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우울한 날.

소요유 : 2011. 4. 27. 22:07


오늘은 다 좋았는데 저녁 들어 돌연 우울해졌다.

날씨가 우중충한 날은 제법 근사하다.
작은 일에도 곧잘 잔나비처럼 날뛰던 흥분도,
더운물 뒤집어쓴 푸성귀처럼 푹 재어 잠재우고,
다만 잿빛 하늘이 저으기 지상에 내려 놓는 말씀,
그 은밀한 밀어(密語)를 듣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하다.

밭에 스프링클러(sprinkler)를 설치하려고 펌프 하나를 들였다.
진작에 부속 배관 자재를 다 채비하여 두었으나,
식재 작업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어두다.
우천(雨天)을 기회로 어제 오늘 쉬며 놀다가 짬짬이 배관 작업을 하였다.
 
이게 제법 재미가 있다.
물론 업으로 한다면 나름 고충이 있겠지만,
구경(口徑)을 맞추고,
암수(雌雄)를 분별하고,
곡직(曲直)을 안배(按配)하는 짓,
그 짓이 마치 모자잌 퍼즐을 풀어가듯 흥미로운 것이다.

하기에 서양에선 배관공이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머리가 좋지 않으면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선로만 길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그러하니 배관공은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머리도 여간 좋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임을 여실히 깨닫는다.

나는 익숙치 않아 배관 부속품도 두어차 주문하고,
배관 부속 조합을 그르쳐 공연히 분주하니 수선을 떨었으니,
과히 재간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이리저리 궁리를 터,
배관 부속들,
짝을 맞추고,
관로(管路)를 엮어 물길을 트는 일은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다.

***

그가 내게 나타나면,
부탁할 것이 있다든가,
아니면 내게 무엇인가를 앗아갈 때이다.

그가 나타나면 우선은 편치 않다.
사람이 한 사람의 출현을 꺼린다면,
이것은 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내가 불행한 것이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게 한 톨의 이(利)가 있다한들,
남에게 한 말의 유익(有益)함을 끼치고,
한 섬의 덕(德)을 베풀며,
삼가 진 곳 마른 곳을 가려 걸어야 할 것인데 ...

‘섬 틈에 오쟁이 끼겠나’란 속담이 있다.
바리바리 볏섬을 쌓고는 그 틈에 오쟁이까지 끼워둘 셈이란 뜻인데,
여유가 있는 사람이 더 악착같이 탐욕을 부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한편으론 세상사 알록달록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지만,
참으로 사는 게 허허로워 이내 쓸쓸해지고만다.

저녁 들어,
돌연 우울해진 까닭 하나다.

***

여기 시골에 내려와,
가장 인간적인 분으로 내심 짐작되어,
내 홀로 마음을 내주었던 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다.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나는 심히 헛갈린다.
천도(天道)는 과연 옳으냐 그르냐?”

사마천(司馬遷)이 한 말인데,

하늘이 과연 계신가?

젊어서 이리 시골로 시집와,
모진 고생을 하셨다는 그 분.

과연,
天道, 是邪非邪!

선하고 어진 이를,
왜 하늘은 가만히 두지 못하는가?

과시(果是),
하늘에 바른 길은 있는가?

저녁 들어,
돌연 우울해진 까닭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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