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이해득실(利害得失)과 시비곡직(是非曲直)

소요유 : 2010. 1. 17. 15:00


이해득실(利害得失)과 시비곡직(是非曲直)

먼저 글자 풀이를 해본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이익과 해로움, 얻음과 잃음’을 뜻한다.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옳고 그름, 굽음과 곧음’을 뜻한다.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한 인간이 의지하는 바,
생각과 행동의 기준을 이 둘 중 하나에 크게 치우친 것을 보게 된다.

예하건대, 옳고 그른 것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얻음이 많으면,
무작정 그리 쫓아 행하고 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록 자신에게 득이 적고 외려 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기에 그 길을 따라 걷지 않고 바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의(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

논어의 말씀이지만,
맹자를 빌리자면,
의(義)는 부끄러움의 단서라고 했다.
즉 마땅치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의라고 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바른 행(行)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행하는 것을 용(勇)이라 한다.
그는 또한 시비를 옳게 가릴 줄 아는 것을 지(知) 즉 앎이라고 했다.
그러하니 앎이 없고, 이를 부끄럽게 여길 줄도 모른다면 군자라고 할 수 없다.
소인이란 이런 경계를 벗어나 오직 이해득실만 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내가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아들이 있는데 열두 평 아파트에서 살아,
너무 좁아서 옷가지를 우리 집에다 수시로 갖다 놓고 지내.”

“아들이 내게 이리 말하지 않겠어, 엄마는 이 넓은 집에서 단 두식구가 살지 않아,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집을 팔아, 내게 보태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최근 집을 내놨어요.”

“아들이 이래요, 엄마는 동네 개들은 매일 밥을 주며 챙기는데 아들은 불쌍하지 않아.
이젠 그만 두고 그 아저씨(bongta)에게 맡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보험에 들라고 해요.
나중에 병이라도 들면 어쩌라고, 어서 보험에 들라고 ...”

강아지를 챙김은 굶주리고 학대받는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가 아니던가?
맹자는 이를 인(仁) 즉 어짐이라고 했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미루거나 넘기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저마다의 사람 사는 도리일 뿐이다.
게다가 강아지에게 나누는 한 조각의 음식 덩이가
어찌 인간의 경제적 이익과 대립하는 행위를 입증한단 말인가?
설혹 단 한 터럭의 손해가 된다한들 그것을 남에게 넘겨 터는 것만이 능사인가?
그외의 아름다운 가치는 정녕 헤아려질 수 없음인가?
참으로 삭막하니 슬픈 정경이 펼쳐지고 있음이다.

사람들 간,
위험의 전가, 이익의 추구.
이를 수레바퀴 중심축으로 달려가듯 축차적(逐次的)으로 쫓아 몰아가다 보면,
행위의 정점엔 단 하나만 덩그란히 남아 있어야,
저 불붙는 욕망의 점화식은 그칠 수 있다.

아프리카 고아를 돌보면, 한국 고아도 많은데 하필 아프리카 고아를 돌보느냐?
버려진 강아지를 돌보면, 사람도 헐벗고 아픈 이가 많은데 하필 강아지 따위를 돌보느냐?
묻고 물어 어떠한 것이 더 급하고 중한 것인지 따지는 것도 그리 쉬운 노릇은 아닐 테지만,
혹여 찾아낸다고 하여도 이런 물음을 몰고 가면 종국엔 단 하나의 정처(停處∨頂處)에 이르르게 된다.
그 단 하나의 바퀴살 중심축(hub,毂)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고아도, 강아지도 아닌 자기자신만이 덩그란히 남아 있지 않을까?
(※ 轂 : 輪之正中爲轂)

나는 여기, 지금에 충실하고 싶다.
그게 설혹 어설픈 점이 있다한들,
각자가 제각기 충실한다면,
우주 전제가 조화를 이룰 것이란 기대가 있다.
이를 나는 조리(調理)라고 푼다.
이치, 경우, 도리의 하모니 말이다.
하기사, 기대니 희망이란 것도 너무 누추한 생각이다.
그냥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에 가는 것일 뿐.

기우(杞憂)에 매몰되면 우리는 한 발자욱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각인은 각자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 바른 마음을 내어 뚜벅 뚜벅 걸어가는 것임이랴.
어찌 기우처럼 그 나머지를 염려하랴.
그런데 과연 저들 비웃기나 하는 자들은,
행여 기우나마 세상을 한 터럭일지언정 염려라도 하기는 하는가?
공연히 조각 행(行)도 없이 조동부리 삐죽 내밀고 기우 흉이나 보기 바쁘지.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기우(杞憂))

이런 어처구니 없는 물음,
세상을 고립시키고 파편화하는 우문들을,
세상을 향해 투기(投棄)하는 이들은,
그 물음의 제단 위에 석주야(三晝夜)를 넘겨 발가벗고 서 있어야 한다.
그 때 고아든 강아지든 근원엔 경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하기에 따뜻한 온돌에 누워 저런 물음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사람을 나는 무지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욕심 많고 무지한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가 말이다.

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 어미의 인을 빼앗고 있음이 아니던가?
이(利)로써 옳음(是)을 버리고,
얻음(得)으로써 곧음(直)을 구부러뜨리고 있음이라.
이를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음인가?

왜 아니 그러한가?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효성스럽고 (아우가 형을) 잘 따르는 것이 인(仁)의 근본이다.

부모의 봉양을 염려하여 보험을 들자는 것도 저으기 섭섭한 노릇인데,
항차 자신의 계산으로 치루는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떠맡긴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내 일호(一毫)도 틀림없이 예견하거니와,
왼통 집을 헐어 반으로 쪼개서 아들에게 보태주었다한들,
머지않아 그 나머지를 두고 또 나누자고 하지 않을손가?
이해득실(利害得失)의 세계에 거(居)하는 이들에겐 멈춤이란 없다.
눈앞에 이익이 남겨져 아른거리는데,
그 궁극에 이르도록 어찌 욕심이 그칠 까닭이 있으랴.

멀쩡한 산하도 물길 내자며,
삽질로 아작을 내야 한다.
그게 내게 이익이 된다면,
거기 깃들여 사는 생령이 절단이 나도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게 시비곡직(是非曲直)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해득실(利害得失)이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염치 접고 뻔뻔하게 살아가는 모습의 실상이다.

아, 부모는 자식의 아픈 것만을 걱정한다고 하였음이니,
자식을 위해 제 사는 거처까지 쪼개 주시려 하는구나.
부모를 잘 공양(能養)하는 것을 효라고 하였다.
헌데 자식은 부모를 보살피려 하기는커녕 제 집 늘릴 걱정만 하고 있고뇨.
한국 아이들은 참으로 잘못들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子曰 父母在不遠遊 遊必有方

공자께서 이르시되,
부모님이 계실 때는 멀리 떠나지 말아야 하며,
떠나야할 때는 부모님을 돌볼 마땅한 방도를 마련해둬야 한다.

이러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어찌 굴러가기에,
부모님의 자리를 헐어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데 이처럼 질속(疾速)하니 서두름이 잰가?
과시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백말이 틈 사이를 가로 지르는 듯 재빠르구나.
희(噫)라,
세상이 검은 바다 물결처럼 험하고 험하게 돌아들고 있음이고뇨.

지금 온나랏 땅에 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거짓 믿음이 있다.
즉, 적하 효과(滴下效果, trickle down effect)라는 것도 매한가지 이치에 터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간단하다.
부자를 더욱 부자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면 ‘빵이 커지고 나중에 이 빵을 나눠먹기에 족하니라.’
적하효과를 까뒤집으면 실로 이런 선전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가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빈자(貧者)는 부자에게 양보하여 지금의 어려움을 더 인내하여야 한다.
게다가 차후에 부자가 빵을 나눠준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현재의 희생으로 얻어진 믿음의 담보가 부도가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용산구에 가서는 ‘저를 믿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
세종시에 가서는 ‘저의 진심을 믿고 지켜봐 달라’.
정운찬씨는 이리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우리가 소문으로나마 알던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러한데 저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음인가?

앞서 이명박씨 역시 부자에게 감세하며 적하이론을 폈다.
그런데 과연 빈자에게 저 믿음은 장래 유효한 보장이 될 것인가?
그 믿음을 너무나 쉽게 쎄일하고 있는 정점의 자리에 이명박씨가 홀로 우뚝 서 있다.
대명천지 밝디 밝은 지금 세상에서,
저를 온전히 믿음에 온나랏 국민들의 구원이 매어 있어도 괜찮은가?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덜 걷고,
어린 아이의 급식비를 깎아내고 있는 마당인데,
그것이 바로 빈자들의 찬란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고육책이란 선전을 과연 믿을 수 있음인가?

내 주변에 어떤 이가 하나 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뱉어낸다.

내 처는 ‘부자하고만 사귄다.’

그가 이 말을 토해내고도 낯빛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보아,
이는 곧 처를 빌어 자신의 입장을 들어내고 있음이라.

어쨌건 저 말의 본뜻은 사람하고 사람간의 만남엔 빈부가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난하여도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게 많은 부자와 만난다면,
그 거래는 자신에게 득(得)이 된다는 것이렷다.
헌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자신보다 더 부자인 자는 그를 만날 이유가 없다.
이 이치를 죽 몰아가다보면 종국엔 하나만 남는다.
정점에 위치한 하나의 대부(大富)외엔 모두다 흑싸리 쭉쟁이에 불과하다.

저이의 이론에 입각하면,
이 대부는 나머지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자신외에는 모두 빈자일 뿐인데 사귈 까닭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만나고 있다면 이는 모종의 필요가 숨겨 있기 때문이다.
꾀하여 도모하는 바가 감춰져 있을 터이다.
이를 음모(陰謀)라고 칭해두자.
그 필요와 음모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것은 이해득실(利害得失)에 관련되어 있지,
결코 시비곡직(是非曲直)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사정이 변함에 따라 언제고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언제 어디서간에 그 내용이 바뀔 까닭이 없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를 뿐이다.
시간에 따라, 여건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뀐다면,
이는 애저녁에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잘못 보았을 뿐이리라.
반복하거니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찰나간 짬(暫)에도 108번 변개(變改)가 일쑤이나,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오래도록(久) 여전한 것임이라.

만약 이해득실이 사정변경에 따라 바뀐다면,
저들 교도(敎徒)들의 처신은 또한 여반장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그러함이니, 저들을 어찌 믿음의 벗으로 항구히 사귈 수 있음인가?
정작은 저들 자신도 자신을 벗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신뢰가 터를 내릴 수 없는 동토에 사는 저들을 어찌 가엽다 이르지 않을손가?

그렇지 않은가?
그가 자신의 이해를 꾀하고 있다면,
거죽으로 애써 꾸며 감추고 있겠지만,
필경은 그르고(非), 굽(曲)은 것이 어찌 아니랴?

‘노무현의 깃발’과 ‘노무현이란 인간’
옥석구분(玉石俱焚)
이 양자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가려지지 않고 있다.
노무현은 노란 깃발을 들고 나타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깃발에 쓰여진 약속들을 저버렸다.
이라크 파병, 한미FTA추진, 비정규직 양산, 빈부 양극화 심화,
부동산폭등 방기, 재벌 편향 정책, 미소고기수입의 단초제공 ... 등등

깃발 위 핏빛으로 적혀 내려간 이 믿음의 약속이 배반당하자,
민초들은 주저없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일부에선 아직도 깃발과 노무현을 동일시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눈물과 순정으로 노무현과 깃발을 한 두름으로 함께 꿰어 조상하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은 물론 노무현보다 백 곱은 더 순수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무현씨는 이명박씨보다는 천 배는 더 무겁게 역사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순진한 영혼을 기만한 위선은 적나라하니 드러낸 악행보다 천 배는 더 나쁘다고 나는 믿는다.
속았던 것일망정 한 때의 아름다웠던 인연에 기대거니와,
이게 저승에 간 노무현씨에게 진실로 전하는,
따스한 위로의 말씀이 되길 빈다.
진실로 그가 노란 깃발을 드높이 들어올릴 때의 그 열혈 순정을 잊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 이젠 그 알량한 깃발을 다시는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기지촌 가시 철망에 걸린 계집 속곳처럼,
허공중에 찢기어 나불거리는 위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미쳐갔다.
이명박은 말하지 않았던가?
모두들 부자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이 얼마나 하초(下焦) 끝을 짜릿하게 훑고 지나가는 황홀한 미약(媚藥)인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도 모르고들 있다.

부자는 ‘부자하고만 사귄다.’

이 천박한 문법의 본뜻을 말이다.
그대가 부자가 아닌 한,
저들 부자는 결코 빈자인 그대하고 사귈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러하기에 저들에게 당신은 수단으로서의 객체에 불과하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음을.
그러함에도 저들은 기꺼이 저 말의 위력에 스스로 복속하고 만다.
노예들.
부나방처럼 저 화로에 자신을 집어 던져 넣고 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설편(雪片) 하나가 붉게 달은 화로에 떨어져 이내 녹고 만다.
삶은 이리 찰나간 스러지고 마는 것.
어찌 거짓에 맡겨 저를 시험할 수 있음인가?
질러가는 욕망의 점화식 최후에 남은 정점(頂點) 그 하나를 제하고는 영원히 빈자인 주제에.
단꿈은 어이도 이리 야무져 도리어 슬픈가?

저게 말이라 한들,
절절 사무치게 짜릿하기 때문이런가?
그래 자청하여 기꺼이 그리 속아넘어가길 즐겨 원하고 있음인가?
실로 미욱(迷惑)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子曰 三人行必有我師焉

공자 가로되,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 중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

공자는 사람을 사귐에 있어,
부귀귀천으로 가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공자는 성인이다 아니다 이런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성실한 사람이다.
작(爵)도, 치(齒)도 따질 겨를없이 마냥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사람.
I can't  stop loving Confucius.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 不習乎

증자왈,
나는 매일 3번 스스로를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꾀함에 있어 충성을 다하였는가?
벗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다하였는가?
전해진 바를 몸에 익히려 했는가?

고인(古人)들의 삶은 이러했다.
부자하고만 사귀려고 드는 이가,
항차 벗과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는가 되돌아보며 하루를 반성하겠는가?
행여나.
골방에 들어가 오늘도 몇 사람 속여 먹고 몇 푼 득이 되었나 셈하기 바쁘겠지.

小隱隱陵藪,大隱隱朝市 (小隱隱於山野,大隱則隱於都市)
소은은 산야에 숨고, 대은은 도시에 숨는다.

그럴 듯이 폼 잡고 도사인 양 차려 입고 산야에 살면,
얼핏 저들이 도사로 보인다.
산야를 굳이 산, 들로 한정하여 새길 것 없다.
절이라 하여도 가하고, 교회, 성당이라 해도 하등 어긋남이 없다.

- 하기사, 거기 일주일에 한번씩 폼잡고 드나들며, 연보돈 바치고, 시줏돈 복전함에 넣으며,
할 도리 다하였다고 우쭐거리는 신자놈들은 더 더러운 것들이다.
일주일 내내 나쁜 짓은 도맡아 하던 것들이, 잠자리 채에 연보돈 달랑 던져 넣고는,
그래 의젓하니, 주님의 어여쁜 종인 양, 선량한 어린 양인 듯, 죄 사함을 돈으로 사고는 말이다,
의기 양양 다음 주일의 죄악을 꺼리낌 없이, 예비하는 것들을 어찌 이 무리들로부터 덜어낼 수 있으랴. -

늘 그러하듯이,
천하에 제일 추접스런 것들,
저들 도사인지 또는 먹사, 땡중은 흔히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네가 신령의 은혜를 입으려면 나와 배꼽 동사(同事)를 함께 하여야 한다.’

이런 꾐에 떨어져 몸 버리고 재산을 다 바치고 날 때 즈음이면,
천지가 바뀌고 들녘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으려니.

하지만 진짜배기 도사는 저잣거리를 누비며 여항(閭巷)에 깃들여 산다.
여느 사람과 차이가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부자하고만 사귄다.’

이 말을 자랑으로 아는 이가 어찌 대은, 대부를 알아 볼 수 있으랴.
당시 나는 이 따위 말을 듣자 이내 장자의 다음 말이 떠올랐다.

君子之交 淡如水 小人之交 甘如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이 담담하다.
소인의 사귐은 꿀과 같이 달다.

그러하지 않겠는가?
부자하고 사귀려니 그 말이 달고, 낯빛이 발그라하니 꾸며지지 않을손가?
가난한 자의 처신이 어찌 이 궤(軌)를 따라 굴러가질 않겠는가?
그러하기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결단코 용자(勇者)가 될 수 없음이다.
가난한 자는 비굴하기도 하다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다.
참으로 가여운 노릇이다.

里仁爲美
인에 머무름이 아름답다.

어짐에 어찌 빈부의 나뉨이 있을 테며, 귀천의 가림이 있을런가?
이(里)는 곧 거(居)와 같다.
거처하다, 머무른다란 뜻이다.
짐짓 里仁을 仁里로 고쳐 쓰면 어진 마을이 된다.
세상엔 눈이 내려 아름다운 마을도 있지만,
인이 서린 마을도 있다.
나는 그런 마을에 살고 싶다.
담담히.

길은 아득하니 사뭇 멀다.
아직은 한참 더 길을 줄여야 하겠지만,
내 마음엔 지금 눈이 나린다.
눈이 나리니 이내 설국(雪國) 인리(仁里)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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