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낮달

생명 : 2008. 4. 29. 12:43


동네 산기슭 국유지에 집 한 채가 들어서 있다.
그 집 주인은 폐지를 주워 생활하신다.
우리는 그를 고물 할아버지라 부른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듯, 처음 본 내게 oo교회 다닌다고 소개를 한다.
자랑스러이 자신은 수십년 신자라며 얼굴이 환해지신다.
때문에 자신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가 돼지고기를 종교적 금기로 여기는 것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일이니,
그 분의 신심을 미루워 짐작할 수 있겠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 집엔 늘상 강아지 너댓 마리가 묶여 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랬다가는 다시 하나 둘 강아지 숫자가 늘어난다.
이러길 년년세세 반복한다.

하늘엔 달님이 백도(白道)따라 차고 이지러진다.
여기 산기슭 오두막엔 강아지들이 달님 쫓아 늘었다 준다.

그가 말하길,
교회 사람들이 그에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키우다 처리하기 곤란할 때,
이 고물 할아버지에게 넘기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언젠가 나는 그리 끝까지 건사하시지 못할 것인데,
그 부탁을 왜 거절하지 않으냐고 여쭈었다.
그는 말하길 교회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란다.

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부담을 남에게 넘겨 위안을 얻고,
고물 할아버지는 넘겨 받을 때 사례비를,
나중에 개장수에게 팔 땐, 다시 이를 얻는다.
양자는 이리 음습한 공범의 관계였던 것이다.

언덕에 자리잡은 oo교회 사람들은 햇빛 내리쬐는 성전안에서
고은 소망을 빌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리라.

저들 교회신자는 자신들의 평안을 위해 sink가 필요했고,
저 고물 할아버지는 푼돈을 위해 기꺼이 sink가 된다.
어둠을 쓸어넣는 수채구멍, sink 말이다.

그런데, 강아지가 어둠인가 ?
생명은 곧 찬란한 빛이 아닌가 말이다.
그 어떠한 생명이라도 결단코 어둠일 수 없다.

저들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어둠이요, 미망이다.
개숫대에 쓸어넣어야 할 것은 정작 저들 흉한 마음이 아닌가 ?
저 빛 내리는 성전에 기도 올리는 저들 가슴에 고인 그 죄악들 아닌가 ?

저들이 말하는 성전에 빛이 임하신다면,
미욱하나마 빛을 기릴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빛이 곧 생명일진대,
생명을 쓰레기 치우듯 거래하는 저들,
아니 곧 우리들이겠음이니,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 성전에서 감히 무릎인들 꿇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뒷동산 넘어 저쪽 외딴 집에도 커다란 개가 있다.
어느 날 그 집 개는 소위 뜬장 위로 올려졌다.
(※ 뜬장 : 커다란 닭장같은 것으로 밑이 쇠철망으로 되어 똥이 밑으로 빠지게 된다.)
그 날 이후, 그 진돗개의 울음 소리를 차마 더는 듣기 힘들다.
주인 드나들 때마다 꼬리를 쳐서 반기던 그들을 어느 날 뜬장으로 올리는
저 모진 마음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
사는 것이 너무 진저리쳐지도록 슬프다.

국립공원 안에도 민가가 두어채 있다.
그 중 한 민가는 암암리에 술을 판다.
그 집 뜰에도 강아지가 사육된다.
이 역시 년년세세 사라졌다 봄 되면 다시 채워진다.

60년대 못 먹던 시절도 아닌데,
돈 몇 푼 벌겠다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팔아 넘기는 저들이 나는 밉다.
정말, 화가 솟는다.
아니 그들이 아니라,
나는 내게 기어히 화가 난다.
어찌 할 수 없이 무력한 내게 나는 화가 난다.

한동안 나는 고물 할아버지를 외면하며 피해 다녔다.
더 이상 그를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달포전 그 집 앞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차마, 면전에서 외로 틀 수 없어 인사를 차렸다.

나는 혹시 몰라 예비용으로 배낭에 동물 먹이를 가지고 다닌다.
그도 그지만, 강아지는 또 그와는 무슨 상관이랴.

“강아지가 귀여워서 그런데, 가끔 들어가 먹이를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

“그럼, 괜찮지.”

그 날 이후 나는 그 집을 넘나들며 그들에게 먹이를 주어왔다.
산기슭이라 휑하니 뚫린 곳이 많다.
혹여 집 대문이 잠기기라도 하면, 염치 불구하고 그리 드나들기도 했다.
늘 아무도 없는 듯 적적한 외딴 집을 강아지 4마리가 홀로 지키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
넷째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고,
나머지는 발발이, 코카 등 소형종이다.
문 쪽을 향한 곳에 묶여 있는 첫째는 제일 성깔이 사납다.
지 아무리 사나운들, 내겐 다 측은하고 가여울 뿐이다.

고 사납던 녀석이 마지막에 본 날은 내게 손을 다 내밀며 꼬리를 흔든다.
나는 손을 잡아주며 얼러주었다.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다가 성난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히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안으로 뻗어 내려간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작은 뱀들이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는 칡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칡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에선지 다섯 마리의 꿀벌들이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이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서 입에 들어갔다.”

그 녀석들의 앞 날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필경은 머지않아 여름을 나지 못하고 생을 앗길 것이다.
나는 위 설화를 상기하며, 그들에게 맛난 것을 주는 것이다.
집식구가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 가시를 발라 내주기도 하였고,
통조림도 가져다 나눠 주었다.

첫째는 사납고, 둘째는 무심하고, 셋째는 제일 여리다.
넷째는 커다란 덩치에 늘 허기가 졌는지 나를 보면 날뛴다.
세째는 특히 먹이보다 정이 그리운가 보다.
착한 그를 나는 몇번이고 쓰다듬어준다.
나는 그들 앞에 내던져진 칡넝굴이 서서히 쥐에게 갉아먹혀져
조만간 끊어질 것을 진즉 예감하고 있다.
사는 게 방울 꿀을 핥는 것에 다름이 없다면,
그들에게 나는 그나마 꿀이라도 먹여 시름을 잊게 하자는 게다.
이 부질없음에 의지하는 나나 그들이나 모두 가여운 것은 매한가지다.

얼마전 강아지한테 다가가 먹이를 주는데, 어디선가 낑낑 소리가 낮게 들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소리를 쫓아 살펴보니 어두컴컴한 개집 속에서 나는 것이었다.
개 집 안에는 꼬물꼬물 새끼 강아지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모두 다섯이다.

생명을 누가 빛이라고 하였는가 ?
정녕, 내가 그랬는가 ?
경이로움도 잠시,
나는 이내 덜컹 가슴이 아파온다.
저들의 운명은 또 어찌 될 것인가 ?

들여다 보니,
갓난 아이들은 맨바닥에 누워 있다.
“우라질 놈”
하다 못해 고물 북데기 헝겊이라도 깔아주면 어디 덧나나.
정말 흉한 늙은이다. 

다음 날 나는 커다란 수건을 가져다 깔아주었다.
그리고 그 어미인 둘째에겐 특별식을 가져다 먹였다.
...
...

며칠 전이다.
통조림을 주려고 그 집을 들렸다.
그런데, 대문 밖에서 쳐다보니 어째 마당이 휑하다.
강아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 가슴도 언뜻 휑하니 찬바람이 분다.

집안에 들어서 가만히 개집쪽으로 다가갔다.
내 발소리에 놀라 행여 강아지들이 모두 깃털처럼 날아갈 것인 양, 공연히 조심스럽다.
그 아니라도, 첫째, 둘째, 셋째 모두 이미 사라졌다.
넷째는 안쪽 구석에 혼자 묶여 있다.
그런데 그들이 묶여 있던 중앙 마당가에,
내게 등을 진 자세로 앉아 고물 할아버지가 무엇인가 먹고 있다.
드럼통 반을 잘라 만든 화덕은 할아버지가 고물 찌꺼기를 태우는데 쓴다.
거기에 고기를 구워 한참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담고,
가만히 발걸음을 뒤로 돌려 나왔다.

그리고는 저 멀리 산쪽으로 돌아 그 집안을 다시 굽어 보았다.
눈을 옮겨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강아지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여름까지는 그래도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음이 울렁거린다.
술 한 병을 사들고 산에 올랐다.
못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위해 술 몇잔 그저 뿌려주는 것밖에 없다.
멀리 아스라이 벋은 계곡에 물소리만
졸졸 힘없이 잦아든다.

그 날 이후,
나는 강아지가 아니라,
외려 그 할아버지의 뒷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의 등 굽은 잿빛 잔영(殘影)이 마치 정물처럼 낯설다.
한 점, 한 점 맛 있게 들던 그의 모습이 허공중에 낮달인 양 걸려 있다.

“얼음 땅”

시간을 한 칼 베어낸 그 순간이
잿빛으로 멈춰 서서 내 의식을 몇날 점령하고 있다.

***

작년 초파일에 비가 와서 뵙지 못한
내원사 괘불(掛佛)을 금년엔 꼭 만나 뵈옵길 빈다.

괘불에 헌향(獻香),
심불(心佛)의 죄업을 닦을사.

(※ 참고 글 : ☞ 2008/07/29 - [소요유] - 새벽 신음 소리
                   ☞ 2008/08/06 - [소요유] - 궁즉통(窮則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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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감 2008.08.02 05:29 PERM. MOD/DEL REPLY

    감히 무어라 쓸수가 없습니다..

  2. 사용자 bongta 2008.08.02 14:01 신고 PERM. MOD/DEL REPLY

    산동네에 살자니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군요.

    이 사연은 '새벽 신음 소리'( ☞ http://www.bongta.com/300 )
    이리 이어집니다.

  3. 금연자 2009.08.12 12:35 PERM. MOD/DEL REPLY

    ........

  4. 은유시인 2010.02.11 23:38 PERM. MOD/DEL REPLY

    표현이 한 편의 서사처럼 웅장합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치를 떨게 하는군요.
    얼마나 맛이었을까?
    그로인해 얼마나 수명을 더 연장하였을까?
    저 같으면 그 영감한테 심술을 많이 부렸을겁니다.
    하기사 쇠못을 날카롭게 갈아 고양이 이맛떼기에 박아놓은 호로새끼도 버젓이 인간사회에 뒤섞여 살고 있지요.
    맛있는 밥타령을 해가며 온갖 영화를 누리려하겠지요.
    저 아픈 것을 못느껴본 인간들일테니
    모가지를 비틀든 발목을 부러뜨리든 한번 디게 아프게 해줬으면 합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12 20:48 신고 PERM MOD/DEL

    그 집 앞에 조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습니다.
    한 편에 철망을 에두르고 강아지 둘을 키우고 있지요.
    한참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 사찰 주지가 말하길 그 즈음 먹다만 개 머리가 그 철망 안에 던져져 있었다는군요.
    그래 그 고물할아버지에게 어찌 된 것이냐 하였더니만,
    그 사찰 개가 배가 고플까봐 던져 넣었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네 삶은,
    탕확(湯鑊) 속인 양 절절 끓고,
    포락(炮烙)의 형벌을 가하는 기름 칠한 동주(銅柱)가 곳곳에 놓여져 있는,
    형국을 방불하고 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은유시인 2010.02.13 01:53 PERM. MOD/DEL REPLY

    어제 같은 견공을 잡아먹는 식인개 얘기를 들었습니다.
    창살에 갇혀 던져진 개고기 찌꺼기로 연명했던 개가 탈출하여 저지른 짓이랍니다.
    그 할아버지한테 제 넙쩍살 도려내서 강제로 먹였으면 합니다.
    그 인간을 사람고기 먹는 식인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13 20:48 신고 PERM MOD/DEL

    저 할아버지는 그 이후 저의 타이름을 받고는,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강아지를 들였지요.
    건사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강아지를 들이며,
    제 잇속을 챙기려는 것이지요.
    자신이 권사로 있다는 교회 식구로부터,
    강아지를 주로 넘겨받는 것같습니다.
    필시 그 때마다 사례비를 받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교회 목사를 만나 제대로 교도하여 줄 것을 청하였지요.
    처음엔 그럴 듯한 낯빛을 하며 저를 맞이하였습니다만,
    두 번째 다시 만나려 하니 목사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저를 피하더군요.

    사정이 뻔한 저 고물할아버지에게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넘기는,
    저들 역시 공범 관계이지요.
    제 손엔 피를 묻히지 않고 궂은일을 처리하고자 하지만,
    그 죄가 어찌 할아버지와 다를 바 있겠습니까?

  6. 은유시인 2010.02.14 01:01 PERM. MOD/DEL REPLY

    이 동화도 오늘 써서 샘터 동화공모에 응모한 작품입니다.
    비공개해야 하는데 살짝 올려드리오니 혼자서만 보셨으면 합니다.

    ****************

    [동화]

    하나님, 하나님

    - 은유시인 -



    하나님은 엄청 바쁜 분이시다. 인간이 알고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계를 포함하고 있는 대우주보다 훨씬 더 큰 우주, 그것도 한두 개의 우주가 아닌 수천억 개의 우주를 들여다보셔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숱한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 수효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생명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관심을 끌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인가.
    인간은 착각을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다 하질 않나, 더 나아가 인간만을 편애하고 계시리란 착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인간이 어느 우주의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잘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까마득히 잊고 계신지도 모른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이란 존재를 알고 계신다면, 더 나아가 자신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고 또한 편애하고 계신다면, 인간 세상은 아주 평화롭고 화목하여 천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인간이 어찌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식들끼리 어찌 싸울 수 있겠으며, 선생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학생들끼리 어찌 싸울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인간으로서 천만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무소불위의 권능은 지니셨으나 기억력은 정말 형편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듯 바쁘디 바쁜 하나님께서 예고도 없이 진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셨다.
    성경을 통해 예언처럼 전해왔던 재림예수가 아닌, 진짜 하나님 그 자신이 직접 나서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기에 뭔가 좀 모자라 보이는 인간 탈을 쓰고 나타나셨다. 좀 더 잘 아셨더라면, 좀 더 세련된 인간 탈을 쓰고 나타나셨을 텐데 말이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매, 그리고 털북숭이의 팔다리와 제멋대로 돌출된 이목구비로 꽤나 원시적인 생김새의 탈이었다. 아마 하나님은 태고적 원시인의 모습만 희미하게 기억하셨던지, 그래 네안데르탈인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지니셨다. 게다가 차림새 또한 가릴 데는 가렸으나 그저 털가죽인지 나무껍질인지 모를 그런 재료를 써서 손으로 얼기설기 제멋대로 꿰매 만든 것들이었다.
    생김새나 차림새가 그러하니 보기엔 거지 중에도 상거지라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커녕 거지왕초라 해도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 탈을 쓰신 하나님이 인간들과 친해보려고 인간들 틈에 끼어들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궁금했다. 인간이 개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모르듯이, 그리고 개미를 연구하기 전까지는 개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있었듯이, 하나님 또한 인간이 어떤 생각들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인간들이 자꾸 피하려 드는 것이었다. 팔짱 끼고 걷는 연인을 보면 ‘팔짱 끼고 걷는 것이로구나’ 싶어 연인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려들면 놀라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무리를 지어 걷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 속에 끼어들어 함께 걷고자 했으나 모두들 이리저리 피하려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 까닭을 궁금히 여기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반갑게 맞았다.
    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남루하면서도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을 집적거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나온 경찰들이었다. 하나님은 경찰에 의해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강제로 연행되었다.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에다 주거지불명으로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첫날밤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
    하나님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수갑이 채워진 손목이 얼얼하여 풀려했어도 풀리지가 않았고, 유치장에 수감되어 밖으로 나가려해도 유치장 창살이 버티고 있어 그야말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수천억 개의 우주를 창조했고, 그 어디든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던 내 권능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하나님은 유치장 안에서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차! 인간 탈을 빌려 썼기 때문에 권능마저 인간 탈에 의해 속박되었구나.’
    왜 그걸 미처 몰랐을까? 하나님은 자신이 저지른 큰 실수를 깨닫고 가슴을 쳤다.
    전에 자신의 권유로 인간 세상에 보내졌던 아들 독생자 예수가 직접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인간은 아들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가시관을 머리에 강제로 씌우고, 또 채찍질을 해가며 골고다언덕까지 무거운 나무십자가를 메고 가게 하질 않았던가. 게다가 십자가에 매달고는 죽을 때까지 물도 주지 않고, 마지막에는 예리한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게 하질 않았던가.’
    예수의 권능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곤혹을 치르기는커녕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이란 생명체를 멸종까지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 탈을 뒤집어 쓴 뒤엔 그 권능이 맥을 못 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 광경을 뻔히 지켜보고도 아비인 하나님 자신도 자식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예수로부터 두고두고 원망까지 들어야 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당시 저는 굉장히 힘들었고, 또 많이 아팠습니다. 가시관을 머리에 씌울 때도 아팠고, 채찍질을 해가며 무거운 나무십자가를 끌고 가게 했을 때엔 기진맥진하여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특히 나무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매달렸을 땐 너무 아파서 비명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얼마든지 안 아프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저를 안 아프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들아. 인간 탈이 그토록 지독한 탈인 줄 내 미처 몰랐었니라. 그러니 네가 얼마나 아팠을지 내 어찌 짐작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때 인간 탈을 쓰고는 아들 또한 그 어떤 조화마저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었는데, 그걸 또 깜빡 잊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조사실로 불려나가 30대 초반의 수사관 앞에 앉혀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이상한 놈 다 보겠다’라는 표정으로 힐끗 거리고는 저희들끼리 하나님을 가리키며 시시덕거렸다.
    담당수사관은 하나님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주민등록증 내놔 봐!”
    “…….”
    “주민등록증 내놔보라니까, 뭘 해?”
    “…….”
    담당수사관은 옆 자리 수사관을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두어 차례 빙빙 돌렸다. ‘이거 미친놈 아냐?’란 의미였다.
    “이름?”
    “…….”
    “이름이 뭐냐고?”
    “……!”
    “이름을 대보라니까? 이름도 몰라?”
    “하나님이요.”
    “하나님이라……. 성은 하 씨일 테고. 이름은 나님이라……. 좀 특이한 이름이군.”
    “…….”
    “주민등록번호?”
    “…….”
    “주민등록번호 대보라니깐.”
    “……!”
    “주민번호 몰라?”
    “……?”
    옆 자리 수사관이 의자를 뒤로 빼고는 담당수사관 쪽으로 돌려 앉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거 또라이나 미친놈 같은데, 특별한 죄가 없음 그냥 내보내지 뭘.”
    “생긴 것이 야만인처럼 우락부락한데다, 집도 절도 없는 놈이 어디 가서 또 무슨 행팰 부릴 줄 알고…….”
    “조서 받는데 꽤나 애먹을 듯 보이네. 내 보아하니 능청을 떤다기 보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던가, 아님 미친놈 같애. 그러니 조서를 어떻게 받을려고?”

    인간 탈을 덮어 쓴 하나님은 몇 차롄가의 조서를 더 꾸미고 나서, 한번 들어가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악명 높은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200자 원고지 22매 분량)

    2010/02/13/23:31

    사용자 bongta 2010.02.14 18:51 신고 PERM MOD/DEL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이런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어찌 그리 글로 잘 풀어내시는지 부럽습니다.
    아이들한테 조금 어렵지만 좋은 공부꺼리가 되겠습니다.
    아니 정작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일러야 옳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자 독영경(獨影境)이 생각납니다.

    자기의 주관, 사랑, 원망(願望)을 투영하면서 그 그림자를 절대화한 세상.
    그를 유식(唯識)에선 독영경(獨影境)이라 하지요.
    한 여인을 짝사랑합니다.
    그런데 실인즉 냉정히 따져보면 그게 여인을 사랑한 게 아니라,
    제 심상에 깃든 이미지를 사랑한 것일 경우가 많지요.
    나르시스처럼 제 모습에 취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인 것을.

    그러하니 독영경(獨影境)이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가 아니라,
    거꾸로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라 할 수 있습니다.

    물가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고 스스로 화들짝 놀란,
    두꺼비처럼 세상은 허깨비 놀음 같은 것.

    동화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란,
    저쯤이면 이미 전지전능한 것 하고는 멀지요.
    그러하니 저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또다른 인간 하나가 아닐까요?

    기실 인간은 모두 저마다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살고들 있지 않습니까?
    불교의 유식학에선 이를 독영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게 모두다 유식(唯識) 즉 ‘오로지 의식’이 환(幻) 지은 미망이라고 이르고 있는 게지요.

    저마다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들 가지만,
    이것을 색경(色鏡)에 비친 제 그림자에 불과하다라고 있으니,
    얼마나 가엽고도 무참한 지적입니까?

  7. 은유시인 2010.02.15 01:07 PERM. MOD/DEL REPLY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말을 했지요?
    아마 니체는 철학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얘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믿지 못할 세상에서 나를 믿으라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애둘러 표현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고, 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래도 고물상할아버지는 자신은 믿었던 모양입니다.
    몸보신하려 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설엔 가족들과 함께 떡국이라도 드셨는지요?

    사용자 bongta 2010.02.15 18:33 신고 PERM MOD/DEL

    저 집 할머니가 처음엔 저를 백안시 하더니만,
    제가 저들 강아지들을 돌본지 해를 넘겨 년 반을 지나도 초지일관 꿋꿋하자,
    최근엔 저를 보면 그래도 제법 송구해 하긴 합니다.

    그런데 저를 보면 늘 거의 죽어가는 표정을 짓습니다.
    이게 저는 아주 비굴하게 보이는데,
    이런 표정으로써 자신은 약자임을 강조하고 있음이겠지요.
    그러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고,
    또한 그러하니 너는 도울 수밖에 없다라는 연출인 것이지요.

    부처님 재세시 공론(空論)에 떨어진 수행자들이 연달아 자살을 합니다.
    세상은 허무한 것이라는 단견(斷見)에 빠진 이들은,
    살아있음으로써 짓는 온갖 욕망을 다 버리고,
    마지막으로 ‘죽으려는 욕망’ 하나만 남겨 갖습니다.
    그리고는 그 남겨진 의욕조차 죽음으로써 끝내 버립니다.

    하지만 저 할머니의 다 죽어가는 표정은,
    상견(常見) 즉 이 세상이 영원하리란 구극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행여 죽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영생하려니 믿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저 할아버지는 교회의 권사씩이나 되며,
    교리에 충실 하느라고 돼지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교회를 열심히 나갑니다.
    이보다 더 절절한 욕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쯤이면 차라리 가엽다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 슬픈 정경입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축복 받으실 거예요.”

    제가 말합니다.

    “같은 일을 두고,
    한쪽에서 축복 받으면, 그러면 다른 쪽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와 유사한 말은 제가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거든요.
    http://bongta.com/301

    축복은 조금 개신교적 어법으로 느껴지지만,
    복은 그저 두루 쓰이는 일반적인 화법이겠거니와,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모두들 하나같이 제 집 강아지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화법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면서,
    이 말을 토해내는 저들은 과연 어떠한 물건인가 말입니까?

    축복이, 복이 과연 제들이 남에게 내려주는 것입니까?
    제 책임에서 벗어나면서 남을 부추기는 순간,
    그게 실인즉 제 허물의 근거가 되는 것을 왜 모른단 말입니까?
    이 얼마나 뻔뻔한 태도입니까?
    이 누추한 모용(貌容)을 하고서는,
    뒷전에서는 아마도 벌었다고 셈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증스럽고도 비겁한 짓거리지요.

    그러면서 교회는 빠짐없이 나갑니다.
    교회가 철없는 계집아이들 귓불에 다는 생철 귀걸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연봇돈 내고 영생을 빌고, 복을 구매하고,
    그리고는 현실의 세계에 이르러서는
    제 할 일을 남에게 미루면, 그게 남에게 복을 파는 짓이 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이 어찌 싸구려 귀걸이 달고 갖은 폼 다잡는 계집아이와 무엇이 다릅니까?

    어림없는 짓이지요.
    실인즉 단돈 한 푼이라도 공으로 잃고서는 견딜 수 없어할 위인들이 저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떡국 많이 먹었습니다.
    과세(過歲) 평안하시온지요?

  8. 은유시인 2010.02.16 18:04 PERM. MOD/DEL REPLY

    아주 몰상식하고 천벌받아 마땅한 늙은이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소설에 빠져서는 소설 또한 재미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표현한 그들 인간상들이
    언젠가 제 소설에서 독자들에 의해 저주받아야 하는 인물상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전, 설에 방안에만 처박혀서 글만 썼습니다.
    요즘 글이 너무 잘 써져서 마냥 행복합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17 16:02 신고 PERM MOD/DEL

    아아,
    글발, 말발이
    마치 기독교 신자들이 이르듯,
    방언 터지는 양,
    성령이 임하셔서 축포처럼 펑펑 터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외 무엇을 더 구할까나?
    제가 원하는 바이로되,
    그게 세속적인 명예도 아니오, 돈도 아닐진대,
    이런 원망(願望)이란,
    얼마나 소박하니 겸손합니까?

    그런데 이런 경지는,
    실인즉 내 마음이 완전히 정화(淨化)되었을 때,
    야밤 도적처럼 불현듯 내 마음 밭으로 쳐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내내,
    그런 행복한 시간을 벗하시길 ...

  9. 은유시인 2010.02.17 18:52 PERM. MOD/DEL REPLY

    감사합니다.
    전 요즘 문예공모마다 다 응모하고 있습니다.
    시, 수필, 소설, 동화, 희곡 닥치는대로 응모합니다.
    하나라도 되면 살림에 보탬이 되지요.
    지난 석달동안 9개가 당선되어
    다른 이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달리 수입이 없으니
    유명 작가로 출세하여 돈 벌기 전까지는 그렇게라도 수입을 잡아야겠습니다.
    나쁜 짓은 아니겠지요?

    사용자 bongta 2010.02.17 23:17 신고 PERM MOD/DEL

    문재(文才)가 대단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잦으면 필시 큰일을 이루고 말지요.
    선과(善果) 기대합니다.

    제가 원래 공학도지만,
    소싯적 맞선을 볼 때 국문과 출신이면 우선은 아주 좋아했지요.
    글짓는 분을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제 처는 농학 전공을 했으니,
    요즘 제가 꿈꾸고 있는 전원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되려고 그리 되었는가 싶습니다.

  10. 은유시인 2010.02.18 01:19 PERM. MOD/DEL REPLY

    선생님의 글도 그 깊이로는 제가 따르지 못할 겁니다.
    저도 보는 눈은 있어서 드리는 얘깁니다.
    절대로 아부가 아니오니 언짢게는 생각마시옵기를,,,,

    자칭 작가들 가운데 엉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맟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엉망이고
    글도 무슨 내용인지 마냥 횡설수설인 글을 자랑이라고 내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18 23:43 신고 PERM MOD/DEL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나침이시니 이는 짐짓 격려해주시려는 고마운 말씀으로 새겨듣습니다.

    제 글은 그저 독백 같은 것.

    그저 볕 좋은 어느 봄날 툇마루에 앉아,
    푸른 하늘 지나는 흰 구름 쳐다보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모습에 취하듯,
    그리 홀로 자족할 뿐이지요.

    선생님같이 두루 주위에 빛을 던져,
    사람들을 일깨우고 즐거움을 선사하시는 요익(饒益)의 글과는 사뭇 격이 다릅니다.

  11. 은유시인 2010.02.19 15:48 PERM. MOD/DEL REPLY

    서로 칭찬을 주고받는 것 같아 이 댓글들을 읽는 이들이 웃을까 염려됩니다.
    앞으론 칭찬의 글은 삼가하겠습니다.

  12. 은유시인 2010.02.19 15:58 PERM. MOD/DEL REPLY

    그의 등 굽은 잿빛 잔영(殘影)이 마치 정물처럼 낯설다.
    한 점, 한 점 맛 있게 들던 그의 모습이 허공중에 낮달인 양 걸려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으로 차용하고픈
    너무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13. 사용자 bongta 2010.02.19 21:37 신고 PERM. MOD/DEL REPLY

    고맙습니다.

    전일 댓글로 드린,
    아래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제 글은 몸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나아간 이상 이미 제 것이 아닙니다.
    허공중에 바람 타고 나르는 날개처럼,
    물을 따르는 외로운 돛단배와 같이 쉬이 지나가는 인연의 터럭 실줄인 것이지요.
    우리가 말을 밖으로 내놓으면 "옴마니반메훔" 알파와 오메가
    그 소리의 영혼이 가없는 우주를 끝없이 떨며(振動) 나아갑니다.
    그런즉 그 끝줄을 움켜지고 제 것이라 우김은 얼마나 구차한 노릇이겠습니까?”

    제 글이 sourcer는 커녕 connector로서가 아닌
    그저 평범한, 처처(處處)에 質料化, 無化 되기를 소망한 것이지요.

  14. 은유시인 2010.02.20 00:36 PERM. MOD/DEL REPLY

    선생님의 글을 제법 읽어습니다.
    그렇지만 못 읽은 글이 더 많으리라 봅니다.
    전, 글 잘 쓰는 분.... 특히 따뜻한 정감이 서려있는 그러면서 추상같은 글을 좋아하고
    또 그런 글을 쓰는 분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20 14:20 신고 PERM MOD/DEL

    요즘 글제는 많이 떠오릅니다만,
    마음이 잔나비처럼 나무줄기 타고 이리저리 건너다니기 바빠,
    미처 알량한 글이나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후 봄바람 불면,
    보리피리 불며,
    이곳에 자주 인사드릴 수 있을까?
    그리 기약하면,
    새봄을 기다립니다.

    늘 지켜보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5. 은유시인 2010.02.20 21:56 PERM. MOD/DEL REPLY

    이렇게 댓글로 선생님과 교우할 수 있어 좋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21 22:07 신고 PERM MOD/DEL

    이 고적하니 외진 곳,
    이리 납시어 글 적선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역시 글일지언정 이를 매개로 만나뵙게 되어 기쁩니다.

  16. 은유시인 2010.02.22 00:34 PERM. MOD/DEL REPLY

    고적한 곳이 아니라
    제겐 보물창고처럼 여겨집니다.

    재미있게 읽혀지는 글이요, 뭔가 의미심장한 글이 많습니다.

  17. 꿈과목표 2010.07.29 17:34 PERM. MOD/DEL REPLY

    님글 잘읽었읍니다.
    문장도 운치있고. 표현도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나 내용면으로. 내면쪽으로는 아직 세상을 읽지못하시는것 같습니다.
    인간세상이 어찌 감정으로 표현될것이며. 인생사가. 어찌 한사람의 작가의 글에 한꺼번에 표현
    되겠읍니까만........

    인간도. 동물도. 모두가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벗어날수없고. 그게 세상의 이치중 가장적당하다고
    사료됨이고. 불교나 기독교나. 그밖의 종교. 모든것이 . 우리의 인생의 허무를 메워줄것을 기대하고.
    의지한다고 생각됩니다. 개몇마리에 사람을아주개보다 못한표현은 선생님이 아직. 세상을 너무도
    보이는데만 치중함이며. 세상은 보이지않는중에 진행되고. 그것을 다아는사람도. 또다알려고하는사람이 비정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디 사람을 . 이해하는쪽으로 가닥을 잡아보시기를 권합니다.

  18. 사용자 bongta 2010.07.29 21:12 신고 PERM. MOD/DEL REPLY

    존재가 제 자신을 부정한다.

    안녕하세요.

    님이 글로서 가르치려는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우선은,
    형식 구조상 착종(錯綜)됨이 누누 겹치니,
    그 내용의 진실 됨이 의심스럽군요.

    그래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몇가지 지적해보겠습니다.
    인간, 동물 모두 적자생존의 법칙을 여읠 수 없다고 이르고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종교가 인생의 허무를 메워주신다는 표현이 상호 어긋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보다 강하다면 적자생존할 터인데 인생의 허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론하시겠다면 차라리 동물에게 종교가 필요하겠지요.
    또한 인간간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우승열패로 최후엔 오직 유일하게 하나만 적자생존할 터인데,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의 허무함은 종교가 과연 메워준다는 말씀입니까?

    그러하다면 묻거니와 적자생존의 법칙과 종교는 어떤 한 것이 더 수승한 것입니까?
    종교가 대단하다면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인해 허무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생명들은,
    그럼 무엇인가요?
    이들은 종교를 위해 허무함을 예비하여야 하는 존재에 불과한가요?
    만약 종교가 그리 대단하다면,
    먼 훗날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는 동물,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종교인다운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동물, 인간을 심연처럼 깊고, 또는 가파른 절벽처럼 먼 떨어진 존재로 규정하는,
    님의 사고방식은 너무 차갑고 냉혈적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시길 권한다면 예의에 어긋날까요?
    동물을 인간을 위해 당연히 유린당하여야 할 존재로 규정하는 태도는,
    보통 제대로 개신교를 배우지 못하신 분들이 막무가내로 갖고 계시더군요.
    님이 행여 그런 몰지각한 분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한편,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진행된다고 하시면서,
    또한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라는 주문은 또 무엇인가요?
    님의 주문대로라면,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넘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운용되는 세상의 이치가 있을진대,
    그럼 사람에 대한 이해는 왜 필요한지요.

    님의 글은 여러 곳에서 찰나간 전후의 문맥이 제 존재를 상호 전격 부정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내용이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우선은 글을 제대로 쓰는 훈련을 더 하신 후에,
    나타나야 듣는 이를 제대로 가르치실 수 있겠습니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개신교도 분 같은데,
    개 몇 마리 보다 못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나쁜 사람이 있을 따름이지요.
    멀쩡한 개와 비교할 필요조차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개와 비교할 것조차 없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하는 인간이 많습니다.
    지금 본 글에서 지적한 것은 일부 교회 사람들 모두 공범 관계로 엮여,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만나 본 그 교회 목사도 인정하였던 부분이지요.
    특정 종교인 자체를 나무라기 이전에 사실행위를 적시하고 있는 것인데,
    님은 어찌하여 이를 특정 종교인을 폄훼하는 것으로 보고 계시는지요?
    이쯤이면 님의 자격지심은 제법 심한 편인데요.

    사실을 사실로서 객관화 하지 못하고,
    내 편, 저 편 가르면서 사물을 재단하는 버릇은 아주 미숙한 태도지요.
    사람, 동물을 떠나 저리 악행을 행하는 것을 두고,
    세상의 일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 이르시면서,
    그리 먼 훗날의 판단으로 미루고자 하십니까?
    대단히 비겁하게 보입니다.

    권하건대,
    그리 멀리 미루실 것이 아니라,
    당전하는 현실 앞에서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Here and Now.
    바로 여기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고,
    미루어 신에 기대어 현실을 피해가려는 태도는 성실하지 않습니다.
    오늘 당장 여기에 충실한,
    그런 연후라야,
    나중에 그대의 신 앞에서 떳떳하지 않을까요?

    본질은 제쳐놓고,
    삐딱하니 종교 문제로 비화시키는 이런 버릇은 아주 고약한 것이지요.
    바라건대,
    매사를 종교에만 비추어 재단하시지 마시고,
    그저 무색투명하니 사실 그 자체에 집중하여 옳고 그름을 발르는,
    합리적인 훈련을 가져 보시길 기대합니다.
    종교인 특히 일부 개신교도들의 편향된 태도는 사회적 소통을 방해하고,
    갈등을 야기하며 평화를 헤칩니다.
    예수의 사랑을 우리 함께 다시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종교인이전에 인간다운 인간이 먼저 필요한 세태지요.
    샘물교회의 국가 보상요청, 이슬람국가에 대한 막무가내 선교활동 따위는
    종교인 이전에 인간이 먼저라는 사실을 교훈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지요.

    혹 오해하셨을까 싶어 밝히거니와,
    저는 기독교든 불교든 어느 종교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은 마냥 배척하는 것만도 아니고,
    때로는 훌륭한 가르침 앞에 배움을 구하기도 한답니다.

    참고로 사실 관계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기사를 올렸던 것 하나를 소개합니다.
    http://bongta.com/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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