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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가봉(中假縫)

소요유 : 2010.02.24 00:04


중가봉(中假縫 or 重假縫)

지금 시대에는 양복을 기성복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내가 대학입학 기념으로 난생 처음 양복을 해입던 시절만 하여도 거의 맞춤양복 일색이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30년 전통을 자랑하던 명보양복점이 유명했었지만,
두 번 정도 거래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시장통에 있는 조그마한 양복점을 단골로 이용했다.
주인 혼자 운용하는 한 칸도 채 못 되어 반 칸 남짓한 곳이었지만,
주인의 실력이 뛰어나 거기서 옷을 맞추면 내 몸에 딱 맞았다.

처음 옷을 맞추게 되면 일단 칫수를 재게 되는데,
최종 옷을 찾기 전 중간에 한 번 더 들려 가봉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가봉(假縫)이란 본바느질하기 전에 임시로 시침질 한 옷을 입고,
제대로 체형에 맞는지 점검하고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는 일을 말한다.

내 단골집은 가봉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서,
비록 가봉 상태일지언정 내 몸에 척척 잘 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아마도 돈을 많이 벌어 다른 곳으로 크게 늘려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새로 바뀐 주인은 먼젓번의 빤지르한 주인에 비해서는
과묵하고 성실한 인상이었다.

그와도 거래를 텄었는데,
양복을 하나 맞추고 가봉 날이 채 돌아오지도 않은
어느 날 저녁 늦게 그가 양복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말하길 중가봉(中假縫)을 하려고 들렸다는 것이다.

듣기에도 낯선 말인 중가봉이라니, 그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가봉을 두 번 하자는 것이다.
이게 손님 입장에서는 옷 만드는 정성이 두 배로 더 투입되니, 고마운 일인 양 싶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남들처럼 한 번의 가봉에 자신이 없으니까,
한 번 더 손을 보아야 안심이 될 정도의 실력이란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약간 의심스럽긴 하지만,
처음 거래이니 그의 실력을 확인할 수 없으니 도리가 없다.
게다가 늦게 남의 집까지 양복을 들고 온 정성이 제법 놀라와
오히려 그의 성실성이 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중가봉 이후 최종 가봉은 내가 그의 양복점에 들려 하게 되었다.
그의 손놀림은 먼저의 주인에 비해 무딘 것이 역력(歷歷)했으나,
공을 들이는 정성은 사뭇 남달랐다.

드디어 완성된 옷을 찾아왔다.
하지만, 후에 다시 맞지 않는 부분을 고쳐야했다.

그 옷을 입는 내내 먼저 번 옷에 비해 적지 아니 불편했으나,
몇 개월 후 추가로 옷을 하나 더 장만할 때,
나는 그의 성실성을 잊지 못하고,
잘못될 부담을 무릅쓰고 그를 다시 찾았다.

“처음이라 조금 서툴렀을 뿐이야.”
“지금쯤이면 제법 익숙해져서 한결 나아졌을 것이야.”
“저렇게 열심히 사는 분은 도와야 해.”

뭐 이런 생각으로 그로부터 옷을 하나 더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찾아온 옷은 첫 번째 옷보다 더욱 내 몸에 맞지 않았다.

먼젓번 주인은 사실 좀 불성실한 사람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다방 레지를 무릎에 앉혀놓고 희학질을 일삼곤 하였다.
언젠가 엄마가 이 장면을 보시고는 쯧쯧 혀를 차시곤 했다.
하지만 옷 만드는 솜씨만은 30년 전통의 명보당보다도 윗길이었다.

내가 세 번째 옷을 맞출 때는 고민을 많이 했다.
성실하나 실력이 부족한 이를 다시 찾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을 개척하여야 하나?

성실성과 실력은 동시만족조건이 아닌가?

박정희도 그랬다던가.
저리 부정부패 일삼는 자를 왜 등용하는가 물으니,
그러면 실력 있고 깨끗한 놈 있으면 찾아와 봐.

일을 도모하려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인재가 있어야 할 노릇이로되,
그 자가 취리(取利)에 밝아 제 사욕에 봉사한다면,
이 또한 낭패라.

***

지방대학 나오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취직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이런 제하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워낙 대학이 많은 이 땅의 형편인지라,
지방대학 졸업생들은 취업에 더욱 애로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경험상 80년대만 하여도,
면접 차 지방대학생들 성적표를 받아보면 거지반 모든 과목에 걸쳐 A학점 일색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지방대학이라야 그 면목이 뻔하고,
서울이라도 학생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대개는 성적 관리가 허술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해서 안되었지만,
나는 전공 시험에서 굳이 등수로 따지자면 2등을 했는데도 B학점을 받았었다.
사정이 그러했는데, 그 후 10여년 새 아무리 급격히 늘어나는 게 대학생이라 한들,
당시 거지반 A학점 일색인 대학생들의 성적표를 접하고는,
이러고서는 도저히 저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심했음을 기억한다.

성적이란 무엇인가?
쌓아 이룬 공적, 실력을 재놓은 객관적 척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 것을 교수가 제들 학생들이 취업에 유리하라고 어지간하면 모두 A 학점을,
선심 쓰듯 뿌려대니 성적 인플레가 일어난 게 아닌가?
급기야 성적표라는 것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 종이쪽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싶었다.

하기에 직원 채용 시 성적표가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성실성을 점검하는 게 사뭇 나았다.

도대체 어느 학생이나 하나 같이 성적이 모두 좋으니,
누구라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최소한 성적표에 관한 한 불신은 저들이 사서 불러 일으켰음이라.

그러면서 나는 예의 ‘중가봉’ 양복점 아저씨를 떠올렸다.
과연 사람의 능력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실성이 우선인가?

아무리 성실해도 실력이 미치지 못하면 과업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직원들간 화합에 문제를 일으키고, 언젠가 회사에 해를 끼치게 될 수 있다.
이게 참으로 어려운 난제인데 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진대,
어떠한 것을 취할 것인가?

인재란 사람 됨됨이도 중요하지만,
적재적소 적임(適任)을 찾아 맡겨 배치하는 것이 요긴하다.
그러하니 실력이든 성실성이든 모두 다 귀한 자원(資源)이다.
하지만, 적임을 따져 이리저리 배치할 여유가 있는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인 경우 한정된 자원 동원 능력으로서는,
부득이 이들 중 하나를 가려 택할 수밖에 없다.

과연,
실력이 우선인가? 성실성이 우선인가?

***

실인즉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까닭이 있다.
나는 어제 사료를 고물할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다 했다.
(※ 참고 글 : ☞ 2010/02/22 - [소요유] - 손가락 없는 부처)

오늘 고물할아버지 강아지에게 사료를 주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내가 가져다준 사료를 보고는 웬 것이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내가 가져다주었다고 하더란다.
할아버지가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이리 힘겹게 말하였다 한다.

“나는 오늘, 내일 죽어가고 있어,
힘이 하나도 없어,
개를 건사할 형편이 아냐.”

그래 가여워 그 사료 부대를 당신이 직접 뜯어 허스키 먹이를 주고서는,
사료 부대를 창고에 손수 넣었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년년세세 왜 강아지를 새로 들였던가?
밥, 물도 주지 않던 인간이,
새삼 기력이 딸려 이젠 건사하지 못하겠다니,
아니 언제는 건사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 내가 말씀 드렸다.

“그것을 믿으셨습니까?

이번이 기회인데 그 사료에 손은 왜 대셨습니까?
쳐다도 보시지 마셨어야지요.

제가 아주머니에게 사료를 드리려면 직접 사다 드리지,
왜 저 인간에게 사료를 가져다주었겠습니까?

저것은 저 할아버지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의미가 있지요.
모른 척하셔야 그 책임을 떠맡겨 다음을 도모할 수 있지요.
그런 것을 아주머니가 손을 대셨으니,
자신은 이젠 손을 댈 이유가 없지요.
저 인간이 옳타구나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어제만 하여도 저 할아버지가 사료를 번쩍 들어올리기까지 하였고,
당당히 내 앞에 버팅기고 서서 이야기 대꾸를 멀쩡하니 다하였는데,
하루 사이에 다 죽어간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다 연기입니다.
그리 겪으시고도 저 인간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그리고 저 집에 할아버지 혼자 사십니까?
허스키 임자인 아들, 할머니, 손자는 그럼 뭐 허깨비인가?

설혹 실패한다고 하여도,
이번에 저들 식구들의 태도를 엿보는 기회로 삼았어야지요.
더구나 아주머니가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갈 요량인데,
어찌 하시려고 그리 하셨습니까?
아주머니께서 사료 부대를 뜯으면서,
강아지 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니,
그럼 아주머니가 앞으로도 계속 챙겨 주실 것입니까?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가여워서 ……”

“저는 저 할아버지가 하나도 가엽지 않아요.
허스키는 가여워도.

할아버지에게 또 속으신 거예요.
어제만 하여도 제 앞에 꿋꿋하니 서서 하나도 잘못 없다는 태도로,
뻔뻔히 응대하던 저 인간이 하루 새에 다 죽어간단 말입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어.
다시 가서 내가 돌보지 못하겠다고 말해야겠어.”

저 아주머니는 어쩌다 동시에 강아지 밥을 주러가다 만나는 수가 있다.
그러면 내 손에 들린 강아지 사료를 달라고 하신다.
내일 주시겠다는 것인데, 필경 아까우신 게다.

소탐대실(小貪大失).

***

利之中取大,害之中取小也。

묵자의 말씀.

나는 이 말씀을 오늘 다시 새겨본다.

斷指以存腕,利之中取大,害之中取小也。
害之中取小也,非取害也,取利也。
其所取者,人之所執也。遇盜人,而斷指以免身,利也 其遇盜人害也。

팔목을 보존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이익 중 큰 것을 취하고,
손해 중 작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작은 손해를 취하는 것은 손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그가 취한 것은 인간의 所執이다.
도적을 만나 손가락을 잘리어 자신이 화를 면하였다면 그것은 이익이지만
그가 도적을 만난 것은 손해이다.

利之中取大非不得已也 害之中取小,不得已也。
所未有而取焉是利之中取大也 於所既有而棄焉,是害之中取小也。

“이익 중에서 큰 것을 취한 것은 부득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은 부득이 해서 그렇다.
아직 없는 것에서 취하는 것은 이익 중 큰 것을 취하는 것이요,
이미 있는 것에서 버리는 것은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손해를 보아야 할 때는 부득이 하게 손해를 봐야 한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든가,
자그마한 이익을 탐하게 되면,
대실(大失)한다.

그깟 사료가 무슨 대수이기에,
언덕을 올라 매일 건사하는 수고에 비하랴.

그동안 이리 시간을 바친 것은,
저 인간이 그래도 인두겁을 썼다면,
조금이라도 양심이 돌아,
행여 깨우쳐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던 것도 있음이라.

이게 도시 무망한 노릇인 것이 진작에 판명된 것이로되,
어제 할아버지에게 사료를 갖다 준 것은,
그게 저 사료는 할아버지의 것임을 자임하게 함이라.
그 때라야 저자가 책임을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간 사료도 제일 고급으로만 공급해왔다.
한데에서 지내는 저 강아지들에게 힘을 내라는 의미로 그리 챙겨왔던 것인데,
그게 저 인간을 어여삐 여겨서, 가여워서 그리 했음인가?
나는 저 인간이 밉다.

저 인간이 저것을 쳐다보면서 혹여라도 한 번, 두 번 주기라도 할 것이며,
그리되면 계속 일을 추동(推動)할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최소한 사료가 다 없어질 때까지는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인데,
아주머니가 거기에 손을 대서 그나마 만사휴의(萬事休矣)라.

하기사,
저 인간이 만에 하나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망(難望)한 것이니 탓함이 다 부질없는 노릇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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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0.02.24 01:27 PERM. MOD/DEL REPLY

    할아버지 때문에 심적 고생이 많습니다.
    글로서 대하니 할아버지가 코믹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죄송합니다)
    그 할아버지는 앞으론 허스키 사료값 걱정은 없겠다.... 그런 생각은 안하겠는지요?
    자꾸 갖다 주기만하면 공것을 바라는게 인간 심리거든요.

    bongta 2010.02.24 11:47 신고 PERM MOD/DEL

    성공한 희극은 밑바닥에 비극적 요소를 깔고 있지요.
    비극 역시 거죽으로 희극적 장치를 해놓을 때라야,
    가히 성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파동의 전파(propagation) 형식을 보면,
    그게 진행 방향에 수직적인 상하 진동(oscillation)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파동이 되었든, 또는 정보가 되었든, 내지는 정신적인 감정이라는 것도,
    그것이 전달될 때는 파동(wave)이라는 형식 구조를 여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의 전파 형식,
    즉 사람들 간의 감동(感動) 전달에 있어,
    희극 또는 비극 일편만으로는 미학적 완결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그게 일시적인 충격을 줄 수는 있지만,
    깊은 공감과 희비(喜悲) 조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생산해내기 어렵지요.
    희극은 비극을, 비극은 희극이란 대향적 긴장 요소를
    극(劇) 안으로 끌어들여 적절히 배치할 때라야 비로소,
    극적 아름다움 즉 조화(harmonization)라 부르는 그것을 창출해낸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감동(感動)은 연극업자 말본새를 빌면 ‘효과적’으로 propagation됩니다.

    그러하기에,
    고물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저 언덕 위의 비극은,
    바로 말씀으로 지적한대로 코믹적 요소가 있기에 더욱 극다워 집니다.

    슬프디 슬퍼서 아름다운 연극.

    그래서 감동적이지요.
    저것은 그래서 성공적인 한편의 극입니다.

    때문에 비극은 희극이라 불러도 좋고,
    희극은 비극이라 불러도 별로 이의를 달기 어렵지요.
    특히 성공적인 극일 경우에는.

    언덕 위에 위치한 저 할아버지 집을 거쳐 가느라고,
    제 등산길이 최근 오랜 동안 고정되어 버렸지요.
    때로는 꽃 따라, 바람 따라,
    이 길로도, 저 길로도 가고 싶지만,
    그 동안 도리 없이 저 길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겐 조그마한 업보 같은 것으로 참을 만한 것이지만,
    강아지들에겐 제법 위안이 되지 않았겠어요.

    보통 위선자들은 거죽은 번지르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거짓으로 꾸민 것이나마,
    그 선함이 성공적으로 선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일요일마다 교회 가서 성전에 무릎 꿇고 무엇을 할까요?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십사 빌까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할까요?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조를까요?

    그러고,
    성령의 세례를 흠뻑 받고 돌아온,
    제 집에선 가여운 생령들이 모진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이게 저에게 다 들통이 났는데도,
    외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면,
    저것은 위선이라고조차 부를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코믹, 만화(漫畵)지요.

    ‘코메디야 코메디 ~’

    때문에 삶이란 아스라하니 번져가는 달콤한 서러움 같은 것.

    거기 허스키는 그리 솜사탕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참담함 속에서 스려져 갑니다.
    극적 완성을 위해.

    미학은 그래서 곧잘 아픈 형식을 취하지요.

    그래,
    이것을 코메디라고 부르지 않고,
    달리 어떠한 말로 이를 수 있겠는지요?

  2. 은유시인 2010.02.25 16:32 PERM. MOD/DEL REPLY

    개들도 고통을 알고 참담함을 압니다.
    물론 기쁨도 고마움도 반가움도 알지요.
    다만, 사고의 영역이 좁다보니 쉽게 잊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지요.

    저는 길가다가도 개를 보면 쓰다듬어줍니다.
    제법 사나와뵈는 개도 얼러줄 때가 있는데
    개들과 시선을 맞춘 뒤면 그리 물려들지 않습니다.
    해가 될 사람을 구분하는 듯합니다.

    종교라는 것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달라는,,,
    반대로 남을 위해 기도하려한다면 결코 그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겠지요.
    퍼다주기 바쁠테니까요.

    bongta 2010.02.27 08:30 신고 PERM MOD/DEL

    제가 사는 동네는 북한산 자락을 끼고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동네 골짜기를 따라 유기견이 몰려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 골짜기를 겨냥하고 사람들이 스며들어 몰래 강아지들을 버리기 때문인지,
    하여간 유기견들이 제법 눈에 띕니다.

    저는 최근 6년 이상 그런 강아지들과 인연을 지어왔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제 눈에 띄는 것을 모두 다 어찌하지는 못하였고,
    제 형편대로 조그마한 연을 지었을 정도지요.

    하지만, 해도 해도 끊임없이 이야기들은 이어져 갑니다.
    먹으면 똥을 싸는 것이 도리 없이 벌어지는 일이듯,
    사람들은 기르던 강아지를 버리고, 학대하고, 쓰레기를 투기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최소한 이곳에선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 일부 사람들의 악행이겠지만,
    저는 이것을 여기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조건’으로 규정짓곤 합니다.
    왜 모든 사람의 조건이라고 기술하였는가 하면, 이렇습니다.

    조금씩이나 나아지는 기색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악인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요.
    악인에게 책임을 묻고 규찰하는 노력을 등한히 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한 가지 예로는 동물보호법이 있지요.
    이게 조금씩 강화되고 있습니다만,
    동물들에게 몹쓸 짓을 한 인간에게 벌금이라고는 20만 원 정도밖에 가하지 않습니다.
    법적으로는 최고 500만원인가 매길 수 있는데도,
    최근 극악무도한 짓에도 고작 20만원 밖에 가하지 않았지요.
    이러고서야 악인을 사회가 기르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지요.

    도대체 법정 최고형인 500만원은 어떠한 짓을 하여야 매겨질 수 있습니까?
    최근 일어난 저 천인공노, 극악무도한 것보다 더한 짓거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실 그 죄값에 비하면 500만원은 그저 시늉에 불과하지요.
    최근 1000만원으로 올리고자 하는 개정 노력이 있습니다만,
    이도 크게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런 패악질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인간조건까지 의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아니되지요.
    크게 나쁜 짓입니다.

    저런 패륜를 저지르는 인간은 능히 사람에게도 흉한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사람, 동물을 떠나 누군가에게 저런 흉칙한 짓을 저지르는 것들은,
    응보(應報)를 내세로 미룰 것이 아니라 당세(當世)에 받도록 하여야 합니다.

    기실 이런 사회는 천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악인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사회나 이런 악종자는 생겨날 수 있지요.
    다만 이런 악에 대응하는 사회의 인식 내용이라든가 실천 형식은
    능히 사회의 건전한 비판능력을 재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께 고물할머니를 우리 아파트 경내에서 만났습니다.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오는 중이었지요.
    얼굴에 뽀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빠알간 루주를 발랐더군요.
    제가 이 때 문득 속으로 ‘하희(夏姬)’를 떠올렸는데요.
    원래 정목공(鄭穆公)의 딸인데 진(陳)나라로 시집을 가서는,
    갖은 음탕한 짓을 일삼았지요.
    물론 할머니를 이런 여자하고 직접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하희가 떠오른 것은 그저 할머니의 빠알간 루주 때문입니다.

    저리 곱게 차려 나섰으니 그야말로 새색시를 방불하고 있지 않은가?
    봄 볕에 취한 동네 숫캐는 만나는 암캐마다 올라타 흘레질하며,
    빠알간 본능을 연소시킵니다.
    하희 역시 미친년 두레박질 하듯 이리저리 되잦혀 남정네를 옮겨가며,
    짧은 봄밤을 못내 안타까와합니다.
    그녀는 방사하는 교접술을 배우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지금의 뭇 아낙네는 교접술, 방중술을 별도로 배우진 않겠지요.
    대신 빠알간 루주를 입술에 덧칠하여 그 욕망을 은폐합니다.
    하지만, 저것은 차라리 하희가 상대하는 남정네마다 정표로 던져준 속옷보다,
    더 사무치는 간절한 약속의 표지입니다.
    때론, 저것은 비에 젖은 밤공기를 가르며,
    길게 꼬리를 남기며 흐르는 네온싸인 불빛보다 더 육욕적이지요.
    립그로스가 덧칠해져 있을 경우엔,
    마치 정액을 바른듯 번지르하여 우리를 훔칫 놀라게도 합니다.

    그러자, 저 분의 빠알간 루주는 과연 누구를 예비하고 있음인가?
    이런 흉측한 생각이 떠오르더란 말입니다.

    감히 할머니가 그럴 실 것도 아니고, 그런 상정을 한 것도 아니지만,
    저 강렬한 화장 빛은 저 집 마당가 한 귀퉁이에서 신음을 토하고 있는
    강아지와 묘한 대비를 일으키면서 마음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것이지요.
    그래서 막연히 빠알간 + 루주 + 예비 이런 일련의 생각들,
    그 파편들이 허공중으로 마구 튀어 올랐던 것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 빠알간 루주는 예비되는 것입니까?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여인네들의 그것은 왜 그리 핏빛으로
    허공중에 튀어올라 산산이 흩어지는 것입니까?

    그 핏빛 한 방울 한 방울이 필경 기도(企圖)하는 무엇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잿빛 마당가 한 구석에 버려진 강아지의 눈물을 거두어 주지는 못하는 것인가?

    하희는 음탕함에 빠져 제 아들을 파멸시키고,
    인연 맺는 남정네들마다 모두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왜 빠알간 루주는 하필 그날 내 앞에 나타나,
    저 강렬한 빛이,
    결코 강아지 눈물 한 방울도 구원하려 하는 의지와 무관하다는
    허무한 콘트라스트를 내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하기에 제 심상에 하희가 떠오른 것이지요.
    제 아들, 지아비까지 파멸시키는 지어미의 욕망으로써.

  3. 은유시인 2010.02.27 22:05 PERM. MOD/DEL REPLY

    어제 신문에 사형제부활이 8:3인가로 무산됐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귀한 생명을 의식한 탓입니다.
    그런데 사형제가 부활했다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법이 여간 몰캉한게 아닙니다.
    빵 한조가리 도둑질한것보다 10억, 100억 사기친 죄가 더 가볍습니다.
    판검사 마음대로 형량이 늘었다 줄었다 합니다.
    법은 잘잘못을 추상같이 가리려고 생긴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려고 생긴 겁니다.
    판검사, 변호사, 사법서사와 그 떨거지들, 법원 주변에 서성거리는 브로커, 법원주변 장사꾼들....

    법은 함무라비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강력하게 적용되어야 법이지 그렇지 않으면 약자들을 옭어매는 쇠사슬로,
    기득권자를 보호하는 갑옷으로 둔갑해버리지요.
    전, 법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국법도 국법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최근 12명이 걸어온 진정서도 수사관한테 분명하게 밝히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지은죄가 있음 난 처벌 받겠다, 저들의 모함을 철저히; 밝혀내라.
    안그러면 내 신문에 고대로 내겠다...
    수사관을 상대로 한 협박으로 여겨도 좋다 했습니다,.

    bongta 2010.03.01 08:38 신고 PERM MOD/DEL

    법가(法家)인 위앙(衛鞅)의 변법(變法) 가운데,
    길에다 재를 버리면 죄를 묻는 항목이 있지요.
    법률로 백성들을 그물로 엮듯이 꼼짝 못하게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것이 변법의 마지막 지향점이지요.

    그러나, 그 법률을 백성뿐이 아니고 귀족층에게까지 알짜 없이 모두 적용시키자,
    진나라 내의 모든 사람들은 위앙의 적이 됩니다.
    위앙의 변법 때문에 진나라가 나중에 천하통일을 이루는 초석을 닦은 게 사실이지만,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가혹한 법을 견디어 내기 힘들어했고,
    귀족들은 기득권을 앗겨 불만이 팽배하지요.
    한 때 법률 위반을 구실로 왕세자까지 욕을 뵈였던,
    위앙은 결국 왕이 죽고 세자인 공자 건이 즉위하자 파멸을 맞게 됩니다.
    그 누구도 위앙의 파멸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진나라에 하나도 없었지요.

    법이라는 것을 천하인 누구라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제멋대로 살기를 원하지 제재를 당하는 것을 싫어하지요.
    귀족층들 역시 사리사욕을 마음껏 취할 수 있는,
    태어날 때부터 보장된 기득권이 법에 의해 제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변법은 개인의 욕망을 제한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주로 사회, 경제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요체입니다.
    이게 국가 입장에서는 일응 성공했지만 이를 이끈 개인 위앙은 실패했습니다.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저의 생각은,
    국가를 위해 개인이 철저히 그 수단, 객체로 전락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개인의 욕망이 무한대로 용인되는 것도 마냥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국엔 잃었던 기득권을 다시 회복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대반격으로 위앙은 축출되고 맙니다.
    이 때 덩달아 백성들이 엄혹한 법을 벗어나긴 하였지만,
    이는 반사적 효과일 뿐 수혜자의 중심은 결코 아니지요.

    기득권 세력인 귀족층들은 예전 위치로 복귀하자마자,
    그들은 잠시 잃었던 권세와 사익을 완전히 다시 되찾습니다.
    위앙 시절엔 법 앞엔 만인이 평등하여 귀족층도 사욕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되었다면 이만큼 백성들에겐 득이 되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을 국가가 다 빨아들였던 것이기에,
    따지고 보면 백성들은 위앙의 변법 시절 전/후 그 어떤 시기에도,
    별로 득본 적은 없다는 것이지요.
    백성들은 귀족층 혹은 국가에게 빼앗기는 객체인 것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개인 위에 있다는 식의 논리는 부정되고 있지요.
    저 역시 국가를 위해 개인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고,
    또한 개인을 국민이란 허울을 씌우고는 충동질 하며 동원합니다.
    때로는 애국심, 때로는 대의라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요.

    저는 대표적인 것이 단돈 월 10여만 원으로 젊은 청춘을 군대로 잡아가는 것을 듭니다.
    병역의무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10만 원의 푼돈으로 개인의 자유를 차압하고, 노역(勞役)을 가하는 것은
    바로 폭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병역의무가 국민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과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동되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사회적인 합의를 거쳐 새로 정비될 가능성이 없다면,
    개인은 어찌 해야 하는가?
    저는 군대를 가서 만기제대한 사람입니다만,
    이런 물음을 가끔씩 스스로 던져봅니다.
    만약 국가란 괴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조금씩 용감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병역을 기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기피자를 엄히 다루고,
    병역에 처하는 동안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이 되돌려지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데 힘을 모았으면 싶습니다.
    나아가 이른 시간 안에 모병제로 전환해도 걱정이 없는 현실의 도래를 바랍니다.

    그런데, 병역과 같은 불공정한 게임은 그게 병역에 한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지요.
    저는 4대강 죽이기 사업 역시 이와 유사하다고 봅니다.
    기득권자인 토건업자 배를 불리기 위해,
    강 자체는 물론 강에 사는 수많은 생령들을 유린하고,
    정작 투자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부문이 외면되고 있는,
    폭력적 억압 구조가 사뭇 엇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앙의 변법이란 기실 이런 자원배분의 왜곡에 착안한 것이지요.
    왜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귀족층들이 국가 재원을 모조리 독식하고 있는가?
    여기 위앙은 착목하였습니다.
    이것만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세상을 뒤집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요.
    만약 이 재원을 국가가 흡수할 수만 있다면 단박에 국가는 부유해집니다.
    거기다 유능한 사람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뽑아 쓰고 대폭 처우를 개선했습니다.
    다행이 위앙은 왕의 전폭적인 후원을 업고 변법을 펴게 됩니다.
    당시의 왕은 진효공(秦孝公)인데, 절대군주국가에서 국가는 곧 왕인 것입니다.
    변법은 부국강병책이라고 말하여지고 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모든 국가의 재부(財富)를 왕 홀로 독식하는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란 이름은 도대체가 하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수증기 같은 추상명사란 도대체가 ...

    흔히 일시 정권을 거머쥔 자가 제 패거리 집단의 사익을 도모하고자,
    국가란 이름을 합법적으로 차용하곤 합니다.
    때로는 합법은커녕 초법적, 탈법적으로 권력을 남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대의 현실 속에서 그 적나라한 실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4대강 죽이기, 감세정책, 병든 미국 쇠고기 수입, 자본통합을 코드로 하여,
    국가란 이름이 도용되고 있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왕과 그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귀족층들은,
    거죽으로는 충성관계로 맺어진 양 싶지만,
    서로 한정된 부와 권력을 나눠 갖기 위해,
    부단히 긴장하고 갈등을 때리고 있는 관계이지요.
    이리저리 그럴듯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백성들을 교묘히 끌어들입니다만,
    기실은 백성이란 그들 안중에는 하나도 귀하지 않은,
    동원 대상에 불과하지요.

    작금의 세태도 보십시오.
    감세정책이란 것이 결국은 신귀족층인 강남부자들에게
    서민들의 돈을 빼앗아 주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전혀 억측이 아닌 게,
    아이들 무상 급식도 저들은 그리도 인색하지 않던가요?
    기초생활수급자 지원 금액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위정자는 신귀족층을 만족시킴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구상인 것입니다.

    위앙 시절과 차이가 나는 것은,
    집권세력이 귀족층들 하고 갈등관계가 아니고 얼핏 협력 관계로 변질된 것입니다만,
    본질은 대다수의 국민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저들만의 잔치를 치루고 있다는 점에선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빼앗어 먹을 것이 궁해지면,
    언젠가 돌아서 저들끼리 획득한 전리품을 나눠먹자고,
    서로를 원수로 삼아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나중으로 미룰 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현장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 간의 싸움박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게 이명박이나 박근혜 간의 갈등은 마치 대립관계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실인즉 저들만의 권력다툼에 불과합니다.
    저들의 바깥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지요.
    가령 용산사태만 하여도 이명박이나 박근혜 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세종시를 고리로 제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지,
    대다수 국민들을 향한 저들의 본질적인 태도는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세종시 문제, 4대강 문제는
    기실 마음보를 펴서 맑은 바람 맞추이고,
    간을 끄집어내어 깨끗한 강물에 씻고나서,
    양심을 밝은 햇빛에 드러내면,
    저것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대세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었을 때도,
    대세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부류가 왜 아니 없었겠습니까?

    서정주는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지요.
    이 말을 뒤집으면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변절은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문맥에 가닿지요.
    해방된 것이 불운이지 자신은 잘못이 없다란 태도이지요.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은 몰랐다.’
    ‘대세니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문법을 따르는 사람은,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
    역사를 배반하는 치한에 다름 아니지요.

    서정주가 지은 그 유명한

    ‘오장 마쓰이 송가’를 다시 꺼내봅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印)씨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대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쪼각 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어러 온
    원수 英米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런 우리의 하늘이여

    노천명 역시 송정오장(松井伍長)을 자신의 시에 끌어들여,
    일본을 위한 죽음이라며 이를 한껏 찬양합니다.

    (※ 송정오장(松井伍長)
    조선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출격하여 레이테만에서 전사한 조선 사람 인재웅(印在雄)을 가리킴.)

    참으로 벨 빠지고, 넋 나간 것이 한국 사람인 것이,
    제 어렸을 때만 하여도,
    서정주, 노천명 따위를 거의 국민시인으로 가르치고 배워왔다는 것이지요.
    도대체가 국격이 얼마나 엉터리이면 해방이후에도
    저들이 단죄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너무 누추한 꼬락서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탄스런 노릇입니다.

    차라리 어떠한 댓가를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위앙을 불러내어,
    이 땅의 역사를 새로 일구어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리 어리석은 민족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저는 위앙을 다시 소환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이 역사 현장으로.

  4. 은유시인 2010.03.01 16:27 PERM. MOD/DEL REPLY

    선생님 성정이 어찌 저랑 이렇게 비슷합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거울을 비춰보는 것 같습니다.

    전 장개석을 부활시켜 한국의 지도자로 삼고 싶습니다.
    모든 자신의 언행에 대해 철저히 책임지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거짓말을 밥먹듯하는 국민들 보노라면 친일인사가 따로 없습니다.
    차라리 서정주나 노천명보다 못한 족속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한국국민들은 또다시 일본에 합병된다면 만세부를 놈들이 태반 같아보입니다.
    거짓말이란 임기웅변이라 할 수 있으니 나라를 동족을 친구를 쉽게 배반할 놈들이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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