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낮달

생명 : 2008. 4. 29. 12:43


동네 산기슭 국유지에 집 한 채가 들어서 있다.
그 집 주인은 폐지를 주워 생활하신다.
우리는 그를 고물 할아버지라 부른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듯, 처음 본 내게 oo교회 다닌다고 소개를 한다.
자랑스러이 자신은 수십년 신자라며 얼굴이 환해지신다.
때문에 자신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가 돼지고기를 종교적 금기로 여기는 것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일이니,
그 분의 신심을 미루워 짐작할 수 있겠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 집엔 늘상 강아지 너댓 마리가 묶여 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랬다가는 다시 하나 둘 강아지 숫자가 늘어난다.
이러길 년년세세 반복한다.

하늘엔 달님이 백도(白道)따라 차고 이지러진다.
여기 산기슭 오두막엔 강아지들이 달님 쫓아 늘었다 준다.

그가 말하길,
교회 사람들이 그에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키우다 처리하기 곤란할 때,
이 고물 할아버지에게 넘기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언젠가 나는 그리 끝까지 건사하시지 못할 것인데,
그 부탁을 왜 거절하지 않으냐고 여쭈었다.
그는 말하길 교회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란다.

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부담을 남에게 넘겨 위안을 얻고,
고물 할아버지는 넘겨 받을 때 사례비를,
나중에 개장수에게 팔 땐, 다시 이를 얻는다.
양자는 이리 음습한 공범의 관계였던 것이다.

언덕에 자리잡은 oo교회 사람들은 햇빛 내리쬐는 성전안에서
고은 소망을 빌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리라.

저들 교회신자는 자신들의 평안을 위해 sink가 필요했고,
저 고물 할아버지는 푼돈을 위해 기꺼이 sink가 된다.
어둠을 쓸어넣는 수채구멍, sink 말이다.

그런데, 강아지가 어둠인가 ?
생명은 곧 찬란한 빛이 아닌가 말이다.
그 어떠한 생명이라도 결단코 어둠일 수 없다.

저들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어둠이요, 미망이다.
개숫대에 쓸어넣어야 할 것은 정작 저들 흉한 마음이 아닌가 ?
저 빛 내리는 성전에 기도 올리는 저들 가슴에 고인 그 죄악들 아닌가 ?

저들이 말하는 성전에 빛이 임하신다면,
미욱하나마 빛을 기릴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빛이 곧 생명일진대,
생명을 쓰레기 치우듯 거래하는 저들,
아니 곧 우리들이겠음이니,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 성전에서 감히 무릎인들 꿇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뒷동산 넘어 저쪽 외딴 집에도 커다란 개가 있다.
어느 날 그 집 개는 소위 뜬장 위로 올려졌다.
(※ 뜬장 : 커다란 닭장같은 것으로 밑이 쇠철망으로 되어 똥이 밑으로 빠지게 된다.)
그 날 이후, 그 진돗개의 울음 소리를 차마 더는 듣기 힘들다.
주인 드나들 때마다 꼬리를 쳐서 반기던 그들을 어느 날 뜬장으로 올리는
저 모진 마음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
사는 것이 너무 진저리쳐지도록 슬프다.

국립공원 안에도 민가가 두어채 있다.
그 중 한 민가는 암암리에 술을 판다.
그 집 뜰에도 강아지가 사육된다.
이 역시 년년세세 사라졌다 봄 되면 다시 채워진다.

60년대 못 먹던 시절도 아닌데,
돈 몇 푼 벌겠다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팔아 넘기는 저들이 나는 밉다.
정말, 화가 솟는다.
아니 그들이 아니라,
나는 내게 기어히 화가 난다.
어찌 할 수 없이 무력한 내게 나는 화가 난다.

한동안 나는 고물 할아버지를 외면하며 피해 다녔다.
더 이상 그를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달포전 그 집 앞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차마, 면전에서 외로 틀 수 없어 인사를 차렸다.

나는 혹시 몰라 예비용으로 배낭에 동물 먹이를 가지고 다닌다.
그도 그지만, 강아지는 또 그와는 무슨 상관이랴.

“강아지가 귀여워서 그런데, 가끔 들어가 먹이를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

“그럼, 괜찮지.”

그 날 이후 나는 그 집을 넘나들며 그들에게 먹이를 주어왔다.
산기슭이라 휑하니 뚫린 곳이 많다.
혹여 집 대문이 잠기기라도 하면, 염치 불구하고 그리 드나들기도 했다.
늘 아무도 없는 듯 적적한 외딴 집을 강아지 4마리가 홀로 지키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
넷째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고,
나머지는 발발이, 코카 등 소형종이다.
문 쪽을 향한 곳에 묶여 있는 첫째는 제일 성깔이 사납다.
지 아무리 사나운들, 내겐 다 측은하고 가여울 뿐이다.

고 사납던 녀석이 마지막에 본 날은 내게 손을 다 내밀며 꼬리를 흔든다.
나는 손을 잡아주며 얼러주었다.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다가 성난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히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안으로 뻗어 내려간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작은 뱀들이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는 칡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칡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에선지 다섯 마리의 꿀벌들이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이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서 입에 들어갔다.”

그 녀석들의 앞 날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필경은 머지않아 여름을 나지 못하고 생을 앗길 것이다.
나는 위 설화를 상기하며, 그들에게 맛난 것을 주는 것이다.
집식구가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 가시를 발라 내주기도 하였고,
통조림도 가져다 나눠 주었다.

첫째는 사납고, 둘째는 무심하고, 셋째는 제일 여리다.
넷째는 커다란 덩치에 늘 허기가 졌는지 나를 보면 날뛴다.
세째는 특히 먹이보다 정이 그리운가 보다.
착한 그를 나는 몇번이고 쓰다듬어준다.
나는 그들 앞에 내던져진 칡넝굴이 서서히 쥐에게 갉아먹혀져
조만간 끊어질 것을 진즉 예감하고 있다.
사는 게 방울 꿀을 핥는 것에 다름이 없다면,
그들에게 나는 그나마 꿀이라도 먹여 시름을 잊게 하자는 게다.
이 부질없음에 의지하는 나나 그들이나 모두 가여운 것은 매한가지다.

얼마전 강아지한테 다가가 먹이를 주는데, 어디선가 낑낑 소리가 낮게 들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소리를 쫓아 살펴보니 어두컴컴한 개집 속에서 나는 것이었다.
개 집 안에는 꼬물꼬물 새끼 강아지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모두 다섯이다.

생명을 누가 빛이라고 하였는가 ?
정녕, 내가 그랬는가 ?
경이로움도 잠시,
나는 이내 덜컹 가슴이 아파온다.
저들의 운명은 또 어찌 될 것인가 ?

들여다 보니,
갓난 아이들은 맨바닥에 누워 있다.
“우라질 놈”
하다 못해 고물 북데기 헝겊이라도 깔아주면 어디 덧나나.
정말 흉한 늙은이다. 

다음 날 나는 커다란 수건을 가져다 깔아주었다.
그리고 그 어미인 둘째에겐 특별식을 가져다 먹였다.
...
...

며칠 전이다.
통조림을 주려고 그 집을 들렸다.
그런데, 대문 밖에서 쳐다보니 어째 마당이 휑하다.
강아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 가슴도 언뜻 휑하니 찬바람이 분다.

집안에 들어서 가만히 개집쪽으로 다가갔다.
내 발소리에 놀라 행여 강아지들이 모두 깃털처럼 날아갈 것인 양, 공연히 조심스럽다.
그 아니라도, 첫째, 둘째, 셋째 모두 이미 사라졌다.
넷째는 안쪽 구석에 혼자 묶여 있다.
그런데 그들이 묶여 있던 중앙 마당가에,
내게 등을 진 자세로 앉아 고물 할아버지가 무엇인가 먹고 있다.
드럼통 반을 잘라 만든 화덕은 할아버지가 고물 찌꺼기를 태우는데 쓴다.
거기에 고기를 구워 한참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담고,
가만히 발걸음을 뒤로 돌려 나왔다.

그리고는 저 멀리 산쪽으로 돌아 그 집안을 다시 굽어 보았다.
눈을 옮겨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강아지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여름까지는 그래도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음이 울렁거린다.
술 한 병을 사들고 산에 올랐다.
못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위해 술 몇잔 그저 뿌려주는 것밖에 없다.
멀리 아스라이 벋은 계곡에 물소리만
졸졸 힘없이 잦아든다.

그 날 이후,
나는 강아지가 아니라,
외려 그 할아버지의 뒷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의 등 굽은 잿빛 잔영(殘影)이 마치 정물처럼 낯설다.
한 점, 한 점 맛 있게 들던 그의 모습이 허공중에 낮달인 양 걸려 있다.

“얼음 땅”

시간을 한 칼 베어낸 그 순간이
잿빛으로 멈춰 서서 내 의식을 몇날 점령하고 있다.

***

작년 초파일에 비가 와서 뵙지 못한
내원사 괘불(掛佛)을 금년엔 꼭 만나 뵈옵길 빈다.

괘불에 헌향(獻香),
심불(心佛)의 죄업을 닦을사.

(※ 참고 글 : ☞ 2008/07/29 - [소요유] - 새벽 신음 소리
                    ☞ 2008/08/06 - [소요유] - 궁즉통(窮則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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