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가봉(中假縫)
중가봉(中假縫 or 重假縫)
지금 시대에는 양복을 기성복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내가 대학입학 기념으로 난생 처음 양복을 해입던 시절만 하여도 거의 맞춤양복 일색이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30년 전통을 자랑하던 명보양복점이 유명했었지만,
두 번 정도 거래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시장통에 있는 조그마한 양복점을 단골로 이용했다.
주인 혼자 운용하는 한 칸도 채 못 되어 반 칸 남짓한 곳이었지만,
주인의 실력이 뛰어나 거기서 옷을 맞추면 내 몸에 딱 맞았다.
처음 옷을 맞추게 되면 일단 칫수를 재게 되는데,
최종 옷을 찾기 전 중간에 한 번 더 들려 가봉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가봉(假縫)이란 본바느질하기 전에 임시로 시침질 한 옷을 입고,
제대로 체형에 맞는지 점검하고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는 일을 말한다.
내 단골집은 가봉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서,
비록 가봉 상태일지언정 내 몸에 척척 잘 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아마도 돈을 많이 벌어 다른 곳으로 크게 늘려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새로 바뀐 주인은 먼젓번의 빤지르한 주인에 비해서는
과묵하고 성실한 인상이었다.
그와도 거래를 텄었는데,
양복을 하나 맞추고 가봉 날이 채 돌아오지도 않은
어느 날 저녁 늦게 그가 양복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말하길 중가봉(中假縫)을 하려고 들렸다는 것이다.
듣기에도 낯선 말인 중가봉이라니, 그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가봉을 두 번 하자는 것이다.
이게 손님 입장에서는 옷 만드는 정성이 두 배로 더 투입되니, 고마운 일인 양 싶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남들처럼 한 번의 가봉에 자신이 없으니까,
한 번 더 손을 보아야 안심이 될 정도의 실력이란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약간 의심스럽긴 하지만,
처음 거래이니 그의 실력을 확인할 수 없으니 도리가 없다.
게다가 늦게 남의 집까지 양복을 들고 온 정성이 제법 놀라와
오히려 그의 성실성이 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중가봉 이후 최종 가봉은 내가 그의 양복점에 들려 하게 되었다.
그의 손놀림은 먼저의 주인에 비해 무딘 것이 역력(歷歷)했으나,
공을 들이는 정성은 사뭇 남달랐다.
드디어 완성된 옷을 찾아왔다.
하지만, 후에 다시 맞지 않는 부분을 고쳐야했다.
그 옷을 입는 내내 먼저 번 옷에 비해 적지 아니 불편했으나,
몇 개월 후 추가로 옷을 하나 더 장만할 때,
나는 그의 성실성을 잊지 못하고,
잘못될 부담을 무릅쓰고 그를 다시 찾았다.
“처음이라 조금 서툴렀을 뿐이야.”
“지금쯤이면 제법 익숙해져서 한결 나아졌을 것이야.”
“저렇게 열심히 사는 분은 도와야 해.”
뭐 이런 생각으로 그로부터 옷을 하나 더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찾아온 옷은 첫 번째 옷보다 더욱 내 몸에 맞지 않았다.
먼젓번 주인은 사실 좀 불성실한 사람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다방 레지를 무릎에 앉혀놓고 희학질을 일삼곤 하였다.
언젠가 엄마가 이 장면을 보시고는 쯧쯧 혀를 차시곤 했다.
하지만 옷 만드는 솜씨만은 30년 전통의 명보당보다도 윗길이었다.
내가 세 번째 옷을 맞출 때는 고민을 많이 했다.
성실하나 실력이 부족한 이를 다시 찾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을 개척하여야 하나?
성실성과 실력은 동시만족조건이 아닌가?
박정희도 그랬다던가.
저리 부정부패 일삼는 자를 왜 등용하는가 물으니,
그러면 실력 있고 깨끗한 놈 있으면 찾아와 봐.
일을 도모하려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인재가 있어야 할 노릇이로되,
그 자가 취리(取利)에 밝아 제 사욕에 봉사한다면,
이 또한 낭패라.
***
지방대학 나오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취직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이런 제하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워낙 대학이 많은 이 땅의 형편인지라,
지방대학 졸업생들은 취업에 더욱 애로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경험상 80년대만 하여도,
면접 차 지방대학생들 성적표를 받아보면 거지반 모든 과목에 걸쳐 A학점 일색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지방대학이라야 그 면목이 뻔하고,
서울이라도 학생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대개는 성적 관리가 허술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해서 안되었지만,
나는 전공 시험에서 굳이 등수로 따지자면 2등을 했는데도 B학점을 받았었다.
사정이 그러했는데, 그 후 10여년 새 아무리 급격히 늘어나는 게 대학생이라 한들,
당시 거지반 A학점 일색인 대학생들의 성적표를 접하고는,
이러고서는 도저히 저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심했음을 기억한다.
성적이란 무엇인가?
쌓아 이룬 공적, 실력을 재놓은 객관적 척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 것을 교수가 제들 학생들이 취업에 유리하라고 어지간하면 모두 A 학점을,
선심 쓰듯 뿌려대니 성적 인플레가 일어난 게 아닌가?
급기야 성적표라는 것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 종이쪽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싶었다.
하기에 직원 채용 시 성적표가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성실성을 점검하는 게 사뭇 나았다.
도대체 어느 학생이나 하나 같이 성적이 모두 좋으니,
누구라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최소한 성적표에 관한 한 불신은 저들이 사서 불러 일으켰음이라.
그러면서 나는 예의 ‘중가봉’ 양복점 아저씨를 떠올렸다.
과연 사람의 능력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실성이 우선인가?
아무리 성실해도 실력이 미치지 못하면 과업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직원들간 화합에 문제를 일으키고, 언젠가 회사에 해를 끼치게 될 수 있다.
이게 참으로 어려운 난제인데 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진대,
어떠한 것을 취할 것인가?
인재란 사람 됨됨이도 중요하지만,
적재적소 적임(適任)을 찾아 맡겨 배치하는 것이 요긴하다.
그러하니 실력이든 성실성이든 모두 다 귀한 자원(資源)이다.
하지만, 적임을 따져 이리저리 배치할 여유가 있는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인 경우 한정된 자원 동원 능력으로서는,
부득이 이들 중 하나를 가려 택할 수밖에 없다.
과연,
실력이 우선인가? 성실성이 우선인가?
***
실인즉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까닭이 있다.
나는 어제 사료를 고물할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다 했다.
(※ 참고 글 : ☞ 2010/02/22 - [소요유] - 손가락 없는 부처)
오늘 고물할아버지 강아지에게 사료를 주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내가 가져다준 사료를 보고는 웬 것이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내가 가져다주었다고 하더란다.
할아버지가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이리 힘겹게 말하였다 한다.
“나는 오늘, 내일 죽어가고 있어,
힘이 하나도 없어,
개를 건사할 형편이 아냐.”
그래 가여워 그 사료 부대를 당신이 직접 뜯어 허스키 먹이를 주고서는,
사료 부대를 창고에 손수 넣었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년년세세 왜 강아지를 새로 들였던가?
밥, 물도 주지 않던 인간이,
새삼 기력이 딸려 이젠 건사하지 못하겠다니,
아니 언제는 건사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 내가 말씀 드렸다.
“그것을 믿으셨습니까?
이번이 기회인데 그 사료에 손은 왜 대셨습니까?
쳐다도 보시지 마셨어야지요.
제가 아주머니에게 사료를 드리려면 직접 사다 드리지,
왜 저 인간에게 사료를 가져다주었겠습니까?
저것은 저 할아버지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의미가 있지요.
모른 척하셔야 그 책임을 떠맡겨 다음을 도모할 수 있지요.
그런 것을 아주머니가 손을 대셨으니,
자신은 이젠 손을 댈 이유가 없지요.
저 인간이 옳타구나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어제만 하여도 저 할아버지가 사료를 번쩍 들어올리기까지 하였고,
당당히 내 앞에 버팅기고 서서 이야기 대꾸를 멀쩡하니 다하였는데,
하루 사이에 다 죽어간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다 연기입니다.
그리 겪으시고도 저 인간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그리고 저 집에 할아버지 혼자 사십니까?
허스키 임자인 아들, 할머니, 손자는 그럼 뭐 허깨비인가?
설혹 실패한다고 하여도,
이번에 저들 식구들의 태도를 엿보는 기회로 삼았어야지요.
더구나 아주머니가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갈 요량인데,
어찌 하시려고 그리 하셨습니까?
아주머니께서 사료 부대를 뜯으면서,
강아지 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니,
그럼 아주머니가 앞으로도 계속 챙겨 주실 것입니까?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가여워서 ……”
“저는 저 할아버지가 하나도 가엽지 않아요.
허스키는 가여워도.
할아버지에게 또 속으신 거예요.
어제만 하여도 제 앞에 꿋꿋하니 서서 하나도 잘못 없다는 태도로,
뻔뻔히 응대하던 저 인간이 하루 새에 다 죽어간단 말입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어.
다시 가서 내가 돌보지 못하겠다고 말해야겠어.”
저 아주머니는 어쩌다 동시에 강아지 밥을 주러가다 만나는 수가 있다.
그러면 내 손에 들린 강아지 사료를 달라고 하신다.
내일 주시겠다는 것인데, 필경 아까우신 게다.
소탐대실(小貪大失).
***
利之中取大,害之中取小也。
묵자의 말씀.
나는 이 말씀을 오늘 다시 새겨본다.
斷指以存腕,利之中取大,害之中取小也。
害之中取小也,非取害也,取利也。
其所取者,人之所執也。遇盜人,而斷指以免身,利也 其遇盜人害也。
팔목을 보존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이익 중 큰 것을 취하고,
손해 중 작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작은 손해를 취하는 것은 손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그가 취한 것은 인간의 所執이다.
도적을 만나 손가락을 잘리어 자신이 화를 면하였다면 그것은 이익이지만
그가 도적을 만난 것은 손해이다.
利之中取大非不得已也 害之中取小,不得已也。
所未有而取焉是利之中取大也 於所既有而棄焉,是害之中取小也。
“이익 중에서 큰 것을 취한 것은 부득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은 부득이 해서 그렇다.
아직 없는 것에서 취하는 것은 이익 중 큰 것을 취하는 것이요,
이미 있는 것에서 버리는 것은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손해를 보아야 할 때는 부득이 하게 손해를 봐야 한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든가,
자그마한 이익을 탐하게 되면,
대실(大失)한다.
그깟 사료가 무슨 대수이기에,
언덕을 올라 매일 건사하는 수고에 비하랴.
그동안 이리 시간을 바친 것은,
저 인간이 그래도 인두겁을 썼다면,
조금이라도 양심이 돌아,
행여 깨우쳐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던 것도 있음이라.
이게 도시 무망한 노릇인 것이 진작에 판명된 것이로되,
어제 할아버지에게 사료를 갖다 준 것은,
그게 저 사료는 할아버지의 것임을 자임하게 함이라.
그 때라야 저자가 책임을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간 사료도 제일 고급으로만 공급해왔다.
한데에서 지내는 저 강아지들에게 힘을 내라는 의미로 그리 챙겨왔던 것인데,
그게 저 인간을 어여삐 여겨서, 가여워서 그리 했음인가?
나는 저 인간이 밉다.
저 인간이 저것을 쳐다보면서 혹여라도 한 번, 두 번 주기라도 할 것이며,
그리되면 계속 일을 추동(推動)할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최소한 사료가 다 없어질 때까지는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인데,
아주머니가 거기에 손을 대서 그나마 만사휴의(萬事休矣)라.
하기사,
저 인간이 만에 하나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망(難望)한 것이니 탓함이 다 부질없는 노릇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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