이를 격발(triggering)하는 것은 혁명분자이지만,
    그를 공급하는 것은 민중입니다.

    혁명이란 것은 백번 참다못해 마지막에 터집니다.
    그리고 이를 민중들은 절절 피 흘리며 믿고 따르지만,
    대개는 그 믿음이 배반당하곤 합니다.

    몇 번 배반당하고 비로소 혁명의 허구를 깨닫게 된 순간,
    그들은 슬프게도 끝내 이승을 하직할 시간에 닿아 있습니다.
    또는 믿건대 대다수는 이런 깨달음의 의식조차 없기 일쑤이지요.

    그러하기에,
    세상엔 늘 백마 타고 초원을 달려 나온,
    멋진 영웅이란 허울을 쓴 자들이 나래비로 줄을 서서 출현합니다.

    저는 더러운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혁명 밖에 없다고 외치곤 합니다만,
    혁명의 배리(背理)를 역사에서 밥 먹듯 마주치기에,
    혁명을 사랑하는 한편 그 앞에 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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