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놀부전은 논픽션이다.

소요유 : 2011. 5. 10. 18:32



놀부전은 그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게 사실도 아닌데 재미있게 꾸며낸 구담(口談)으로 알고들 있다.

그런데, 나는 놀부전은 단순한 구담이 아니고,
최근 드디어 논픽션이라는 강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놀부전의 작가는 필시 주변에서 실제 목격하고 겪은 가운데,
이야기 소재를 직접 취재(取材)하였을 것이다.
없는 가운데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구 지어낸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내가 근래 4년 새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과연 그러할 수 있는가 하는 일들이 그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생산이 된다.
사람이라면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키다가도,
나는 이게 단순한 일회성 실수나 착오의 소산(所産)이겠거니 하며,
미심쩍은 나의 의심들을 바닥에 툭툭 털어버리곤 하였다.

그러한 것인데,
년년세세 이러한 일들을 변함없이 듣고, 겪으면서,
나는 드디어 나의 의구심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점을 찍듯 점고(點考)해가며,
이것은 의심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당전(當前)하는,
구체적 현실태(現實態)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우침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처에게 이른다.
주변에 국문학 전공하는 이가 있으면 내게 보내라.
놀부전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인 게라,
혹여 고전문학비평을 공부하는 자라면,
놀부전이 논픽션이란 실증사례를 내가 제공할 터이니,
그는 나를 만나야 할 것이다.

‘보나세’란 사이트를 운영하시는 분은 일찍이 사람의 질을 이리 넷으로 나눴다.

'악질, 저질, 범질, 선질'

'성선설, 성악설'
이런 사상들보다 얼마나 직설적이며 실제적인가?

악질,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그릇이란 게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일체의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하지만 일천제(一闡提) 즉 잇찬티카(icchantika)는 성불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본래 이 말은,
‘현실적인 욕망을 쫓기 바빠 불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일천제는 한역(漢譯)하여 여러 말이 있는데 그중 단선근(斷善根)이라고도 하는데,
선한 뿌리가 아예 끊어진 이를 가리킨다.

역사적으로는 부처의 사촌동생인 데바닷다가 대표적인 일천제라고 알려져 있다.
부처를 암살하려했다는 오명을 듣고 그는 일천제로 낙인이 찍혔다.
일설에는 기독교의 도마 또는 유다처럼 교리상의 이견으로 주류에 밀려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도 하는데...
거기까지는 내 연구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만 부처든 일천제든 이게 정치적인 영역, 그래 내가 흔히 쓰는 갈등 때리는 국면에 들어오면,
늘 그러하듯이 작금의 현실 정치판처럼 뿌연 안개 속에 갇혀 오리무중이다.

어째건 단선근(斷善根)라니, 이런 자라면 기실 몇 천겁을 지나도 성불하기는 요원할 것이다.
때문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란 종지(宗旨)를 내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일천제(一闡提)를 불경에 심심치 않게 등장시키면서,
극대비(極對比) 콘트라스트를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불경은 단순한 종교 경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 같이 특정 종교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 자에겐 저게 외려 드라마틱한 문학으로 보이는 것이다.
일체중생이란 사람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동물, 식물 유정물을 넘어 바위, 구름 따위의 무정물까지도 아우르고 있는 말이다.
삼라만상, 티끌까지도 불성이 있다고 이르고 있음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잇찬티카를 등장시키면서 스스로 이 말씀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다.
이보다 더 웅혼무비(雄渾無比)한 말씀이, 이야기가, 문학이 있을 수 있음인가?

일천제를 벗어나려면 거듭 죽어야 한다.
삶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불성의 싹을 틔어내야한다.
왜?
삶은 욕해(慾海)인 것이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일천제가 되기를 선언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들을 불러 보살천제(菩薩闡提)라 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지장보살, 유마힐이 그들이다.
그들은 부처가 될 위(位)를 버리고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영.원.히. 자.진.하.여. 기.꺼.이. 천제가 되고 만다.
도대체 이 보다 더 위대한 드라마가 또 있는가?
이를 불교문학에서는 진즉 대비(大悲)라고 이른다.
(※ 참고 글 : ☞ 2008/10/13 - [농사] - 월루(月淚) - 달의 눈물)

'악질, 저질, 범질, 선질'
앞에서 소개한 이 4질론에서의 악질은 당세(當世)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자가 과거세에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또는 내세에 어떤 모습일 것이라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천제(一闡提)는 과거세는 물론 미래세에서도 비선(非善)하다.
참으로 끔찍하다.

하지만,
비선(非善)하다면?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비선(非善)은 악(惡)과 다르다.
악(惡)은 선(善)의 대척점에 서서 자기 자신의 독립적 위(位)를 획득하고 있다.
반면 비선(非善)은 선(善)에 종속적이다.

마치 신수(神秀)의 다음 게송을 연상시킨다.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有塵埃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즉 본래는 선(善)한데 일시적으로 비선(非善)할 뿐이다.
그러하니 언젠가는 선(善)의 자리롤 돌아갈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악(惡)하다면,
그저 악(惡)한 게다.
선(善)과는 단절되어 있다.

일천제(一闡提)가
악(惡)이 아니라
비선(非善)하다면,
몇 겁이곤 흘러 언젠가 선(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악(惡)하다면, 영원히 악(惡)할 뿐인 것을.
4질론에서는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다.
다만 당세(當世) 여기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때론 이게 훨씬 그럴 듯하게 여겨지곤 한다.
구질구질하게 행을 닦아 묵은 업장(業障)을 눅이고,
미래를 기약하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보다 한결 간명하다.
그런만큼 더욱 삼엄하니 시퍼렇다.

놀부 역시 당세(當世)에 악(惡)하다.
이런 이야기 구조이기에 놀부전은 짜릿, 강렬하게 재미가 있다.

내가 만난,
오늘에 재현된 놀부 역시 일천제(一闡提)가 아니라,
그저 악질(惡質)이기에 한결 이야기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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