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團)
단(團)
‘단(團)’의 훈(訓)은 ‘둥글다’이다.
집단(集團)이라 할 때 이 글자가 들어간다.
이렇듯 ‘단(團)’에는 단체, 모임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단체는 둥글다?
왜 그러한가?
사발통문(沙鉢通文)은 격문이나 비밀회합에서 주모자가 누군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적은 것을 이름한다.
이는 애초에 주모자가 있다했을 때, 이를 보호할 목적도 있다.
하지만, 통문을 적으며 참여한 인사들이 이리 한데 모였을진대,
개개인들 중 누가 주모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미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모두들 원환(圓環)을 그리며 손에 손을 잡고 한데 어우러져서,
뜻을 모았다는데 뜻이 있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지,
그 뜻을 일으킨 선후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하니, 본시 단체란 피라밋 구조로 상하 위계가 있다든가,
방형(方形)으로 모가 나 그 신분에 차별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게 모여 자리한 대로 모두 동일한 가치 무게를 가질 뿐이다.
그래서 단(團)인 것이다.
원래 단체란 평등조건으로,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모임인 것이다.
둥그런 달처럼 원만 구족하니 뜻으로서 모인 저들이 어찌 갸륵하지 않을손가?
하지만 현실에선 어떠한가?
추동(推動)세력이 앞에 나서고,
추종(追從)세력이 뒤를 잇거나, 받쳐 따르게 되는 게 일상이지 않은가?
뜻과 의지가 구체적 현실에서 표출될 때,
집단이 가진 역량은 대체로 이런 분배 형식을 따른다.
승가(僧迦)는 산스크리트어로 samgha의 음역(音譯)인데,
무리, 집단이란 뜻을 가진다.
이게 한자로 중(衆) 또는 화합중(和合衆)으로 변역되기도 한다.
원래 승가는 집단을 가리키지만 후에 개인을 가리키기도 하였는데,
번역된 중(衆) 역시 원래는 무리를 가리키는 복수지만,
나중엔 그 무리에 든 개인을 가리키게 된다.
우리가 스님을 흔히 중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중은 바로 어원상 이로부터 연원한다.
나는 생각한다.
왜 승가도 그렇고 중도 마찬가지로 무리를 가르치는데,
개인을 가르치는 말로 쓰임이 변하게 되었을까?
이는 화자(話者)가 개인을 드러내는 상황임에도,
단순히 외톨이가 아니라, 그 뒤에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 강조하려는
의도가 그리 짐짓 꾸미듯 과장된 화법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령 조직폭력배에 소속된 똘마니 하나가,
관리업체에서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들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이름을 내뱉으며 잔뜩 허세를 부리는 경우와 유사하다.
예컨대 굴다리파 소속 박동팔이,
“나 박동팔이다. 수금하러 왔다.”
이리 말하지 않고,
“나 굴다리에서 수금하러 나왔다.”
이리 말하는 게 상대를 겁박할 때 사뭇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각설하고,
승가는 원래 석가가 정각을 이루고 5명의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최초로 승가가 성립된다.
석가를 포함하여 모두 동일한 규범으로 규율되고,
평등하게 인격적인 지위가 보장되는 그런 집단을 승가라 부른다.
이게 차츰 조직원이 늘면서,
도리 없이 승계 질서가 위계 차서로, 또는 층층 상하 마련되고,
각종 규율들은 율장(律藏)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의 순수한 열정, 뜻으로 모인 평등한 관계가,
차츰 번다한 조직질서와 수직 규율로 변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이 땅의 불교 종단은,
이런 뜻은 다 잃고 각 계파간 이익을 다퉈,
세속 법에 의지하여 소송을 불사하고,
몽둥이, 도끼를 들고 설치며 패거리 싸움박질도 마다하지 않고 있음이 아니던가?
하기에 단(團)은 둥글어야 한다.
평등한 뜻으로 뭉치되,
규율로 삼가고,
구체적 실천행으로써 뜻을 구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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