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심(機心)과 중기(重機)
자공이 남쪽 초나라에 놀다가 진나라로 돌아가려고 한수 남안을 지나는데,
노인 하나가 밭이랑을 만드는 참이었다.
그는 파낸 우물 안으로 들어가 옹기에 물을 길어 밭에 물을 대었다.
허나, 힘을 쓰나 별로 이룬 것은 없었다.
자공이 말한다.
“여기 기계가 있소 하루에 백이랑에 물을 댈 수 있소.
힘은 적게 들고 공은 많을 것이니 써보지 않으려오?”
그러나 노인은 쳐다보며,
“그게 무엇이오?”
“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뒤는 무겁고 앞은 가벼워,
물을 끌어오는 게 마치 물건 꺼내듯 하고,
빠르기가 마치 물 끓듯 하니,
그 이름인즉 용두레라고 하오.”
그러자 노인 농부는 분연히 낯색을 바꾸며 웃음 지며 이른다.
“내가 우리 스승께 들으니,
기계가 있으면 그를 쓰는 기사(機事)가 있으며,
기사(機事)가 있으면 필시 기심(機心)이 있다.
기심(機心)이 흉중에 있으면, 순백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순백을 갖추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한다.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를 지킬 수 없다.
내가 이를 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즉 하지 않을 뿐이다.”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子貢南遊於楚,反於晉,過漢陰,見一丈人方將為圃畦,鑿隧而入井,抱甕而出灌,搰搰然用力甚多而見功寡。子貢曰:“有械於此,一日浸百畦,用力甚寡而見功多,夫子不欲乎?”為圃者卬而視之曰:“奈何?”曰:“鑿木為機,後重前輕,挈水若抽,數如泆湯,其名為槔。”為圃者忿然作色而笑曰:“吾聞之吾師:‘有機械者必有機事,有機事者必有機心。’機心存於胸中,則純白不備;純白不備,則神生不定;神生不定者,道之所不載也。吾非不知,羞而不為也。”子貢瞞然慚,俯而不對。
이상은 장자(莊子)의 천지(天地)에 나오는 글귀이다.
기심(機心)을 경계하는 말씀으로는 자못 흉통(胸桶)을 울리는 명문이다.
機械 → 機事 → 機心
이 말씀의 구조는 기심이 있기에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있음으로서 절로 그를 쓸 일이 생겨나고,
그러함으로서 이제 기계를 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욕심이 잉태됨을 경계하고 있음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젠 조금 더 효율이 좋은 것을 찾을 테이고,
그것을 찾아 삼만 리인들 걸어 헤매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음이다.
그러고서 어찌 그 마음보에 도를 실을 수 있으랴?
내가 최근 비닐하우스를 지으려고 약간 경사진 곳의 터를 닦았다.
굴삭기가 한 대 왔는데 이게 통칭 ‘공삼’이라고 불리운다.
버킷(bucket)의 크기를 일컫는데,
그리 큰 것은 아니나 오밀조밀한 흙일을 하는데는 적당하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보자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지난 석삼년 주말농사를 짓는다고 제법 삽일을 하였지만,
몇 삽 뜨지 않아 이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데 저 공삼이란 기계는 가히 용력(用力)이 무쌍(無雙)하지 않은가 말이다.
옆에 선 기사는 물경 1톤급 처리 능력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다관절(多關節) 붐(boom)대는 지모(地母)의 육신에 철바가지를
꽂아 넣으며 단숨에 그녀를 유린한다.
아,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그녀의 속살이 뻐개지고,
진홍빛 아픔이 새어나온다.
저 기계가 없었다면 어느 인간이라 한들,
감히 천년 비밀을 간직한 지모의 속내를 훔쳐 볼 수 있었으랴?
한 삽 가득 허공으로 들어 올려져 이내 땅에 부려지자,
거기 낭자(狼藉)하니 흩어지는 황토가 낱알 낱낱이 햇빛을 맞는다.
마치 수컷 정액 세례를 맞은 연어알처럼 붉은 흙의 낭자(娘子)는 바르르 떨고 만다.
그러자 부끄러움도 잊고 차라리 온전히 붉디붉은 제색을 발하며,
자지러질 듯 허리를 잦히며 숨이 차오른다.
벅차오르는 희열에 교성을 내지르며 기어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햇님 역시 반짝 빛살로 내닫아 순간에서 영원을 가로지른다.
곁에선 나는 기꺼이 저들의 해후(邂逅)에 증인이 되고자 한다.
서문경이 반금련과 만났을 때 찻집 노파 왕파는 이를 훔쳐보며 오금이 허물어지도록 자지러졌을 것이다.
나 역시,
오늘,
저 현기증 나도록 빛나는 거룩한 현장을 이리 증언한다.
여기, 빛과 황토가 빚은 역사는 이리 시작된다.
혹, 내가 매파(媒婆)일런가?
태양과 지모(地母)를 이리 만나게 하는 게 공덕을 지음인가?
지모의 정절을 허무는 조방(助幇)꾼인가?
(※ 助幇 : 오입판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따위를 함.)
저 일을 내가 삽으로 하였다면 어느 천년인들 일을 이룰 수 있을까나?
과연 장자의 말씀이 옳구나.
기계가 있음이니 기사(機事)가 있고,
기사가 있음이니 기심(機心)이 생긴다 함이니,
그 차서(次序)가 여실하고뇨.
만약 기계가 없었다면 어찌 인간이 저리 역사(役事)를 벌여,
땅을 팔 생각인들 할 수 있으랴?
그러하니 실로 기심은 기계가 있음으로써 생겨나는 것,
기계를 쓰지 않으면 기심을 자제할 수 있을 터가 아니겠는가?
정녕 나의 욕심의 내력이 이러하고나!
내가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다,
곁으로 웅웅하며 내지르는 덤프트럭을 만나면,
멈칫 속력을 줄이며 긴장을 하게 된다.
“저넘의 덤프트럭은 최소 기사 나이가 사십은 넘어야 몰도록 해야 돼 ...”
혈기방장(血氣方壯)한 젊은이들이 저것을 몰면,
차도 미쳐 날뛴다.
평소 이러했는데,
이번에 내가 중기(重機)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분들 하나 같이 순박하기 이를 데 없고 착하기 짝이 없다.
저 큰일을 떡 주무르듯 단 숨에 해치우니,
사뭇 인간세 공덕이 여여하다.
집에 돌아오는 찻길,
나는 저들의 수고로움에 고마워,
가슴이 절로 울렁거려지며 감복하고 만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역사(役事)를 단 이틀 만에 끝마치니,
천년 역사(歷史)가 문득 오늘 여기 밭 한가운데 버킷으로 일순(一瞬) 버무려지고 말지 않았는가?
사뭇 놀랍고 경이롭다.
평소 저들의 위용 앞에 쫄아,
공연히 알지도 못하며 탓을 하였음이니,
무지한 나를 이제야 반성한다.
하나건설중기 사장님 그리고 또 한 분의 기사,
어찌 하나 같이 이리 친절하고 순박한지 나는 그저 내심 감탄한다.
최근 여기 만나는 사람마다 교활(狡猾)하고 삿(邪)된 이가 많았으나,
이들로 인하여 다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혹여 연천지경 중장비를 사용할 분들은
이들을 만나는 복을 짓기를 기대한다.
광고 말씀이라 탓할지라도,
나는 감히 떳떳하니 이리 말할 수 있다.
오늘.
* 하나건설중기 : 031-833-0608
그러한데,
나의 못난 기심(機心)은 어디 가서 용서를 빌지?
과연 무엇으로 빌어야 하나?
농심(農心)으로 값아야 하리.
토심(土心), 지덕(地德)을 본(本)으로,
삿되지 않게 바른 길을 걸어가 보자.
그저 뚜벅뚜벅,
正히, 貞히, 淨히, 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