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초선(草禪)

농사 : 2011. 9. 29. 11:12


내가 농원을 개설하면서 작물을 심었는데,
남들은 거개가 하는 방초시트를 덮지 않았다.
방초시트는 말 그대로 방초(防草) 즉 풀을 막는 sheet를 말한다.
이 방초시트로는 부직포라든가 차광막 따위를 쓰거나 전문적으로 개발된 방초망을 사용한다.
이들로 작물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 포장(圃場)을 덮어 풀이 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리 하면 풀이 자라는 것을 억제하여 관리 품을 한결 덜 수 있다.
이보다 더 모진 방법으로는 제초제를 뿌리는 것이다.
이는 방초시트에 비하여 사뭇 비용이 덜 들고 간편하다.
하지만 약해로 인해 자칫 잘못하다간,
일하다 쓰러지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나는 주말농사 시절부터 자연농법을 고집하여,
제초제는커녕 멀칭용 비닐도 일부만 사용하고 그냥 풀과 함께 작물을 재배하였다.
대신 예초기(刈草機)를 장만하여 틈이 나는 대로 풀을 베어나갔다.
하지만 풀엔 장사가 없다.
이쪽 끝을 다하고 저쪽 끝에 이르르면,
맨 처음 예초를 하였던 곳은 다시 다 자라나 있다.
 
예초기를 메고 밭에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도 아프고, 손목도 시큰, 팔뚝도 뻐근해진다.
이게 대략 10kg 정도 되는데 장시간 이를 메고,
작업봉을 휘두르면서 연(

) 수 십 km를 휩쓸고 다녀야 되니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다.

아무리 예초기를 능숙하게 다룬다고 하여도,
작물 밑은 자칫 다칠까봐 피해가기 때문에 늘 베지 못한 잡초가 남아 있게 된다.
이런 것까지 참아내지 못할 양이면,
필경은 낫을 들고 일일이 손으로 뽑아내야 한다.

하기사,
나는 이젠 포정해우(庖丁解牛)를 흉내 낼 정도엔 이르렀다.
풀과 흙 사이에 칼날을 넣어 흙 한 점 건드리지 않고 풀의 생장점을 끊어낸다.
칼날은 하나도 무디어지지 않아 19년을 내리 써도 칼날은 새것과 진배없다.

몇 년 후 나는 아마도 이리 기염을 토하지나 않을까 싶다.
장자에 나오는 저 포정이여,
네 무딘 칼날로 어찌 감히 나의 칼날과 겨루고자 함인가?

莊子 - <庖丁解牛>


庖丁為文惠君解牛,手之所觸,肩之所倚,足之所履,膝之所踦,砉然嚮然,奏刀騞然,莫不中音。合於《桑林》之舞,乃中《經首》之會。文惠君曰:“譆!善哉!技蓋至此乎?”庖丁釋刀對曰:“臣之所好者道也,進乎技矣。始臣之解牛之時,所見無非牛者。三年之後,未嘗見全牛也。方今之時,臣以神遇,而不以目視,官知止而神欲行。依乎天理,批大郤,道大窾,因其固然。技經肯綮之未嘗,而況大軱乎!良庖歲更刀,割也;族庖月更刀,折也。今臣之刀十九年矣,所解數千牛矣,而刀刃若新發於硎。彼節者有間,而刀刃者無厚,以無厚入有閒,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雖然,每至於族,吾見其難為,怵然為戒,視為止,行為遲。動刀甚微,謋然已解,如土委地。提刀而立,為之四顧,為之躊躇滿志,善刀而藏之。”文惠君曰:“善哉!吾聞庖丁之言,得養生焉。”

 

“... 저는 기술이 아니라 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 소를 잡았을 때는 왼통 소만 보였지요. 하지만 3년이 지난 후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봅니다. 감각기관을 여의고 마음이 닿는 곳을 따라 일을 하지요. 하늘의 이치만 따르기 때문에 커다란 틈과 구멍에 칼을 놀려 그 기술로 아직도 긍경을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칼잡이는 한 달에 만에 칼을 바꿉니다.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년 동안 수천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이 방금 간 것처럼 날카롭습니다. 뼈마디엔 사이 틈이 있고, 칼날엔 두께가 없습니다. 두게가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넓고 넓어(恢恢) 칼날을 놀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때문에 19년이 지났지만 칼날은 방금 간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매번 일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경계합니다. 보는 것을 숨죽여 멈추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미묘하게 칼을 다룹니다. 살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 마치 흙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고는 머뭇거리다가는 이내 만족하여져 칼을 거둬 챙깁니다. ......”

나는 예초를 하면서도 이것은 무엇인가 미련한 짓이 아닌가?
이리 회의를 하곤 했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초망을 씌우지 않아 미련한 것이 아니라,
풀과 이리도 각박하게 싸우는 짓거리가 우둔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풀은 제 아무리 인간이 다스리려고 하여도,
이를 가열차게 비웃으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밭을 덮어간다.
필경은 풀과 겨루지 않고 친해지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농사를 지으면서 해결하여야 할 나의 과제이다.

자연의 생명력을 인간의 의지로 꺾어가려는 모습이,
마치 당랑거철(螳螂拒轍)처럼 얼마나 우매한 것이더냐?

‘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씨는 무농약 유기농 사과농사를 짓다 실패하고는 자살하려고 산에 오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인가?
기무라씨의 밭과 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흙이 달랐던 것.
산의 흙에선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고, 미생물이 풍부하다.
하지만 열심히 풀을 뽑아낸 기무라씨의 밭에선 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이제부턴 풀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는 세칭 기적의 사과가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주말농사 시절엔 어느 해 전 밭에 콩을 심었다.
하지만 풀을 제어하지 못해 낟알 하나 건지지 못했다.
풀과 함께 작물을 키운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풀이 번무(繁蕪)하여 작물을 덮어버릴 지경에 이르면,
작물은 이에 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사과 같은 키가 큰 과수라면 혹여 이를 이겨내고 높이 자라면 모를까,
초본 작물은 풀을 이겨내기 어렵다.

특히나 일반 작물 또는 과수는 인간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개량된 것이기에,
자연계에 그냥 내버려두면 저들 야생의 강인한 생명력을 이겨내지 못한다.
열매를 크게 한다든가, 달게 만든다든가 하는 점에 중점을 두어 개량하고,
충분한 비료를 주어야 제 역할을 하게 만들어졌기에,
자라면서 사람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제대로 발육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그냥 식물이 아니다.
인간에게 종속된 새로운 종인 것이다.
인간의 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게 끊히면 그냥 명을 놓고마는 특수한 생명.
현대에 존재하는 거개의 모든 작물, 과수가 그렇다.
이게 따지고 보면 영악한 짓거리를 넘어 여간 가여운 노릇이 아니다.

기무라씨의 사과 역시 자연계의 야생 상태 그대로인 능금, 사과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개량된 현재의 사과란 품종은 이미 예전의 사과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비료, 농약, 제초 따위의 사람에 의한 관리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10년 남짓 기무라씨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풀을 키움으로써,
사과가 저 깊숙이 간직한 원래의 본성을 일깨운 것일 것이다.
차츰 그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사과가 비로소 맛과 향을 뿜어낸 것일 것이다.
이런 노력은 전 인생을, 아니 목숨을 건 생활 철학의 실천 의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하다.
잘은 모르지만 기무라씨가 학문이 깊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일본인 가운데 노장(老莊) 철학을 농업에서 실천적으로 행한 사람을 가끔씩 만나게 된다.
가령 후쿠오카 마사노부도 그중 한사람인데 이 분 역시 풀과 친한 농업을 짓는다.

나는 언감생심 그 정도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고,
그저 방초시트를 깔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때문에 수시로 예초기를 돌려 풀을 단속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실정으로는 풀을 그냥 놔두면 과수가 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 말라죽을 터이니까.
이 시험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나아갈지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천천히 공부하듯 나아간다.

어쨌건 나는 밭에 예초기를 메고 나선다.
악착같이 뿌리까지 뽑아내겠다는 심산으로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과수가 치여 눌리지나 않을 정도로 적당히 타협하며 잘라나간다.
하지만 혼자 일을 치르기엔 다소 넓은 밭이라 이만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

묵묵히 예초 작업을 해나가다 보면 정신을 다른데 팔 틈이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접신의 경지에 오른 무당처럼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곤 한다.
등짝에 땀은 흐르고 팔은 아파오는데 이게 익숙해질 때쯤이면,
불현듯 달달하니 느껴지는 기분과 야릇한 향이 가슴께를 지나 뇌리까지 피어오른다.
이 때 슬쩍 산들 바람이라도 지나면 묵직하던 예초기도 가쁜 가쁜 설렁거리고,
정신은 뜨락에 핀 가을꽃처럼 맑고 깨끗해진다. 

스님네들이 출가해선 삭도(削刀)로 머리를 자른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이른다.
12연기(十二緣起)를 순관(順觀) 할 때 처음 출발은 무명으로부터다.
자르고 잘라도 또 자라나는 머리카락, 풀을 아우러 무명에 빗댄,
저들의 비유가 고심참담(苦心慘憺)한 가운데 사뭇 그럴 듯하다.

( ※ 12연기(十二緣起) :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

첫 출가함에 계사(戒師) 스님으로부터 수계 받고 본사(本師)께선 머리카락을 자른다.
이때 낙발(落髮) 게를 읊는다.

毀形守志節 割愛無所親
出家弘聖道 願度一切人

형을 허물어 지절을 지키며,
애를 끊고 소친과 이별한다.
출가해 성도를 넓히고,
일체 중생을 제도할 사.

여기 형을 허물고, 애친(愛親)을 끊는다는 말처럼 삼엄한 말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음인가?
손끝부터 시작한 소름이 팔뚝을 자르나니 살처럼 지난다.
내가 가끔씩 저들을 탓하곤 하지만,
이만으로도 삼가 저들에게 존경의 념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복전(福田)이라 이르는 오정덕(五淨德)에 역시 같은 말씀이 있다.

一者 發心離俗,
二者 毁其形好
三者 永割親愛
四者 委棄軀命
五者 志求大乘

예서 형을 허문다는 말은 곧 법복(法服)을 입는다는 것이니,
이는 삭발염의(削髮染衣)한다는 말과 같다.
머리카락을 밀고 물들인 옷을 입는다는 것이니,
과연 무명초(無明草)를 자름으로써 무명 번뇌를 끊을 수 있음인 것이며,
애친을 잘라 적막(適莫)을 없앨 수 있음인가?

내가 여름 내내 아니 상금(尙今)도 예초기를 메고, 낫을 들고,
온 밭을 헤매이다시피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풀은 매양 다시 돋아난다.
체발(剃髮)하고 승복(僧服)을 입는다고 무명에서 벗어난다면,
온 천하에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든 중들이 갠지스 강 모래알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유식(唯識)은 오위백법(五位百法)을 말한다.
이게 무착(無着), 세친(世親)의 작법체계이지만,
오위백법(五位百法) 아냐 백위천법(百位千法)으로 벌려놓는다한들,
따지고 보면 12연기(十二緣起)로 돌아가고,
오온(五蘊)에 다름 아니다.
하나로 돌린다면?
오위백법(五位百法)은 다만 무명번뇌(無明煩惱)일 따름인 것을.

( ※ 오온(五蘊)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

스님네들이 때맞춰 옹기종기 모여들어 체발식(剃髮式)을 행한다.
어떤 이는 금란가사 쫙 뽑아 입고 위엄을 뽐내기도 하고,
혹은 판수쿨라를 다려 입고 폼을 잡는다.
그래 화두는 아직도 성성(惺惺)한가?
무명은, 번뇌는 과연 사라졌는가?
아마도 저들 가슴팍엔 욕심이, 머릿속엔 어리석음이,
우리 농원 밭에 자라는 풀보다 더 무성하지 않을까?

( ※ 판수쿨라 : 분소의(糞掃衣),
불에 타고, 쥐가 쏠고, 계집 월경한 천 등으로 만든다.
온갖 더럽고 천한 것으로 기워 만든 옷.
중들이 수행의 방편으로 입는다고 하지만,
개중(

個中

)엔 폼 잡고 뻐기느라고 입는 양도 싶다. )

여자들은 역시 독하다.
내가 설겅설겅 예초기를 메고 온 밭을 헤매듯 돌아다녀도,
힘이 딸리고 어깨가 저리고 팔목이 시큰거려 죽겠는데,
내 처는 하나하나 잡초를 뽑겠다고 대든다.

“아, 그리하려면 어느 명년에?
딱 10평 농법이고뇨.
그 이상은 어려운고,
그릇이 그러한데 어찌 말리겠는가?
그러다 끝내는 옆집 누구처럼 제초제 치자고 덤비게 된다.”

물론 우리 집 사람은 절대 제초제를 칠 그럴 위인은 아니다.
하지만 방초망을 치자고 채근한다.
하다못해 비닐멀칭이라도 하자고 한다.
하마, 내년엔 일부 시험 삼아 그리 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위생관념은 필경 사내사람이 아니라 계집사람이 세운 것일 것이다.
중세 시대 골목길은 집집이 밖에 내다버린 오물, 똥으로 범벅 진창 수준이었다.
뾰족구두 만들어 진창을 골라 딛고 다니다.
닦고, 소독하고, 예방주사 만들고 ...
필시 이게 다 계집사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하기에 우리네 속담엔 이리 이르고 있다.

‘과부 집엔 은이 세 말, 홀아비 집엔 이가 서 말,’

무명을 자른다고 부지런히 삭도로 잘라내지만,
이도 부족하면 단지(斷指), 단비(斷臂)도 예사로 하고,
끝내는 제 몸을 불사르는 분신(焚身)도 불사한다.
무상(無常)한 것이라,
번뇌는 여전히 풀처럼 다시 돋는다.

허나,
풀을 매는 저나,
풀을 내버려두는 나나,
모두 미망(迷妄)인 것을.

밭에 바람이 살랑 불어온다.
나는 문득 신수와 혜능을 떠올린다.

神秀 偈  唐 神秀大師 (당나라 신수대사의 게송)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有塵埃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慧能 偈  唐 六祖慧能大師 (당나라 육조혜능대사의 게송)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佛性常淸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何處有塵埃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 참고 글 : ☞ 2009/02/01 - [소요유] - 무선무불선(無善無不善))

연신 풀 뽑는 신수,

허나, 풀과 작물은 하나인 것을.
혜능은 장작 패고 방아질을 하며,
법조(法祖) 스승 홍인(弘忍)의 말씀을 기다린다.

祖以杖擊碓三下而去

지팡이로 세 번 땅을 쿵쿵 내지르는 말씀인즉,
야반삼경 법을 받으로 오라는 것이라 (三更受法),
六祖大師法寶壇經엔 이 장면을 이리 문학적으로 장엄하고 있다.
그 때 조사가 설한 것이,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何期自性,本自清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

자성은 이리 구족한데,
풀을 뽑는 정성은 무엇이관대.

훗날 신수는 북종선을 일구고,
혜능은 남종선을 선양한다.

신수가 앞에 있음으로써 혜능의 길이 마련된 것,
북이 있고 나서야 남이 있는 것,
아니 북은 북, 남은 남인 것.
비록 혜능이 의발(衣鉢)을 물려 받았지만,
수미쌍관(首尾雙關), 내겐 신수와 혜능은 법(法)의 자오(子午)일 뿐 차등이 없다.

번뇌(煩惱)가 곧 지혜(智慧)가 아닌가?
번뇌즉보리야(煩惱卽菩提也)

환이로세, 꿈결인 것이니,
당체는 모두 빈 것임을.
如幻如夢 當體全空

고로 도는 둘이 아니다.
故道不二相

생사 역시 열반과 다르지 않다.
旣體達生死卽是涅槃故滅無生相

時時勤拂拭이나,
本來無一物이나,
이게 다른 것이냐 같은 것이냐?

새는 숲에 들고,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친다고 했다.
농부인 나는 무명초 풀속에 노닌다.
鳥入森林, 魚遊大海, 我遊草場

밭은 풀의 도량(道場)
초(草), 번뇌(煩惱), 보리(菩提) ...

선사(

禪師

)
아니 나는 고법대덕승(高法大德僧)이 아니니, 
선사(禪士) 농부 bongta.


***
***


※ 참고 사항

출처 : http://blog.naver.com/mandala7/130009870941
감사합니다.

오위 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俱舍論 : 색본심말(色本心末)

 

色(11) 眼·耳·鼻·舌·身[五根], 色·聲·香·味·觸[五對境], 無表色
心(1) 六識
心所
(46)
大地法
(10)
受·想·思·觸·欲·慧·念·作意·勝解·三摩地
大善地法
(10)
信·不放逸·輕安·捨·慚·愧·無貪·無瞋·不害·勤
大煩惱地法
(6)
癡·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
大不善地法
(2)
無慚·無愧
小煩惱地法
(10)
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
不定地法
(8)
尋·伺·睡眠·惡作·貪·瞋·慢·疑
心不相應行法
(14)
得·非得·衆同分·無想·無想定·滅盡定·命根·生·住·異·滅·名身·句身·文身
無爲法(3) 虛空·擇滅·非擇滅

 

 

 

오위 백법(五位百法)

 

大乘百法明門論 · 成唯識論 : 심본색말(心本色末)

 

心(8) 眼·耳·鼻·舌·身·意[前六識], 末那識·阿賴耶識
心所
(51)
遍行(5) 作意·觸·受·想·思
別境(5) 欲·勝解·念·定·慧
善(11) 信·慚·愧·無貪·無瞋·無癡·勤·輕安·不放逸·行捨·不害
煩惱(6) 貪·瞋·癡·慢·疑·惡見
隨煩惱
(20)
忿·恨·覆·惱·嫉·慳·誑·諂·害·憍·無慚·無愧·掉擧·惽沈·不信·懈怠·放逸·失念·散亂·不正知
不定(4) 悔·睡眠·尋·伺
色(11) 眼·耳·鼻·舌·身[五根], 色·聲·香·味·觸[五對境], 法處所攝色
不相應行(24) 得·命根·衆同分·異生性·無想定·滅盡定·無想報·名身·句身·文身·生·老·住·無常·流轉·定異·相應·勢速·次第·方·時·數·和合性·不和合性
無爲(6) 虛空·擇滅·非擇滅·不動滅·想受滅·眞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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