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야묘소묘(野猫素描)

생명 : 2008. 2. 21. 10:05


저는 얼마전 "이제 유기견을 보면 차라리 눈을 감으렵니다"라는
제목의 어떤 분 글에 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제 댓글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동산양개(洞山良价)란 스님이 있습니다.

 중 하나가 있어 스님께 여쭙습니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데, 구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구하지 않는 게 옳은지요? 
 스님이 말씀합니다. 

 구하는 즉, 두눈이 멀 것이요. 
 구하지 않은 즉, 형체도 그림자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僧問 蛇呑蝦
 救則是 不救則是
 師云 救則雙目不睹 不救則形影不彰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http://www.songchol.net)"


이를 화두로 두고 며칠 전에 일어난 얘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녁에 산에 올랐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목표 지점 거의 다가서 예사롭지 않은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앞에 부부 등산객이 있었는데, 그 부부 뒤를 '마치 강아지가 사람  따르듯'
고양이가 일정 거리를 두고 쫓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 지점은 산의 7부 능선쯤 되니깐 산고양이 외에는 집고양이가 있을 수 없지요.
반대로 집고양이라면 부부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간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 의아심이 들어 부지런히 부부를 쫓아 갔습니다.
어스럼 산중에서 만난 그런 고양이를 그려 보십시요. 얼마나 괴이쩍은지.

거리를 좁혀 뒤에서 물었습니다.

"데리고 온 고양이입니까"
"아닌데, 아까서부터 쫓아오고 있더군요."

부부는 연신 무심한 채로 앞을 가르고 나아갑니다.
저는 발걸음을 바삐 재촉하여 고양이 있는 지점에 이르릅니다.
앞뒤로 끼인 고양이가 조금 위협을 느꼈는지 그제서야 길섶 숲으로 잠깐 물러섭니다.
그런데 멀리 도망 가지는 않고 힘없이 쭈빗쭈빗 저를 쳐다봅니다.

"왜 그러니 ?"
"...."
"어디 아프니 ?"
"...."

순간 배가 고프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밥 달라고 위험을 무릎 쓰고 부부를 죽어라 쫓아 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번쩍 스쳐갑니다.
예사롭지 않은 고양이의 뒤쫓음 행동을 기초로 이리 추리해 본 것입니다.

"고양이야 너 배 고프니 ?"
모습이 추레한게 지쳐보입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마침 사료 담은 비닐 봉지가 손에 잡히더군요.
전날 집시 강아지 주고 남은 사료가 마침 제 주머니에 들어 있었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사료 봉지를 끄집어 내며 풀려는 순간 고양이가 숲에서 나와 제게 달겨 들더군요.
순간 저도 당황하여 옆으로 빗겨 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강아지처럼 제 곁을 서성이더군요.

사료 봉지를 풀어 근처 바위 위에 뿌려 주었습니다.
냉큼 달겨 들어 먹는 폼이 이건 완전 걸신 들린 모습입니다.
그런데 남아 있던 사료라 한 웅큼 밖에 안되어 간에 기별도 안 가겠더군요.

허기가 져서 위험을 무릎 쓰고 부부를 쫓아 가고 있었던게 틀림없었음이 판명되는 순간입니다.
산속이라 가진 게 없으니 더이상은 도리가 없습니다.
먹는 것을 보고, 제 길을 하릴없이 오릅니다.

약수물을 떠담고, 재우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사료 뿌려준 바위에 있는게 아닙니까.
여간 배가 고프지 않았던가 봅니다.

"내일 밥 많이 가지고 올 테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오늘은 그냥 꾹 참고, 내일 꼭 이리로 와야 한다."

이리 이르며 내려옵니다.
뒤를 보며 확인하니 고양이는 이젠 길섶을 벗어나 수풀에서 기운없이 쪼그리고 있습니다.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일없이 내려 올 뿐입니다.
오면서 등산객을 보면 먹이를 얻어 볼까 궁리를 틉니다.
그런데 행색을 보아하니 전부 물통을 진 분들이고,
늦은 시간이라 배낭에 먹을 것을 가지고 온 분들이 있을 턱이 없지요.

결국은 산을 다 내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근처 음식점에 들어 갔습니다.
약간의 돈을 내밀며 밥이나 손님 먹던 것이라도 좋으니 음식을 달라고 청합니다.
의아해 하는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고 미쳐 준비를 못하고 왔는데,
소용이 돼서 그러니 달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고개를 가우뚱 합니다.
행색을 보아서는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거지로 보였을까 ?
늘 마음이 허갈진 물건이니.
밥을 달라니 이상하게 볼만도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게서 걸인으로 의심을 받는 순간입니다.

더이상은 계면쩍어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고양이 주려고 그런다고 실토를 합니다.
그런데 고양이 먹이 주는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배고파 다 죽어가는 고양이 주려고 한다고 주석을 덧붙입니다.

그제서야 경계를 풀고, 그럼 고기를 주어야 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곳은 음식점이 연달아 2개가 붙어 있는데 첫집은 보신탕 메뉴가 늘 붙어 있으니
당연히 피하여 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고기란 말에 저는 바로 "여기는 보신탕 하지 않지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주인은 눈에 빛을 내며 주문을 받아 공급한다고 자랑스러이 말합니다.
일단 상시로 다루지는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

전 밥 한 그릇을 비닐에 담았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멸치를 한 웅큼 거저 줍니다.

다시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이젠 어둠이 침윤되기 시작하여 바삐 서두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산은 어둠이 빠릅니다.
홍길동 축지 쓰듯 발걸음을 날려 다시 산을 오릅니다.

제 손에 든 밥봉지의 따스함이, 마치 사랑에 눈이 멀어,
제 어미의 심장을 도려내, 처녀에게 가져 가던 그 심장처럼 제 손을 슬프게 번집니다.
엎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며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하는
그 소리가 들리는 듯 왠지 맘이 매워집니다.

제가 다니는 길은 외진 곳이라 거의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코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부부를 산에서 만난 것도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 고양이가 마침 그 부부를 따른 것은 제 눈에 띄려는 인연을 짓기 위함인가 봅니다.

한 5부 능선 올라 갔을까,
아까 그 부부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그 고양이가 다시 따라 내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
저는 혹시 만나지 못할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손에 든 제 밥봉지를 보고, 그 부부 왈

"동물애호가이신가 봅니다"

전 속으로 이리 먼저 답합니다.

"전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리 말하면 그 부부는 인간 아니란 말로 들릴 수 있기에
이리 답합니다.

"동물애호가가 아니라,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동물애호가라야 동물에게 밥을 줄 수 있다는 이 묵시의 권위
그 권위가 세상을 아득하니 덮고 있다.
우리는 사시장철 갑옷 입은 불임의 계절을 달린다.

어제 제가 쓴 댓글귀를 아래 다시 되뇌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
 시리도록 슬픈 도리.

그들 부부는 아마도 밥 짓는 연기 피어 오르는 굴뚝이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
오손도손 저녁을 먹을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입니다.

문제의 그 고양이를 만난 곳은 우리 곁을 떠나간 우.리.강.아.지 유분(遺粉)이 있는 곳입니다.
찻 숟가락 셋도 안 될 그가 그리움의 안개가 되어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그 곳,
전 그 자리를 서성이다 지치면 너럭바위에 앉아 글을 읽곤 합니다.
아마 우리 강아지는 그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고양이 근처에 서러운 듯이 울고 있는 더 작은 아기 고양이를 또 봅니다.
그를 위해 먹이를 잘게 부시고, 목이 메일까 물을 축여 나눠둡니다.

고양이는 이젠 저를 신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배가 고파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일까요.
등을 쓰다듬어도 경계심 없이 가만히 내 맡깁니다.

허리 근처 뱃가죽이 앙상하니 붙어, 쉬이 맞창을 낼 판입니다.
산은 거의 사슬 꼭지를 고양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리 배를 곯으니 산도 할미 젖꼭지처럼 말랐는가요 ?
특히 밤의 산은 고양이가 온전히 접수합니다.

밤 12:00 파란 인광을 내며 달겨드는 고양이 그것도 3-4마리.
저는 산에서 혼자 이들을 인견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갖고 올라간 북어를 돌로 짓이겨(부드럽게 풀려고) 먹이며
빌듯이 죄를 떨쳐내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야말로 귀신을 만나러 간 자리였군요.
그런데 그 때 귀신은 보진 못했습니다.
오늘 얘기의 현장에서 더 한참 올라간 그 곳,
그 고양이들이 덤처럼 생각나는군요.

내려오는 길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가 생각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자, 제 얘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이번엔 맨앞에서 적은 그 화두를 들고 새 말을 이어 봅니다.
원래 화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니 말 붙일 틈이나 있을까요.

그러나 오늘 영험한 고양이의 힘을 빌어 잠깐 언어도단의 세계를 농(弄)해 보지요.

다시 적어 보지요.

 동산양개의 蛇呑蝦 얘기에서 보통은
 (救則)雙目不睹 귀절은 청자(聽者)를 주어로 보아
 그대의 두눈이 못 보게 될 것이라 풀고,
 (不救則)形影不彰 귀절은 주어를 개구리로 보아
 개구리가 죽게 된다고 풉니다.

고양이 밥을 주었으니 저는 도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허기를 달래주었으니 후귀(後句)를 부셨습니다.

고양이 밥을 주어 도를 잃었으나,
그 도 잃는 허물을 대중에게 참회하니 정상이 참작되려나요.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요.
불벼락 맞을 일이지요.
화두란 그리 물러 터진게 아닙니다.

집으로 오면서 이 화두와 연관지어 저는 실은 방정식을 재미 삼아 세워 보았드랬습니다.
화두가 저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에 차가운 금속성 셈판을 들이밀며 완전히 고체화 시키는 것이지요.
기체화 되어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 되버리면 제가 지게 됩니다.
행여 공덕을 꿈꿔 액체화 되면, 갓바위의 아낙처럼 천년 파리손일 뿐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화두를 수학에 가두어 기롱(譏弄)합니다.
최근 어느 분의 오해처럼, 윤리를 윤리학에 가두 듯, 그렇게.
그러나 이는 그들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니
저 또한 이 방법으로는 본원적으로 해를 구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과학처럼 정치(精緻)한 그러나 메마른 기침같은 서양의 윤리학을 흉내내 보았을 뿐이지요.

(0.5) + (0.5*0.5) - (0.5*0.5*.05) + ...... =
0.5 + Σ (-1)n square*(0.5)n-s.......
oscillation하면서 divergence하는 고양이 밥주기의 공덕 평가 수리모형....

수식편집기가 없으니 엉터리 놀음은 그만 두지요.

그런데 이런 류의 화두는 김성동의 만다라에 나오는
병속에 든 새 꺼내기처럼 심술 궂고 고약스럽지요.
외관상으로는 우로 가든 좌로 가든 걸려 들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1979년 현재 김성동은 새를 병에 가뒀다.
  2005년 현재 사람들은 티컵에 강아지를 찍어낸다.
  질식할 만한 가치전도 앞에 난 거름 든 똥장군을 창인 양 꼰아 들고 세상을 겨눈다.

한가지 제나름대로의 힌트를 드립니다.
사실 화두에 힌트가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무문관, 벽암록이니 하는 책에도 평, 송이 따릅니다.
아마 그 고승들도 입이 몹시도 간질간질 하였나 봅니다.

기지와 골계로 유명한 순우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자를 골려 주려고 이런 문제를 냅니다.

예기(禮記)에 남녀 친수(親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특히 형수와 시동생 사이는 손수 주고 받는 일이 엄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순우곤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남녀가 손수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

맹자는 "그야 물론이오."

그러자 순우곤이 "그럼 형수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을 때
손을 내미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까 ?"

맹자왈 "아닙니다. 그런 때 손을 내밀지 않으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손을 내미는 것은 임기응변의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우곤이 이어 "지금 천하가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선생은 왜 그것을 구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

맹자왈
"형수가 물에 빠져 죽어 갈 때는 손을 잡아 구해주지만,
천하가 물에 빠졌을 때는 도(道)로 구하는 법입니다."

유가는 이리 성실합니다.
화두를 풀려고 유가의 힘을 빌리면 고양이가 죽게 되었으니
밥을 주어야 한다라는 답 이상은 얻어 낼 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태도로는 화두를 절대 깨뜨릴 수 없습니다.
아니면 화두 놀음이라게 기실은 가짜일까요.
실제 후기유교에서는 절반의 오해와 절반의 의도로 불교의 위선을 엄청 공격합니다.
한결 같은 유가의 성실함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제 화두를 낸 본당(本堂)의 태도를 한번 엿볼까요.

아주 계율이 청정한 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홍수가 심하게 져서 빨리 개울을 건너야 할 형편입니다.
거기 처녀가 하나 있었습니다.
불교 역시 음행을 금하니 여성 몸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성큼 그 처녀를 업고 개울을 건너 목숨을 구합니다.

후에 그 스님의 제자가 이리 묻습니다.
"스님, 스님은 어째서 그 때 여자 몸에 손을 대었습니까 ? 계율을 어기신 게 아닙니까 ?"
차라리 그 남근(男根)을 독사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음행치 말라 가르치는 불교니,
시자는 응당 그리 책하여 물을 만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스승되는 스님이 말합니다.
"네 눈엔 여자로 보이더냐 ? 내 눈에 사람이 보였을 뿐이니라.
내가 구해낸 것은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니라."

자 어떻습니까 ?
제가 만난 고양이가 여전히 고양이로 보이십니까 ?

사실 고양이 이야기는 공개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제가 공개하는 순간 저는 이미 공덕은 커녕
동산양개(洞山良价)가 쳐놓은 그물 안에 갇히게 될 뿐입니다.
더우기 공덕이 있다 한들 남에게 발설한 순간 깡그리 깍이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얼마전에 어느 댓글로 이리 적었 놓았듯이  말입니다.

 봉사와 자선이란게 보은과 선과를 기대하고 행하면,
 지옥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악행과 이기심에 매몰되면 역시 죽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전자는 단연코 믿습니다만,
 후자는 믿지 않습니다.
 권선징악같은 고대소설식 계몽주의,
 칸트의 요청적 사유는 왠지 초라하게 보입니다.)

저 역시 그 스님과 매한가지로 고양이를 구한 바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보은과 선과를 기대한 것도 역시 아니요,
저 동산양개(洞山良价)라는 땡중이 쳐놓은 그물에도 걸릴 것도 없는 게지요.
(* 참고로 불교에서는 살부살조(殺佛殺祖)의 전통이 있어
누구라도 부딛혀 깨뜨리고 나아가는 것을 본령으로 합니다.)

"형수 손을 잡는 시동생"이
아무런 장애가 아닌 그런 세상을 그려봅니다.

노파심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제 나름대로 파적(破寂) 삼아 글놀이를 한 것입니다.
화두는 스스로 타파할 것이지 남이 간 길은 이미 재미없는 가짜입니다.

각자는 각기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상대가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남의 길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것.
전 이리 배웠습니다.
제 매운 맘은 부.당.함.에도 걸리지 말라고 주문합니다만, 이 자리에선 이리 양보합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데,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지 않느냐 ?
자기 일 또는 남의 일의 총량을 제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교고량(比較考量)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한 옳지 않지요.
설혹 안다고 하여도 마지막까지 알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 그 길은 그의 몫입니다.
그래서 남의 길은 내겐 없습니다.

질그릇을 굽는 사람은 그 일을 하도록 그냥 놔두어야 합니다.
내 유리잔을 채우기 위해 남을 동원하는 것은 철없는 어.리.광.짓에 불과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약조건(constraint)이라고 불러도 좋고,
물리학의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 또는
실존의 한계상황(限界狀況 boundary situation)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어쨌건 그 존재가 놓여 있는 그의 특수상황을 존중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남의 길을 물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모두(冒頭)에서 인용한 제 댓글에 이어 있던 제 말대로
고독지옥(孤獨地獄)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孤獨地獄 在山間曠野樹下空中等 라고 하였으니 결국 온천지 처처(處處)가 다 지옥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동물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든 장본인(張本人)인들 지옥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살아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길을 뚜벅뚜벅 걷습니다.
물론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무리를 짓기도 합니다.
이것이 단(團)이지요. 이름처럼 달 둥근 그것.

감사합니다.


ps)

"자선(慈善)엔 위선(僞善)이 따른다."
전 이 자작(自作) 경귀의 칼날 위에 제 심장을 올려 둡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하여도 연탄을 이용한 온돌로 난방을 해결했습니다.
온돌(溫突)을 등 밑에 깔고 따스한 평화를 얻었지요.
마치 자선처럼.

그런데 연탄가스가 그 온돌 장판 틈을 뚫고 스며 올라와 겨울철이면 적지 아니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락사란 가스를 생명이란 이름 밑에 깔고 삽니다.
이런 땐 냉돌(冷突)이 그지없는 자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리하니 긴, 언제 올지 모르는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지나고 있는 중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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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ooo :
....
혹, 님이 말미에 언급한 冷突의, 님의 의미를 알수있을런지요..


bongta :

ooo님/

온돌(溫突), 냉돌(冷突)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선(慈善)엔 위선(僞善)이 따른다."

이 말의 제단(祭壇)에 자신을 발가벗겨 눕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제단 밑으로 자신의 피가 석되 닷말이 흐를 것입니다.
이것이 자선(慈善)이 가진 역설입니다.

만약 아직도 제단에 자신을 눕힐 자신이 없다든가,
누워도 흘릴 피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차라리 냉돌을 택해야 합니다.
냉돌은 악(惡)일지언정 위선은 아닙니다.

위선(僞善)은 악(惡)보다 곱은 부끄럽습니다.

달마대사에게 양무제가 말합니다.

"짐은 절을 세우고 경을 간행하며 승려들을 권장하오.
그러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라고 질문합니다.

달마는 "무공덕(無功德)이오"라고 잘라 말합니다.

달마는 그후 면벽(面壁) 9년에 들어 갑니다.
차가운 동굴에서.

제 글에 묻어 있을 위선이 전 무섭습니다.
말하는 찰나마다 구슬알처럼 죄가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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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소개한 개울 건너는 스님 이야기는 제 기억에 의지 하였습니다만,
아마도 짐작컨데, 출처가 여기인가 싶군요.
선문선답(禪問禪答) - 조오현, 1994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기에,
원전이라든가, 어디 다른 곳에서 제가 대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의 불교에 대한 지적 방랑시기를 고려할 때, 1994년 훨씬 이전일 터이지만,
웹으로 검색해보니, 현재로선 선문선답이 출처라고 해두는 것이 예의라 생각됩니다.

여기 그 내용을 떠 옮겨 두어, 후일 참고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할 내용이 윗글 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고, 의미심장하군요.
감사합니다.

***

왜 여자를 안고 잠자리에 드는가 -覺仙原坦山-

하라단잔(原坦山 ;1819-1892) 선사는 에도 후기와 메이지시대
의 철학교수이다.

하라단잔 선사는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날 예순 통의 편지를 쓰
고는 제자에게 모두 송달하리고 했다. 그리고 세상을 떴다.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하루는 운쇼(雲照) 스님이 하라단잔 선사를 찾아왔다. 운쇼 스
님의 불교의 계율을 엄히 지키며 살았다.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고, 아침 11시 이후로는 일체의 음식물을 먹지 않았
다.
어느 날 하라단잔 선사는 술에 만취되어 있으면서도 운쇼 스님
이 온 것을 알고 말했다.

"어이, 친구 왔나! 어서 들어오게. 술 한잔 할텐가?"
운쇼 스님은 화가 안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술을 안 먹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래, 그래. 자네 술을 입에 대지 않지! 하지만 술 한잔 못하
는 녀석도 사람인가?"
이 말에 운쇼 스님은 더욱 화가 나서 말했다.
"술 한잔 못한다고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나는 무어란 말인
가?"
이에 하라단잔 선사가 갑자기 엄숙한 어투로 말했다.
"자네? 사람이 아니고 부처야 부처."

하라단잔 선사가 에키도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큰 장마를 만났
다. 시골길의 깊이 패인 곳으로 갑자기 흙탕물을 넘쳐흘렀다. 마
침 아리따운 처녀가 그 흙탕물을 건너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
었다.
하라단잔 선사는 얼른 뛰어가 말했다.
"이리 오시오. 내가 도와 드리리다."
이 말과 함께 처녀를 번쩍 안고 흙탕물을 건네주었다. 에키도
는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녁이 되어 둘은 가까운 절을 찾아가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었
다. 에키도가 입을 열었다.
"수도승은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것도 젊고 아
리따운 처녀는 더 더욱 안 되는 가야. 여자를 가까이하는 일은
수도승에겐 매우 위험한 일이야. 그런데 자넨 왜 낮에 그런 일
을 했는가?"
이때 하라단자은 금시 초문인 듯 말했다.
"낮에 무슨 일을 했는데?"
괘씸하다는 듯이 에키도가 다시 말했다.
"낮에 예쁜 처녀를 덥썩 안고 흙탕물을 건네주지 않았는가?"
하라단잔 선사는 그제야 생각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 일 말인가? 나는 그 여자를 흙탕물을 건네준 후 그곳
에 두고 왔는데, 자네는 이곳 잠자리까지 데리고 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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