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없는 부처
일을 하시는 분과 말씀을 나누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뭉툭 잘려나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니, 아마도 무엇인가에 심하게 눌렸다든가,
망치 같은 연장에 맞아서 문드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안스럽기도 하고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어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한참 전에 그리 된 것인지,
이미 자리를 잡아 야물게 아문 상처에선,
마치 오래된 관솔옹이처럼 녹록치 않은 연륜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에 비하여, 어쩌다 보게 되는 스님 네들의 단지(斷指)는 도회적인 절제감이 느껴진다.
도를 구하겠다(求法)는 의지의 외적 표상, 자기 가슴속에 들어 올린 서릿발 같은 깃발.
밥을 구하다 의지와 무관하게 몰아닥친 아픔, 서러움.
이런 대비가 있어 삶은 아스라하니 저마다 제 길을 제 각각 떠나는 것이다.
제 길은 저마다 제가 감당하는 것.
순간 왠지 서러움이 내 가슴께를 번진다.
상하수도, 철공 등 온갖 궂은일을 평생하시며 사셨을 것이니,
그 동안, 왜 아니 망치질에 손을 찧고, 떨어지는 철봉엔들 맞지를 않았겠는가?
저 손으로 밥을 벌고, 식구를 부양하고, 사랑하고, 아파하였으리라.
수고로운 저 손들이야말로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터,
하지만 현실은 야박하니 저들을 핍박하고 놀려댄다.
누군가 저들 몫을 거저 절취하였기에 저들 생활이 곤궁을 면치 못하는 게 아닐까?
굴뚝 청소하는 사람은 그 일로 보람을 찾고,
상수도 배관하는 이는 그 일로 자부심을 갖어야 하는데,
막상 현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로는 피를 흘리는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줌에 불과한,
이 강고한 삶의 구조는 저으기 폭력적이다.
나는 그에게 부러 일거리를 몰아 맡기려 한다.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다소 서툰 부분의 일도 그에게 알아보라고 채근하였다.
나로서도 그에게 도움을 받으면 좋은 일이다.
그는 구지(俱胝)의 일지(一指)가 아니라,
무지(無指)의 활불(活佛)로써 우리 곁에 있음이다.
선사들은 각기 장기(?)가 있다.
예컨대 임제(臨濟)는 할(喝), 덕산(德山)은 봉(棒), 조주(趙州)는 끽다거(喫茶去) 따위로
도(道)의 당달봉사들, 법(法)의 청맹과니들을 훈도했다.
구지(俱胝)는 일지(一指),
즉 도를 묻는 이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마음껏 우롱했다.
어느 날 구지선사에게 도를 물으려 스님 하나가 찾아왔다.
그날은 마침 구지선사는 출타하고 없었다.
그러자 시중드는 동자가 법을 구하는 이에게 나섰다.
동자승은 법을 묻는 그에게 구지를 흉내 내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구지선사는,
그 동자승을 불렀다.
“화상은 어떤 것이 법의 요체인지 설해주시겠습니까?”
동자승은 선사처럼 손가락 끝을 번쩍 세웠다.
그러자 선사는 칼로 그 손가락을 냉큼 잘라버렸다.
동자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데, 그 때 선사가 소리를 지르며 부르니,
동자가 고개를 돌린다.
선사는 동자에게 손가락을 세우라 했다.
그 때 동자는 활연 대오 크게 깨우치게 된다.
有一童子於外被人詰曰:「和尚說何法要?」童子豎起指頭。歸舉似師,師以刀斷其指頭,童子叫喚走出,師召一聲,童子回首,師卻豎起指頭,童子豁然領解。
(※ 豎 :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은 사람을 말하니, 우리말로는 떠거머리쯤에 해당된다.
관례를 올리지 않으면 아직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어린애에 불과한 것.
그러하니 동자승, 풋중을 뜻한다.
한편, 豎起는 세우다란 말이기도 하다.
豎는 竪의 이체로 역시 세우다란 뜻이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후자로 새기는 것이 옳다고 본다.)
보통은 이 장면에서 동자가 손가락이 이미 없어진 것을 모르고 세우려 했으나,
이미 없어지고 없는 바라 이에 크게 깨달았다고 풀이하고 있다.
실인즉, 손가락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렷다.
지월(指月)의 문제가 여기에도 또 다시 등장하고 있음이다.
그러하다면 연출 소도구로 발가락이면 어떠할 테며,
팔뚝이면 어떠할 텐가?
과연 그런가?
그럼 묻겠느니,
당신의 모가지가 싹둑 잘렸다 하여도 매한가지인가?
그래? 그럼,
손가락하고 모가지는 다른 것인가?
정녕?
이게 궁금한 자는 내게 오라,
내 시험 삼아 그대 모가지를 잘라 이를 보이리.
거기 이차돈의 자른 목에서처럼 젖빛 피가 솟을 것인가?
해당화처럼 붉은 피가 쏟아질 것인가?
그런데 젖빛이든 핏빛이든,
그 비린내 나는 더러운 목을 지나던 까마귀인들 탐할까?
나는 이게 도무지 의심스럽다.
이미 자를 손가락조차 없어진지 사뭇 오래인 저 일꾼 아저씨는 그럼 무엇인가?
만약 구지선사가 이 아저씨 앞에서 손가락을 들어올리기라도 하였으면,
아마도 족족 열 손가락 모두 잘리고 말았을 터.
구지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인줄 알라.
덕산 방이니, 임제 할, 구지일지(俱胝一指)라는 것,
모두 다 해망(駭妄)스럽다.
자를 손가락조차 없는 사람 앞에 구지가 재롱을 피우고 있음이고나.
정녕 당신은 자를 손가락조차 없는 사람의 도(道)를 아는가?
좌복 깔고 앉아 참선합네 하는 것은 사치스런 노릇인 것을,
그는 절곡기에 손이 굽고, 절단기에 손가락이 날아가는 가운데,
평생 서러움을 길어 올리고, 슬픔을 두레박질 했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도(眞道)가 아닌가?
가승(假僧),
좌복 위에 턱하니 폼 잡고 앉아,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공짜 시줏밥 축내고,
잿밥 핑계로 신도들 신심을 훔치지 않았는가?
단지(斷指)하여 끊고, 소지(燒指)하여 태우고,
연비(燃臂)하며 끄슬리고, 심지어는 하초하근을 끊어내기까지 한들,
(이를 나는 오락(娛樂)을 떠올리며 그저 도락(道樂)이라 이른다. 삼가.)
(※ 참고 글 : ☞ 2008/03/08 - [소요유] - 공진(共振), 곡신(谷神), 투기(投機) ③)
구체적 생활전선에서 손가락 잃고, 목을 따이는 저들 일꾼 아저씨와 감히 견주랴.
시줏밥은,
공연히 땡중에게 갖다 바치며, 없는 복을 빌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맡겼으면 싶은 것이다.
손가락 마디 뿌리만 가까스로 남은 저 서러움들,
정녕 이른다면,
부처는 저들이 아닐까?
나모(南無) 무지보살(無指菩薩).
나모(南無) 원왕보살(冤枉菩薩).
나모(南無) 조막손 부처님.
나모(南無) 서로움 부처님.
삼가.
손곧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