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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모신(地母神)

소요유 : 2010. 3. 11. 22:43


지모신(地母神)

문화현상 일반에,
地와 母의 결합은 있어도,
天과 母의 결합은 왜 없는가?

땅엔 갖은 식물이 자라고 이들이 가을엔 열매를 맺는다.
어미 역시 생명을 잉태하여 아이를 생산(生産)한다.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여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이 때라야 문화(文化)가 싹튼다.
의식이 족해야 문(文, 紋) 즉 꾸밈의 행위가 가능해진다.
(※ 참고 글 : ☞ 2008/02/29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
그러자 ‘어미’와 ‘땅’의 생산성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어미’란 단순히 여자가 아니다.
여자이되 회임(懷妊), 포태(胞胎), 출산(出産)을 할 수 있는 현실태를 지칭한다.
계집아이처럼 그러리라 예상되는 가능태인 경우는,
여성(女性) 또는 여성성(女性性)이란 추상적인 표현을 가할 뿐이다.

딴뜨리즘에서 여성 구루는 ‘어미’로서가 아니라 여성성의 에너지,
즉 샤크티의 총화로 떠받들어진다.
이때엔 굳이 위에서 말한 ‘어미’일 필요는 없다.
고도로 추상화된 ‘여성성’을 대상으로 수련을 할 뿐,
포태, 출산 등의 구체적인 현실행위는 불요하다.
단 여성과 구극의 열락(悅樂)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교접은 허여(許與)된다.
고도의 추상성과 현실적 구체성의 결합 형식,
딴뜨라는 이 양날개 구조로 허공을 저어 나간다.

땅도 소산(所産)의 능력이 있고,
여성도 매한가지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놀라울 뿐인가, 땅이 내놓는 곡식을 먹고 명이 지탱되고,
여성이 출산한 아이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유한한 생명의 무한성을 향한 도전이 가능해진다.
이 양자의 결합인 지.모(地.母)는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다.

신(神)이란 흔히 오해하듯이 그리 마냥 성(聖)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났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광대무변 막측(莫測)한 곳에 버려진 존재에게,
먹고 살 식량처럼 경이로운 것이 도대체 어디에 더 있는가?
그 경이로움에 대한 찬탄(讚嘆)을 끝 간 데까지 밀고 가보면,
도리 없이 경배하여야 할 대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만약 만들어내지 못하였다면 불안하여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체 없는 곳을 향해 가슴이 터질 듯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폭발할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제일원인(第一原因)을 창출해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원시인은 진정되고,
자기가 창출한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그대는 아시는가?
오밤중 산길을 걸을 때,
자기 그림자라도 따라와야 덜 불안하지,
그마저 없으면 도통 겁이 나고 귀신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 같아진다.
그러하기에 공연히 소리 높여 노래도 부르고,
나뭇가지를 꺾어 휘두르며 요란 방정을 떠는 것이다.

결국은 이게 자기애가 아닌가 말이다.
자기 그림자에 안심하고,
자기가 만들어낸 神으로 인해 입명(立命)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라니.
한편으로는 이것을 지혜라고 불러도 가할 것이다.
이리로라도 안심입명할 고안물을 만들어내었다면,
이게 칭찬을 들을 구석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할 성 싶다.
물론 그러하기에 가상의 세계에 안주하는 미혹함을 들어 탓을 할 수도 있긴 하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리 나약한 것이다.
때문에 세속적이다.
거꾸로, 속되지 않았으면 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종교는 탄생전야에 이리 세속적인 사연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성(聖)스러운 이는 존경스럽다.
그는 나약하지 않다.
갈매기 조나단은 외롭지만 위대하다.
하지만 종교라는 이름에 덧씌워진 성스러움은 사뭇 의심스럽다.
실인즉 성스러운 인간이라야 성스럽다는 헌사를 받칠 수 있음이다.

리그베다를 보면,
인드라, 수리아(태양신), 루드라(폭풍의 신), 아그니(불의 신), 우사스(새벽의 신) 등
수많은 신이 등장한다.
저들은 하나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수없이 많은 신을 창출한다.

나는 神을 인간이 가진 원초적 불안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묘하게 그리고 멋지게 불안을 해소한 저들의 심미안을 나는 사랑한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이다.
그 이상을 넘어 신을 절대화하여 거기 복속하고,
이게 거꾸로 삶의 질곡이 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그것은 참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슬퍼진다.
나라면, 신(神)과 더불어 놀이하듯, 춤을 추듯,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족하다.
마치 연극을 보며 즐겁고, 슬프고, 긴장하고, 때로 몰입하여 갈등을 때리지만,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서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서서히 현실의 세계로 귀환한다.
이런 귀환의 통로가 막힌 거의 강박증에 걸린 환자의 상태를 방불하고 있는 현생종교의,
작동원리, 그래 교묘히 위장된 그 음습한 도모(圖謀)를 나는 거부한다.
설혹 거기 빠져도 내가 내 의식을 가지고 빠질 뿐,
언제든지 원하면 복귀가 가능한 종교라면 나는 열 개라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종교가 세상에 있기는 있나?
종교지기들은 하나같이 제 종교가 최고라고 우긴다.
그리고 거기 구원이 있다고 꾀고,
한편으로는 죄와 벌이 있다고 협박한다.
저들은 끊임없이 개인을 사슬로 묶으려고 안달한다.
하긴, 이런 방식이야말로 위험부담없이 가장 수지를 맞출 수 있는 수법이긴 하다.
이런 협작(挾作)은 내겐 여간 고약하게 보이지 않는다.

옆길로 잠깐 새었다.
정작은 지모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식물이 땅의 도움만으로 자라는가?
아니다 하늘이 있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빛과 빗물을 받아야 식물이 온전히 자란다.
땅과 하늘 모두 필요하다.
그러함에도 지모(地母)는 있어도 천모(天母)는 없다.
왜 그런가?
땅은 구체적인 실천현실이 일어나는 터다.
열매가 하늘에 열리는가?
아니다, 땅만이 이 현실이 체현되는 유일한 장소다.
그러하니 母란 생산과정이 마지막으로 완성되어 표출되는 출구다.
모든 공덕(功德)은 땅이 차지한다.
늘 그러하듯이 그원인보다 결과는 선명하니 가시적이고 직감적이다.
마지막 공은 그 결과를 지은 자에게 돌아가고 마는 것.
그러하기에 생명현장에선,
母와 地는 동시 축복의 유일(唯一)한 아니 유이(唯二)한 대명사가 된다.

하늘, 아비.
그래 이것을 천부(天父)라고 불러두자.
이들은 그저 비 뿌리고, 정액을 쏟아내고는 역사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인 것을.
절대 주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천둥치고 번개치고 잔뜩 위엄을 부리거나,
권세다툼 벌이고, 갖은 악행, 죄를 짓는 것은 수컷인 하늘과 아비들 차지다.

그들은 그저 물방울 하나의 가치만 있을 뿐인 것을.
빗방울 하나, 정액 한방물의 슬픔들,
수컷의 존재태는 이리 허망하니 외롭다.
그래서 사는 동안 그리 부산스럽고 거친가 보다.
(※ 참고 글 : ☞ 2008/02/12 - [소요유/묵은 글] - 주리(主理)와 주리(主利) - 남녀의 code)

歸命

虛空地母大慈尊
虛空地母大慈尊
虛空地母大慈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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